너무 거창하게 이름을 붙였다. 존재의 방식이라...왜 이런 제목을 붙이고 싶었을까? 나도 모른다. 그냥 페이퍼 쓰기를 누르자 마자 머리속에 떠오른 제목이라 거부하지 않고 그냥 붙였다.
지금 '알렉스'는 앓고 있다. (좀 더 보충 설명을 하자면 내가 키우고 있는 히야신스다.) 수경재배에서 흙재배로 녀석을 옮겨 심은 후, 계속 녀석의 잎은 누렇게 말라가고 있다. 꽃을 피우고 난 후 계속 그렇게 쇠약해져가고 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고 있고 녀석에게 일정시간의 햇빛을 쬐어주고 일정 시간은 그늘에 놔두고 5일에 한번씩 물을 주고 있다. 그런데도 녀석은 누렇게 말라가고 있다. 녀석을 탓할 생각은 없다. 환경의 변화 속에서의 고전분투로 녀석이 녹초가 되어 있을 것임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더 포기할 수 없나보다. 어제보다 더 누렇게 말라가고 있는 이파리에 대해서 가슴아파 하면서도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건강한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그늘로 녀석을 옮겨다 놓았다.
다시 자세히 녀석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녀석의 잎에 자꾸만 시들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차이가 있음을 관찰할 수 있었다. 가장 겉부분에서 녀석을 감싸고 있던 잎들은 거의 시들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중심에서 녀석을 싸고 있던 잎은 그 시듦의 속도가 아주 느리다.
녀석에게 지금이 가장 힘든 시기라는 생각을 한다. 환경의 변화에 맞추어 뿌리도 다시 뻗어야 하고 잎도 다시 키워야 하고... 모든 생명에게는 한정된 에너지가 있다. 그 에너지는 물론 개개의 생명마다 다르다. 더욱이 녀석처럼 꽃을 피워 올리느라 에너지의 대부분을 써 버린 후라면 더욱 더 에너지의 고갈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녀석은 결론을 내린 거 같다. 자신의 에너지를 새로운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뿌리를 뻗는데다 집중하고 여태껏 녀석을 감싸고 있던 잎들 중 가장 겉부분부터 조금씩 버려가기로.
녀석을 보면서 인간의 삶을 생각해 보았다. 인간의 삶 속에도 그와 같이 어려운 시절이 있다. 살아있기 때문에 앓게 되는 형벌과도 같이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함께 있다. 바닥으로 꺼져버릴 거 같은 절망의 늪을 허우적 거리는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서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버팀목이 되는 존재들을 만나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키워왔던 헛껍질들을 벗겨내게 만들고 자신을 여태껏 버티게 만들었던 중심(中心)에다 힘을 쏟게 만든다. 어쩌면 밖에서 보기에는 그 모습이 붕괴이고 침잠일 수 있지만, 스스로는 자신에다 힘을 모으며 자신의 모든 구조와 체계를 재편성(再編成)하는 귀한 시간일 지 모르겠다.
생(生)을 앓는 녀석, '알렉스'를 바라보면서 나는 녀석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주제 넘게 '너의 아픔을 안다. 힘내라.'라고 하는 것도 어째보면 허식(虛式)처럼 보일 듯해서 이다. 나는 너가 아니다. 그래서 너의 아픔을, 너의 생(生)을, 너의 비명(悲鳴)을 너의 시선이 아니라 나의 시선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이와 같이 왜곡된 시선으로 너를 알았다고, 널 힘들게 만들 것들로부터 너를 지켜주겠다고 쉽게 말하는 것이 너에게 도움이 될까? 그것을 나는 가장 저어하고 있다.
'알렉스'...너도 내가 아니다. 너도 나를 알지 못한다. 널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너의 안녕과 너의 평안을 비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의 비참함을 너는 알지 못한다. 나또한 입밖으로 절대로 그런 내 마음을 이야기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연(因緣)의 묵직함은 존재의 희,노,애,락 마져도 그와 같은 통로로 연결되어 통한다는 데 있는 것이겠지.
난, 내일도 같은 시간에 널 창가에 놔두고 같은 시간에 널 그늘에다 옮겨 빛에 목말라 하지도, 서늘함에 목말라 하지도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 네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힘든 과정을 마치고, 허울과 껍데기를 모두 던져 버리고 여윈 모습이나마 다시 너의 뿌리로 물과 양분을 빨아들여 살아가는 모습일 것이다.
너의 존재(存在)가 나에겐 큰 선물이란 걸 잊지 말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