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서 말한다 - 당비생각 02
우에노 치즈코.조한혜정 지음, 사사키 노리코.김찬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은 이유는, 조한혜정과 우에노 치즈코를 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한혜정 선생의 이름은 익히 들었지만, 글은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 우에노 치즈코 선생의 글은 [내셔널리즘과 젠더] 한 권 읽은 게 고작이다. 두 사람이 일본의 월간지 [세카이(世界)]와 (지금은 폐간된) 한국의 계간지 [당대비평]에 공동 연재한 공개편지라면 두 사람의 현실 판단과 지향점을 잘 알려주리라 생각했고, 내 생각은 틀리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두 사람은 내내 우애와 친분을 드러내며 서로의 글을 칭찬하고 다정하게 화답하지만, 나는 왠지 매번 우에노 치즈코가 조한혜정을 한 방 먹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를테면 조한혜정이 “서울의 엘리트 여자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잘했던, 또한 식자층 어머니를 가진 의욕적인 딸들이 택할 수 있는” 코스로서 미국 유학을 했던 경험을 들려주며 우에노에게 “여행을 좋아하고 자유분방한 편인 당신은 대학을 졸업하면서 분명 멀리 떠나고 싶었을 터이고, 그래서 서양으로 유학을 가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을 터인데 유학을 떠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요?” 하고 묻자, 우에노는 1969년 전공투의 싸움이 끝나고 황폐해진 일본의 대학을 떠나 유학을 가고 싶었으나 “평범한 중산계급의 딸에게는 후원자 없이는 유학 같은 것을 생각하지도 못하던 시대”였기에 어느 재단의 유학생 시험을 보았는데 그 시험에서 떨어지고 말았다고 이야기한다.

또 조한혜정이 첫 저서인 [한국의 여성과 남성]의 서문에서 미국의 마가렛 미드가 [남성과 여성]이란 책을 쓸 때 “제목에 ‘미국의...’라고 붙이려는 생각이 정말 조금이라도 머리를 스쳤을까” 하고 쓴 데 대해, 우에노 치즈코는 자신의 저서 [내셔널리즘과 젠더]가 영어판으로 간행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거기에 ‘일본의 경우...’라는 말을 덧붙이자는 제안을 나는 거부했습니다. 어떤 연구에든 ‘한국 사회’라든가 ‘일본의 경우’ 같은 말을 붙이게 되면 지역 연구의 하나로 특수화되어버려, 아무도 뭔가 보편적인 메시지를 취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고 말하는 식이다.

그러나 네 번째 편지에서는 조한혜정이 제대로 역공을 펼치는데(http://www.aladin.co.kr/blog/mypaper/833278 참조), 그것을 보며 어쩌면 조금 더 불리한 위치(좀더 뒤떨어진 나라, 좀더 불이익이 많은 사회, 좀더 불편한 몸...)에 있는 사람이 그만큼 더 예리할 수 있지 않나, 그것이 바로 약자의 이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모두 관객인 나의 제멋대로 해석일 뿐이다. 그런 건 신경쓰지 말고 알맹이만 보자. 이 책에서 얻을 것은 새로운 ‘답’이다. 나는 그동안 교과서와 사회생활을 통해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법칙에 근거한 ‘모범답안’에 길들여져 왔다. 남자도 아닌데 남자라는 병에 걸렸던 모양이다(http://www.aladin.co.kr/blog/mypaper/833279 참조). 고령화 사회, 노령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 나 자신의 미래를 두렵게 하는 이런 문제에 대해 우에노 치즈코는 “누구든지 노년을 맞이하게 되는 초고령화 사회는 돈과 권력이 결국 모든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없는, 약자가 계속 살아가기 위한 사회를 설계하는 기회(chance)”라고 말한다. 노인, 곧 약자가 다수가 되는 사회, 그러니까 약자들이 서로 도와가며 살 수 있는 사회가 바로 고령화 사회라는 생각! 그렇다면 약육강식의 피라미드 사회보다 훨씬 살 만할지도 모르잖아!

우에노 치즈코가 약자들이 ‘보살핌의 유대’를 맺는 공동체의 실례로 든 곳 중에 ‘베델의 집’이 있어서 반가웠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란 책에서 소개하는 베델의 집, 바로 그곳이다.

우에노 치즈코는 바이링궐이니 글로벌리제이션이니, 영어를 직수입한 표현을 많이 쓴다는 점이 조금 불만.

* 궁금증 하나. 이 책 89쪽에서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해방 다큐멘터리를 찍는 영화감독 구리하라 나나코(栗原 奈奈子)의 [룩킹 포 후미코]라는 영화를 잠깐 언급한다. 후미코? 최근 개봉한 영화 [메종 드 후미코]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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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3-06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하게 저는 YWCA 같은 단체의 간사와 같은 사람들에게
호감이 안 가요.
조한혜정 씨는 Y와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그런 쪽으로 비호감.
숨은아이님의 리뷰를 보니 이 책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숨은아이 2006-03-06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리뷰를 늘 후하게 봐주시는 로드무비님... ^^ 재미있어요. 편지 글이라 술술 읽히고... 조한혜정 선생은 Y하고는 관련이 없어요. 인류학자이면서 여성학자이면서 문화 운동에도 관여하는 분이지요. Y 활동가들 중에서는 존경스러운 분도 많지만 저도 YWCA YMCA는 별로 좋아하지 않네요.

숨은아이 2006-03-06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치요, "또 하나의 문화" 동인으로 활동하셨지요. 개인적인 호오는 그다지 없는데, 탈학교 청소년을 위한 대안 교육장 "하자 센터" 운영하신 이야기를 듣고는 꽤 좋은 쪽으로 기울었어요. ^^ 아이를 낳았기에 청소년 대안 교육에 관심 갖게 된 조한혜정 선생과 아이를 낳을 만큼 무모하지 않았기에 고령 노인의 삶과 권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우에노 선생의 충돌(?)도 재미있습니다.

로드무비 2006-03-06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하나의 문화>가 요즘도 나오나요?
또문에 실린 그의 글을 읽으며 뭔지 비위가 좀 안 맞았던 듯해요.
부분적으로.ㅎㅎ

숨은아이 2006-03-07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하나의 문화, 동인지는 요새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단행본은 내는 것 같던데... 사실 또문은 겉표지만 구경해서, 거기 실린 글들을 잘 몰라요. ^^a (소곤소곤 : 또문 사람들이 거개 "있는 집 딸"로 유학파들이라선지 엄청 현학적이란 얘기 많이 듣긴 했어요.)

숨은아이 2006-03-08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저런. ^^

2006-04-18 15:1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