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서 말한다 - 당비생각 02
우에노 치즈코.조한혜정 지음, 사사키 노리코.김찬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4년 7월
품절


때때로 "지금의 한국은 일본의 1980년대와 비슷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1980년대의 일본에서도 종종 미국의 여성학 연구자가 "지금의 일본은 꼭 1960년대의 미국과 비슷하군요"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의 편지에서 구미나 일본의 학생운동의 세대적 경험은 한국에서는 1980년대에 대응한다고 쓰고 있지만, 실은 나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어느 사회든 글로벌한 동시대성 속에 놓여 있습니다. 어느 사회가 ‘개발도상’으로 보이는 것은 언젠가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진국이 선진국이기 위해서 ‘저개발’의 상태에 멈추게 한 결과에 다름 아닙니다. 양자는 동시대의 양면을 살고 있습니다. 전자가 언젠가 후자처럼 되는 것이 아니고, 전자는 후자와 동시에 생겨나 그 상태로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 우에노 치즈코의 네 번째 편지-157~158쪽쪽

내가 그간의 편지에서 ‘시차’를 강조한 것은 실은 문화적 상대주의적 시각을 무시해서라기보다 진화론적 시각을 강조해서입니다. 물론 이때의 진화는 ‘진보’를 말하지 않으며, 또한 ‘단선 진화’를 뜻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강조한 것은 복합적인 사회 진화의 양상, 특히 물적 조건에 기반을 둔 사회 분석의 차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다수가 대학에 가는 것이 가능해진 경제적 조건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차이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집안에 한 대의 텔레비전만 있는 경제 수준에서는 온 가족 성원들이 한데 모여서 드라마를 보게 되고, 그때 그들은 스토리를 중시하는 영상읽기를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면 각자 텔레비전을 갖게 된 상황에서 개별화된 관객은 스토리나 계몽주의적 메시지가 아니라 패션과 풍경과 음악 등 디테일을 ‘소비’하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내가 ‘시차’라는 개념으로 강조하려고 한 것은 바로 경제적 조건을 충분히 고려한 이러한 경제, 정치, 문화 간의 상동성을 중시하자는 뜻이었지요.
(중략)
내가 ‘시차’라는 개념 아래 부각시키려 한 것은 ‘동시대성’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한 ‘비동시성의 동시성’입니다. 이제는 ‘동시성’과 함께 ‘비동시성’이 강조되어야 할 때인데, 그때 우리는 국가 간의 비동시성만이 아니라 국가 내에 존재하는 비동시성을 주목해야 할 것이고, 세계화된 세상에 일고 있는 다종다기한 ‘비동시성의 동시성’에 주목을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 조한혜정의 네 번째 편지-171~173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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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3-06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에노 치즈코의 네 번째 편지 좋군요.
저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 좋아하지 않습니다.^^

숨은아이 2006-03-06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에노 치즈코가 말한 "동시대의 양면"이란 말에서 새삼 깨달았어요. 그러나 조한혜정 선생이 말한 "다수가 대학에 가는 것이 가능해진 경제적 조건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차이"에도 공감합니다. 우에노 치즈코의 말은, 후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소득 수준이 전혀 높아질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이른바 선진국과 다른 나라들 사이의 소득 격차는 계속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