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시티
에릭 라슨 지음, 양은모 옮김 / 은행나무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은행나무에서 출간한 <화이트 시티>를 이제 막 다 읽었습니다. 1893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콜럼비아 세계박람회를 무대로 하여, 그 양지과 음지를 재현한 논픽션입니다. 양지의 주인공은 콜럼비아 세계박람회의 건축감독이었던 대니얼 H. 번햄, 음지의 주인공은 미국의 첫 연쇄살인범이라는 H. H. 홈즈입니다.

대전엑스포니 이천도자기엑스포니 해서 우리나라에도 꽤 많은 박람회가 열리지만, 그런 곳에 굳이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한 번도 가본 적 없습니다. 박람회라는 데서 뭘 보고 얻을 수 있는지 모르거든요. 이 책을 읽고 한 가지는 배웠습니다.

1889년 파리 박람회에서 미국 사람들은, 자기네 조국이 건축 예술 문화 영향력 면에서 유럽에 뒤처졌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래서 어떤 열등감이랄까, 파리의 에펠탑을 능가하는 것을 내놓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힙니다. 이런 열등감에 따른 추진력은, 박람회 개최지를 결정하는 미국 도시들 간의 경쟁에서도 그대로 재현됩니다. 내륙의 미시간 호숫가에 있는 시카고는 당시 미국 산업을 이끄는 도시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부 해안 지역, 특히 뉴욕에 비해 문화적으로는 이류, 싸구려라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카고 사람들은 이번 기회에 뉴욕을 반드시 이기길 열망합니다.

박람회는 그 동기가 동물원과 그리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동물원은 세계 곳곳의 자연 생태계에서 동물들을 수집하여, 그 동물들이 살기에 적당하지 않은 곳에 가두고, 그들을 구경거리로 만듭니다. 그런 일을 하려면 경제력과 군사력이 필요하지요. 대규모 동물원은 그런 경제력과 군사력이 있음을 과시하는 전시장이 됩니다. 파리와 콜럼비아 박람회에서 구경거리가 된 것은 인위적인 조경을 배경으로 한 온갖 첨단 산업의 성과들, 그리고 아프리카의 피그미족이나 알제리인, 아메리카 원주민들이었습니다.

박람회 성공을 방해하는 것은 ‘반미국적’ ‘비애국적’인 것으로 비난받습니다. 당시는 미국의 노동운동이 한창 성장하던 무렵이지요.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 8시간 노동과 최저임금 확보, 전 세계 노동자의 연대를 주장한 노조는 이런 비난을 받습니다.

“비미국적 기관인 무역노조는 세계 박람회를 무력하게 만들기 위해 개인의 자유를 단축하거나 파기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비미국적 원칙을 개발했다. 덜 문명화되고 더 전제적인 국가에서는 이런 행동을 반역적이라고 부른다.”-시카고의 잡지 [더 인랜드 아키텍트The Inland Architect], 본문 150쪽. 

허허... 88올림픽이 생각납니다. 노점상을 때려잡으며, 외국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제 나라 사람들을 몰아내던 정부에게 항의, 올림픽 반대운동을 벌이던 이들을 무엇이라고 했는지요. 누구를 위한 애국이고 민족인지.

그러나 지은이는 이 책을 그러한 비판적인 관점으로 쓰진 않았습니다. 1890년 박람회 개최지가 시카고로 결정되던 때부터 1892년 10월 12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지 400년이 된 걸 기념하는 날 준공식을 하고, 1893년 5월 1일 박람회를 정식 개장하고, 그해 10월 30일 폐장하기까지, 박람회의 주역들이 한 일과 그들을 둘러싼 당시 미국의 사회 상황과, 박람회의 그늘에서 은밀히 일어났던 연쇄 살인 사건을 극적으로 재현하려 했을 뿐입니다. 그러한 지은이의 태도가 제겐 그리 편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책 말미에 연쇄살인범의 끔찍한 범죄가 백일하에 드러난 과정을 읽으면서는 참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제가 양지와 음지의 주인공들을 다 이해하지 못한 탓이겠지요.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자면, 미국 전체를 들뜨게 한 거대한 업적도, 끔찍한 연쇄살인도 모두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욕망에서 나왔다는 것.

극적인 효과를 노린 서술 방식이 좋을 때도 있고 불필요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마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듯 상상할 수 있다는 점에선 좋았어요. 그런데 이를테면 본문 48쪽 아랫부분에 살인 사건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모임인 화이트채플 클럽 이야기가 나옵니다. 문단 시작이 이렇습니다.

“한 소년이 과일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어두운 골목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가 지나온 거리의 가스등에서 나는 소리가 희미하게 멀어질 뿐 주위는 조용했다. 그는 문을 하나 발견하고 노크한 다음 남자들이 가득 찬 방으로 들어갔다.”

이 방이 화이트채플 클럽의 모임 장소인데, 여기서 등장하는 “소년”은 실존 인물인지 아닌지 알 수 없고 이후에는 나오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부분은 화이트채플 클럽의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한 설정인데, 영화에서라면 인상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책에서 읽자니 불필요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원제 The Devil In The White City. 에릭 라슨Erik Larson 지음. 2003년 발표.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2004년 10월 출간. 11월 5일자 초판 2쇄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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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12-12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이 책 다 읽었는데! ^ㅂ^

시카고 박람회 사진자료 좀 봤으면 좋겠더라구요. 컬러로. ^^

숨은아이 2004-12-12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은 저도 판다님께서 주문하실 책 목록 올려논 걸 보고 찜했던 것이어요. ^^ 시대가 시대니 만큼 컬러로 보긴 어렵겠지만, the world's columbian expositon으로 검색해 보면 미국 사이트 중에 당시 자료 사진 올려논 데가 나오더군요. http://users.vnet.net/schulman/Columbian/columbian.html도 그 중 하나.

panda78 2004-12-13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가 봐야겠네요.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