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웅진 완역 세계명작 10
케네스 그레이엄 지음, 아서 래컴 그림, 공경희 옮김 / 웅진주니어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2. 서로 다른 번역

번역가가 다르면 상황 해석도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대체로 읽는이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장면은 비슷해야 하지 않나요. 그런데 영 다른 장면이 몇 군데 나오더라구요. 예를 들면...

1) 처음 두꺼비가 봄을 맞아 집을 나설 때, 강짜를 부리는 토끼를 골려주는 장면

늙수그레한 토끼 한 마리가 산울타리 틈에 대고 소리쳤다.“서라! 내 땅을 지나가려면 6펜스를 내!”
모울은 당장 달려가 밉살스럽고 건방진 그 토끼를 한 대 쥐어박았다. 그러고는 산울타리를 따라 종종걸음을 치면서 웬 소동인가 하고 서둘러 굴 밖으로 고개를 내민 다른 토끼들을 놀려 주었다.
“깨소금 맛이다, 깨소금 맛이야!”
(시공주니어)

“거기 서! 남의 길을 지나가려면 육 펜스를 내야지!”
늙은 토끼였다. 두더지가 산울타리를 끼고 쿵쾅쿵쾅 걷자, 토끼들은 무슨 난리인가 싶어서 굴에서 내다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예의 없이 촐랑대는 두더지 때문에 늙은 토끼는 고꾸라졌다.
“약 오르지! 약 오르지!”
(웅진)

영어 원문도 비교해서 보시죠. (두 책의 번역이 왜 이리 다를까, 어느 쪽이 올바른 번역일까, 궁금증에 부르르 떨다 영어책을 샀어요.) 영어책은 1989년 Aladdin Paperbacks 판입니다. 판권 사항을 보니 처음 이 책에 대한 저작권이 생긴 것(이 책을 발표한 것)은 1908년. 그리고 1933년과 1953년에 다시 책이 나왔나 봐요.(케네스 그레이엄이 사망한 것은 1939년. 혹시 1933년에 개작을 했나?) 이 책에는 어니스트 H. 쉐퍼드의 그림이 흑백으로 실렸습니다(흑백 그림도 아주 귀엽습니다).

‘Hold up!' said an elderly rabbit at the gap. 'Sixpence for the privilege of passing by the private road!' He was bowled over in an instant by the impatient and contemptuous Mole, who trotted along the side of the hedge chaffing the other rabbits as they peeped hurriedly from their holes to see what the row was about. 'Onion-sauce! Onion-sauce!'

그러니깐 늙은 토끼가 울타리 사이로 시비를 걸었는데, 두더지가 쿵쾅거리며 울타리가 마구 흔들리도록 걷는 바람에 토끼가 발라당 넘어진 상황인 것 같습니다. 웅진 쪽 번역이 자구에 좀더 충실한 것 같군요. 하지만 Onion-sauce는 그냥 “약 오르지!”보다 “깨소금 맛이다!” 정도로 하는 게 더 원문의 느낌에 가까운 듯해요. 그리고 웅진의 번역으로는 토끼가 산울타리 틈(gap)으로 말을 걸었다는 걸 알 수 없어요.
 

2) 두더지가 숲에서 길을 잃었을 때, 물쥐가 구하러 와서는 내리는 눈을 보고 하는 말

“눈이 생겼어. 아니, 눈은 내리는 거지. 펑펑 쏟아지고 있어.” (시공주니어)

“눈이 떠돌아다녀. 아니 내려. 펑펑 내리고 있어.” (웅진)

원문 : 'Snow is up,' replied the Rat briefly; 'or rather, down. It's snowing hard.'

흠... 여기선 시공주니어 쪽이 조금 낫지만, 글쎄요. 차라리 “눈이 나오네. 아니, 눈은 내리는 거지. 눈이 펑펑 쏟아져”라고 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요?


3) 두더지가 눈밭에서 다치자, 물쥐가 발판을 찾는 장면

하지만 래트는 손수건으로 상처를 찬찬히 싸매 주고 나서 그 자리를 떠나 눈밭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네 발을 부지런히 놀리며 눈을 긁어 대기도 하고 파헤치기도 하면서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시공주니어)

물쥐는 두더지의 다리를 손수건으로 잘 묶은 다음, 저쪽으로 가서 부지런히 눈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앞발로 긁다가, 마침내 네 발을 다 써서 땅을 파냈다. (웅진)

여기서 전 시공주니어의 번역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요. 두더지가 발판에 걸려 다리를 다쳤다면, 발판은 두더지가 다친 장소에 있을 테고, 발판을 찾으려면 바로 그곳의 눈만 치우면 되지 왜 눈밭을 “샅샅이” 뒤졌을까요.

But the Rat, after carefully tying up the leg with his handkerchief, had left him and was busy scraping in the snow. He scratched and shovelled and explored, all four legs working busily, (후략).

눈밭을 “훑었다” 정도로 하면 되는데 “샅샅이 뒤졌다”고 한 건 좀 과한 꾸밈이었던 듯합니다. 하지만 시공주니어 쪽이 좀더 말맛을 살리려고 노력했네요.


4) 두더지와 물쥐가 눈밭을 헤매다 오소리 아저씨의 집에 찾아들었을 때

다시 천천히 대화가 시작되긴 했으나, 입에 음식을 가득 물고 해야 하는 대화는 오히려 후회스럽기만 했다. (시공주니어)

슬슬 대화가 시작됐을 때에도 입에 음식이 가득 들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웅진)

원문 : and when it was slowly resumed, it was that regrettable sort of conversation that results from talking with your mouth full.

웅진 것은 의역을 했고, 시공주니어 것은 regrettable이란 단어를 곧이곧대로 “후회스럽기만 했다”고 한 모양인데, 말이 이상하죠? 그냥 “입에 먹을 것을 가득 물고 하는 대화는 안 하느니만 못했다”고 하면 되었을 것 같습니다.

- 4편으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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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9-21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웅진 것이 의역이든 뭐든 매끄럽게 읽히네요.^^
참 부지런하십니다.

숨은아이 2004-09-21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가지 다 장단점이 있더라구요. 제가 궁금증은 잘 못 참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