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은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 이 책을 쓴 루이스 세풀베다에 대해 글을 쓰고 싶은데, 요새 이 사람 책을 안 읽어서 가물가물합니다. 그래도 늘 기억하고 싶어, 예전에 어느 모임에 올렸던 글을 옮겨옵니다. 이 사람이 쓴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 <외면>은 사놓고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 시아에서 나왔던 <세상 끝으로의 항해>는 열린책들에서 <지구 끝의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2003년에 다시 나왔는데,  두 책의 첫머리 번역이 판이해, 다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루이스 세풀베다Luis Sepulveda에 대해서는
제가 술자리에서 한두 번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이 작가 좋아한다고 이곳에서 한 마디 하고 싶어서
집에서 사무실로 책을 가져다 놓은 게 벌써 몇 달인데,
오늘 지겨운 교정을 끝마치고 짬이 난 김에
모니터 옆에 쌓여 있는 세풀베다의 책들을 보고는
그렇잖아도 지저분한 내 자리 오늘 좀 치워 보자 하고(^^;)
이렇게 글을 씁니다.

그런데 몇 달 전엔 이 작가에 대해 뭔가 써 보자는
열정이 있었는데 역시 무슨 일이든 마음 먹었을 때 해야지
지금 뭐라도 하려니 반짝하니 떠오르는 말도 없고
쑥스럽군요. 허허...

편집인 선후배 여러분께 특별히 영양가 있는 글이 되진 않겠고,
그냥 저 혼자 게시판을 즐기는 의미에서 적습니다.

제가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Un viejo que leia novelas de amor]
이란 책을 알게 된 건 1996년이군요.
천리안의 한 얌전한 동호회(얌전하다는 건 전혀 활발하지
못하다는 이야깁니다. ^^;)에 누군가 이 책을 읽어 보라고
추천하는 글을 짤막하게 올렸습니다.

제목이 마음에 든 저는 이 책을 사러 장백(고대 정대 후문의
장백은 드디어 완전히 망하게 된 모양입니다. 올해 다시 조합운동을
추진했는데, 학생인 후배들의 몸부림은 그저 몸부림으로 남고...)
에 갔습니다. 책꽂이 한 구석에 간신히 한 권 꽂혀 있더군요.

세풀베다가 1989년에 쓰고 예하에서 1993년에 낸 그 책은
제가 그 후에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려고
교보에서 한번 더 샀을 때도 초판이었습니다.
제가 제목만으로 생각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내용이었지요.

남아메리카와 아마존의 슬픈 생명력이 넘치는 책,
보잘것없으되 오만하고 포악한 인간에 대한 회의를
아주 인상 깊게 가르쳐 준 책입니다.
소설에서 '노인'은 연애소설(우리가 흔히 로맨스소설이라고 하는
겁니다)을 읽는 게 유일한 낙인데, 그건 그 소설들이
"때때로 인간들의 야만성을 잊게 해줄 정도의 아름다운 말로
사랑을 이야기"하기 때문이지요.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을 읽고 세풀베다에 반해서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이 혹 번역되어 나온 게 없을까
찾다가 시아출판에서 95년에
[세상 끝으로의 항해]가 나온 것을 찾았어요.
원제 Mundo del fin del Mundo를 직역하자면
'세상 끝의 세상', '지구 끝의 세계'쯤 된다는군요.
역시 1989년 작품입니다.

칠레라는 나라, 솔직히 초등학교 시절 "세계에서 권투를 제일 잘하는 나라"
"칠레" 따위 우스갯소리로만 알았던 나라, 이 나라에서 남미 혁명운동에
참여했고, 그 덕분에 망명한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는
그 긴 나라 남쪽에 남극 바다가 있다는 걸 가르쳐 주었어요. 

번역과 책 장정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힘 있는 소설을 쓰는 세풀베다의 면모를 한편으로
잘 보여주어 기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마 절판되었을 겁니다.
작가 이름은 '세뿔베다'로 표기했더군요.

그리고 작년에 바다출판사에서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1996)가 나왔습니다.
환경동화, 혹은 철학동화로 소개되었는데...
'행동하는 지성'이라는 그다운 동화이지만
사실 좀 손을 편하게 놀린 작품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 책도 작가 이름을 '세뿔베다'로 표기했습니다.

저는 세풀베다의 책이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는데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는 것이
안타깝던 차라, 바다는 장사를 잘하는 출판사로 알고 있기에
이 [갈매기...]는 어떻게 좀 널리 알려질까 싶었는데
그렇게 크게 성공한 것 같진 않아요.

그리고 올해 열린책들에서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
[귀향] [감상적 킬러의 고백]이 한꺼번에 나오더군요.
아, 이제야 세풀베다의 책이 한국에서 제대로 출판사를 찾았는가...
뭐, 열린책들에서 국내에서 최초로 소개되는 작가라고
잘못 알리는 바람에(열린책들의 담당자가 일부러 그랬을지는 모르겠어요.
정말 그 사람 본인도 몰랐던 건 아닐까?
하지만 예하에서도 시아출판, 바다에서도 모두 정식 계약해 출간했던 건데)
또 국내 유수한 일간지 출판 담당 기자들이
열린책들의 말 그대로 기사를 써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지만,
전 사실 그 논란을 보면서
세풀베다를 아는 사람이 이렇게 많이 있었구나 싶어
오히려 반가웠답니다.

열린책들의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은 사 보지 않아서
예하의 책과 번역을 비교해 보진 못했어요.

1994년 작품 [귀향]은 원제가 '투우사의 이름Nombre de Torero'라는군요.
책 읽는 과정은 좋았지만 남미 혁명사에 제가 얼마나 무식한가
실감했어요. 그렇다고 혁명사를 알아야 읽을 수 있는
소설은 아닙니다. 오히려 독일과 칠레의 오늘을,
마치 고슴도치가 새끼를 안듯 아프게 포용하는 소설입니다.

무엇보다 한 사람에게 자기 자신의 순수를 걸고
집착하면서도 정작 그 사람 옆에 있지는 않으려고 도피하던
인간의 약함이... 그리고 그 약함을 극복해 보려고
한 걸음 내딛는 가냘픈 용기가... 
아, 이 사람은 인생을 알겠지요.

[감상적 킬러의 고백]은 좀 낯설었어요.
(원제는 '감상적인 킬러의 일기'라네요. 1996년 작품.)
'흑색소설'이란 게... 뭔진 잘 몰라도 암튼 그 어법을 채택했다나
뭐라나... 이 책에선 이 표제작보다 뒤에 실린 [악어](1997)가
제겐 더 좋았어요. 원제는 '야카레'라고...본문에 나오는 악어 종류의 이름이에요.

'당신 역시 부르주아를 죽도록 증오하는 또 하나의 부르주아일 뿐'이라는 콘트레라스의 말.
모처럼 아프게 찔러 주는 글귀였습니다.

여기까지예요. 그런데 역시 첫정이 무서운지,
세풀베다의 작품으로는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이 최고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네요.

하나 빼먹었는데, [귀향]의 말미 부분에 기막힌 글귀가 하나 있네요.

"우리는 삶 앞에서 왜 죽음의 황금빛 섬광만 바라보았는지."

귀향의 주인공, 후안 벨몬테가 새로이 출발하는,
아니 도리어 자기 본연의 사랑에게 돌아가는 발걸음에 담은 생각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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