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유사신화
J.F.비얼레인 지음 / 세종(세종서적) / 199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J. F. 비얼레인Bierlein 지음, 현준만 옮김, 1996, 8500원
원서 제목은 Parallel Myths.

전 이 책을 1996년에 샀는데, 지금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2000년 10월에 펴낸 새 판의 값은 1만 3000원이네요.

전부터 신화와 성서고고학 쪽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성서를 '진실'로 믿고 읽었지요.
그런데 읽으면서도, 특히 창세기에서,
서로 앞뒤가 다른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곤 했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
<사람이 없었다 신도 없었다>(안성림 조철수 지음, 서운관, 1995)란 책을 읽고,
오늘날의 창세기는 두 가지 판본이 결합되어 만들어졌다는 걸 알았어요.
두 가지 서로 다른 판본을 짜깁기해 놓았으니, 앞뒤가 다를 수밖에요.
그 책에서는 성서의 많은 내용이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신화에서 영향을 받았다고도 했어요.
이리하여 신화란 무엇인지, 어떻게 생성 발전했는지,
성서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책인지 궁금증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관련된 책이 눈에 띄면 사 모았는데,
늘 그렇듯이 사서 쌓아만 놓고 읽지는 못했습니다. ^^;

그러다 처음 집어든 책이 바로 이 책, <세계의 유사 신화>입니다.
신화의 세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좀더 깊이 있는 책에 다가가기 전에,
처음 읽는 책으로 괜찮을 성싶습니다.

세계 곳곳의 신화 가운데
창조 신화, 인간의 초기 시대를 이야기하는 신화, 홍수 신화,
사랑 이야기, 신화에 나오는 도덕 이야기, 영웅 신화,
저승 세계에 다녀온 이야기, 종말 신화를 한데 모아 보여 주는데,
어린 시절부터 익히 알아 온 그리스 로마 신화뿐 아니라
인도 신화, 메소포타미아 신화, 노르웨이와 독일에 전해지는 북유럽의 신화,
이집트와 중국의 신화,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신화까지
실었습니다.

특히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신화는
쉽게 알기 어려운 이야기라
정말 반가웠습니다.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신화 중에, '포니'라는 부족의 창조 신화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저녁별과 새벽별의 사랑 이야기예요.
'피마' 부족의 창조 신화는 놀랍습니다.
태초에 세상에는 어둠과 물뿐이었는데, 창조주가 하릴없이
물 위를 떠돌아다니다 마법의 지팡이 끝에 맺힌 나뭇진을 떼어
공 모양으로 둥글렸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 작은 공을
굴리고 또 굴리어 지구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이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남부 캘리포니아의 '플라야노스(Playanos)'라는 부족도
눈에 보이지 않는 전능한 존재 노쿠마가 두 손으로 세상을 굴려
공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중심을 잡지
못하자 토사우트라는 검은 바위를 세상 속에 끼워 넣어
중심을 잡도록 했다는 거예요!
오늘날 지질학에서 지구의 중심에 '핵'이 있다고 말하는 걸 보세요.

인도의 고대 경전인 <리그베다>에서는
"태초에는 어둠이 어둠을 감추었으니,
이 모든 것이 아무런 표징도 없는 물이었도다.
공허로 싸여 있던 생명체,
그 유일자가 열의 힘을 통해 태어났도다."고 합니다.
중국 신화에서도 태초에는 혼돈의 물뿐이었는데,
번개의 힘을 받아
첫 생명이 태어났다고 한답니다.
오늘날의 물리학에서 하는 이야기와 비슷하지요.

창세 신화들을 보다 보면,
신화에는 인류가 현생 인류로 진화하기 전의 기억까지
담겨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폴리네시아의 창조 신화는 음양 이론과 비슷합니다.
우주의 원리는 아오와 포라는 두 가지 본성을 띠는데,
아오는 밝음, 낮, 하늘, 남성적 원리를 뜻하고
포는 어둠, 밤, 땅, 여성적 원리를 뜻한다고 해요.
창조의 시작은 바로 아오와 포를 구별하는 작업이었다고 합니다.
성서에서도 하느님이 맨 처음 "빛이 있으라" 하여, 밤과 낮을 가르지요.
해가 지면 컴컴한 밤이 되고, 다시 다음날 날이 밝는 건
초기 인류에게 매우 놀라운 일이었던 모양이에요.
아니, 그게 바로 우주 질서의 기본이었겠죠.
그 사실을 아는 것이 바로 세계를 인식하는 첫걸음이었겠죠.
그런데 폴리네시아의 아오와 포 이야기에서 특이한 점은,
죽음과 사후의 지하 세계를
꿈과 사랑의 장소, 어머니의 땅으로 표현한 점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게 마련 아닌가요?
우리도 죽으면 저승사자에게 끌려 염라대왕 앞으로 간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폴리네시아의 아오와 포 이야기에서는,
인간이 땅 위의 아오 세계를 벗어날 수 없는 건 첫 남자인 카네의 죄 때문이고,
죽은 뒤에야 어머니 땅 '히나'와 살러 갈 수 있다고 합니다.
포 세계는 밤이라는 창조의 세계로, 꿈과 사랑의 장소로 살아 있다고 하구요.

북유럽 신화를 읽으니,
<반지의 제왕>은 바로 북유럽 신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더군요.
<반지의 제왕>에서 등장 인물들이 사는 곳을 '중간계'라고 하잖아요.
노르웨이와 독일에 전해지는 북유럽 신화에서
신 오딘이 인류에게 만들어 준 세계가 바로 미드가르드(Midgard=Middle Earth)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딘은 신들의 거처인 아스가르드(Asgard)도 만들었다고 해요.

잉카 신화에서는,
창조주 콘 티키가 인간을 만들고 지상을 좋은 것들로 가득 채워 주었는데,
인간들이 은혜를 잊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래서 콘 티키는 인간에게 벌을 내려 고된 노동을 하게 했답니다.
이때 새로운 신 파차차마크가 나타나서 콘을 몰아내고
콘이 만든 인간들을 모두 원숭이로 만들어 버린 다음,
흙을 가져다 새로운 인간들의 조상을 만들었대요.
혹시 새로운 인간들이 바로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이고,
콘이 만들었다는 인류는 그 전에 멸종한 호모 에렉투스나 뭐...
그런 것 아닐까요?
(이 글을 쓰고 나서 한참 뒤, 곧 작년에 한국 신화 강좌를 들었는데,
아시아 여러 민족의 창세 신화 중에서,
처음 세상을 만든 신이 뒷전으로 물러나고 새로운 신이 등장해
오늘날의 세계를 주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매우 많다더군요.
우리나라의 창세 신화도 그래요.)

아메리카 원주민 중
모하베 아파치 부족에 전해진다는 홍수 신화에서는
처녀 한 명만이 카누를 타고 홍수에서 살아남는데,
이 처녀가 산으로 올라가자
태양이 처녀를 비춰, 바위에서 처녀의 몸으로 뚝뚝 떨어지는 물을
따뜻하게 데워 주었다고 합니다. 이 마법의 물이 처녀를 잉태하게 했고,
처녀는 나중에 딸을 낳았으며, 그 딸은 어머니와 똑같은 방법으로
임신해 마침내 인류가 다시 번성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햇빛을 쬐어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물이 중요한 구실을 했다,
자, 우리의 부여 동명 신화, 고구려 주몽 신화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 책엔 일본의 창세 신화(매우 괴기스럽고 에로틱하답니다.
일본의 에로 영화와 괴기 영화가 오늘날까지 강세인 이유를 알 듯.)
는 나오지만 우리나라의 신화는 나오지 않아요.
그래서 아메리카 인디언 중 알공킨 부족에게 전해진다는,
알곤이라는 사냥꾼과 하늘처녀 이야기가
우리의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와 비슷하다는 점을,
이 책의 지은이는 모를 겁니다.
(역시 한국 신화 강좌를 듣고 알았는데,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는
중앙아시아부터 일본에까지 폭넓게 전해지는 백조처녀 이야기의 변형판이에요.
그 이야기가 인디언 신화 중에도 있는 거지요.)
 
어떤 이론이나 주장을 펼치는 책이 아니고,
신화에 관해 다양한 책을 읽어 온 지은이의 독서 공책을 주제별로
정리해 놓은 것 같은 책이에요.

책 뒷부분에는 여러 신화학자들이 신화의 의미를 어떻게 보는지,
비슷한 신화가 세계 여러 곳에서 전해지는 까닭을 어떻게들 해석하는지
인용해 놓았지요. 인용문만으로는 신화학자들의 주장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신화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누구누구가 유명하며,
학계의 쟁점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어 유익합니다. 

잘 읽다가 마지막 장에서는 좀 깼는데,
마지막 장은 지은이가 기독교 세계의 자기네 독자들에게
'신화'는 사탄의 도구가 아니고
기독교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이야기들이라고 호소하는 내용이지요.
헉, 이 장 바로 앞까지도, 이 사람이 보수적인 기독교인인 줄 전혀 몰랐거든요.

이 책의 단점은,
여러 나라와 민족의 신화를 골고루 맛뵈어 주다 보니,
모든 신화가 간략히 정리돼 있어,
원래 이야기의 세세한 부분은 알 수 없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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