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 '인도'라는 이름의 거울
이옥순 지음 / 푸른역사 / 2002년 12월
평점 :
품절


"'인도'라는 이름의 거울"이란 부제가 달려 있습니다.
외국 여행을 꿈꿀 때, 그것도 한 달 이상 흘러다니는 생활을 하고 싶을 때, 90년대 초반에는 유럽 여행이 그 꿈의 대상이었고, 그 후반에는 인도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유행처럼 그렇게 되었습니다.

유럽 여행을 꿈꿀 때는 그리스 로마의 찬란한 고대 문명과 함께 세계의 명화들이 가득한 미술관과 박물관을 떠올리겠지요. 그리고 숙박 시설이 청결하고 안락하리란 것을 의심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인도를 생각하면? 고대 문명의 찬란한 유적을 기대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뭔가 신비로운 정신적인 상태를 기대하고, 도시 문명에 지친 심신을 위로받은 끝에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가난한 성자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겠지요.

인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서양인들이 동양에 대해 가지는 환상, 바로 그것이라고 이 책은 말합니다.

우리와 같이 생동하는 사람이 사는 곳, 남루한 생존에 허덕이고, 그러나 수천년 외부 세계와 교통하면서 변화 발전해 온 곳이란 생각은 하지 못한다고,

여행이란 낯선 곳을 만나고 받아들이는 것인데, 19세기 초 그곳을 여행한 서양의 제국주의자들이나 20세기 말 21세기 초 그곳을 여행하는 한국 사람들이나 인도의 과거만을 찾고 자기 속에서 만들어진 환상만을 찾다가 실망해서 그곳을 떠나온다고 합니다. 게다가 열대의 기후는 비교적 북방에 있는 한국에서 살던
사람들에게 거의 더위지옥이겠지요. 비교적 북방에 있는 영국의 사람들에게 그러했듯이.

우리(내)가 인도(그리고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를 인식하는 방식은 바로 서양제국주의가 인도, 아시아를 바라보는 태도, 그것이다, 서양제국주의의 박제 오리엔탈리즘을 복제한 오리엔탈리즘이다, 하고 이 책은 지적합니다.

박제 오리엔탈리즘과 복제 오리엔탈리즘은 모두 인도에게 두 가지 덫을 씌우는데, 하나는 "인도는 미개한 야만의 땅, 우리보다 후진적인 곳"이란 것이고(그래서 교화의 대상이란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나 "인도는 신비로운 정신의 땅, 따라서 선진적인 우리를 모방하고 기술적으로 개발된 인도(서양화한 인도)는 진짜 인도가 아니"라는 것(그래서 서구식 교육을 받고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인 이들은 진짜 인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많이 찔렸고, 그러니 읽는 이에게 어떤 자극을 준다는 점에서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미주까지 합해 231쪽밖에 안 되는 이 책의 문장이란 게 거의 인용문의 동어 반복이라니.
비판을 위해 영국 소설과 우리 작가들의 소설, 기행문, 신문 보도를 인용한 것은 원래 이 책의 서술 방식이지만, 그 외에 지은이의 논리를 전개하는 문장도 거의 선학들의 책에서 따온 것이라고 일일이 미주를 달아놓았습니다. 남의 생각을 슬쩍 갖다 쓰면서 자기 것인 양 시치미 떼는 것보다야 이렇게 인용 출처를 일일이 밝히는 것이 훨씬 훌륭한 태도이지만, 지은이는 이렇게 인용에 인용을 거듭하고, 게다가 앞에서 한 말 뒤에서 또 하는 식으로밖에 글을 쓸 수 없단 말인가?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는 생각까지 드는 부분도 있습니다. 이국 땅에 가면, 예를 들어 한국 사람이 일본에 가든 미국에 가든 인도에 가든, 일단 낯선 땅에 간 사람은 낯선 환경에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그 반응은 일단, 그곳 사람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주관적인 반응일 겝니다. 물론 책이나 신문 기사를 발표하는 데는 사회적인 책임이 따릅니다. 갑남을녀가 무책임하게 소견을 던지는 것과는 달라야 합니다. 공공연한 영향을, 그것도 크게 미칠 수 있는 글에다가 겉핥기 여행 끝에 얻은 자기주관만을 나열하는 건 정말 무책임한 일이지요. 그래서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엄격하게 자신을 성찰해야겠지요.
하지만 작가나 기자 역시 처음 경험하는 것에는 서투르고, 그 경험을 거듭하면서 변화 발전할 겁니다. 그런데 그 첫 반응을 일일이 문제 삼고, 더욱이 이 책에서는 대안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문제 제기 수준인 책이니까 그 정도에서 의의를 둔다고도 할 수 있겠죠. 이후에 지은이의 대안적인 글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끝으로 한 가지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3장 "상상의 '동양'을 넘어서" 부분 211쪽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물론, 서양이 날조한 '사이비 동양'이나 영국이 조작한 '사이비 인도'를 모두 '사실'로 교정할 순 없을 것이다. 주술사가 악마를 쫓아내듯이 우리 안에서 서양을 완전히 쫓아내기란 불가능하다. 난디의 판단대로 '서양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우리 자아의 일부를 부정하는' 것이고, 아마드의 표현을 돌려서 말하면, 그것은 일제시대에 건설되었다고 철도의 이용을 거부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데 저는, "서양이 날조한 '사이비 동양'이나 영국이 조작한 '사이비 인도'를 모두 '사실'로 교정할 순 없을 것이다"란 말이 어떻게 "일제시대에 건설되었다고 철도의 이용을 거부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로 연결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허상을 벗겨내려는 노력이 어떻게 일제가 지은 철도를 타지 않겠다는 아집과 같지요? 원래 의도는, "서양적인 것 역시 우리(인도)가 지금까지 오면서 받아들이고 융화해낸, 인도의 일부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문장의 전개가 이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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