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를 수 있는 권리 - 개정판
폴 라파르그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1998. 11. 8

우리 시대의 문화 : 호모심볼리쿰 18
<게으를 수 있는 권리 Le droit a la paresse>
                              - -> 위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삐침 있음
폴 라파르그(Poul Lafarge) 지음, 조형준 옮김, 새물결(1997)



그냥 폴 라파르그라고 하면 누군데?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사
람도 카를 마르크스의 사위라고 하면 마치 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
덕일 것이다. 그 폴 라파르그가 1880년 [평등 L'Egalit]이란 사회주의
성향의 잡지에 이 글을 썼고, 이 글은 1883년 그가 옥중에 있을 때
소책자로 출판됐다.

새물결 출판사에서는 미국어판을 그대로 번역한 듯 영어판 서문을 앞
에 싣고 뒤에는 프레드 톰슨이란 사람이 쓴 "폴 라파르그, 일과 여가
; 전기적 에세이"를 묶어 182쪽짜리 책으로 만들었다("게으를 수 있는
권리"란 글 자체의 길이는 80쪽 정도다). 그리고 영 팔리지 않을 것
같았는지 보통 단행본보다 두꺼운 종이에 인쇄하고 양장본으로 만들
어 7500원이란 값을 떡 매겨 버렸다.

못마땅한 일이지만 몇 년 전 한겨레신문에서 이 책에 관한 글을 읽고
언제 우리 말 번역판이 나오나 고대하던 나 같은 소수 독자나 사 줄
책인 모양이니 별수 있으랴.

"게으를 수 있는 권리"란 글 자체는 논쟁적인 정치 팜플렛인지라 학술
논리로 글을 이끌기보다는 일 중독증을 찬양하는 이데올로기를 인정사
정 없이 공격하는 말투로 시종일관한다. 그러니 가끔 고대 노예제 사
회의 시민을 찬양한다든가 이성애 남성 중심적인 표현을 쓰는 건 너그
럽게 건너뛸 필요가 있다.(마음에 안 드는 건 사실이다. ^^;)

사실 노동은 사람이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것이다. 지나친 노동은
인간의 몸을 약하게, 또는 다치게 하고 자연 환경을 파괴하며 인간의
정신을 일정한 틀에 얽어매 버린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기보다 일 그 자체에 종속되어 버린 듯하다.
자기가 하는 일이 자기 삶과 정신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지금 일하지 않으면 바로 죽어 버릴 듯이 일 그 자체에 매
달렸다. 몇 년 전에 한창 유행한 "프로는 아름답다"는 글귀를 보라.

폴 라파르그는 과연 누가 누구에게 일하라고 말하는지 폭로한다.
"기독교적인 순종을 내세운 영국 국교회의 성직자인 타운센드 목사는
다음과 같이 읊조린다. '일하라, 일하라, 밤낮으로 일하라. 일하면 더
가난해지고 가난해지면 법의 힘으로 일을 강요해야 하는 부담을 덜어
주리라.' 법의 힘을 빌린 노동의 강요는 '너무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너무 많은 폭력을 요구하고, 너무 많은 소음을 만들어 낸다. 이와 반
대로 굶주림은 평화롭고 조용하고 끊임없는 압력일 뿐만 아니라, 일과
산업의 가장 자연스러운 동기이고, 또한 가장 강력한 노력을 불러일으
키기도 한다."(59-60쪽)

곧 "장사를 선교하려는 자들the missionaries of trade과 종교를 팔아
먹으려는 자들the traders of religion이 기독교 신앙과 매독 그리고
노동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등, 온갖 것으로도 아직 타락시키지 못한
고결한 미개인을 보라. 그리고 나서 비참하게 기계의 노예가 되어 버
린 현대인을 보라."(45쪽)

현대의 과잉 노동에 따른 과잉 생산은 산업의 위기를 부르고, 생산물
을 다 팔 수 없는 기업은 일자리를 줄이고, 따라서 돈을 벌 수 없게
된 사람들은 배고파서 오직 일자리 찾기에만 매달리게 되고("우리에
게 일자리를 달라" "우리는 일할 권리가 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소리 아닌가), 그나마 직장에서 떨려 나지 않은 사람들은 짤리지 않
기 위해 더욱 일에 파묻힌다. 더 낮은 임금과 더 많은 노동 시간을
감수하고.

"낮이 끝나면 반드시 밤이 오듯이 지나친 노동 뒤에는 공황이 오는 것
을 피할 수 없고 이에 따라 집단 해고와 가난이 끝없이 이어진다면,
산업 또한 어쩔 수 없이 파산하게 될 것이다."(62쪽)

하지만 그러기 전에 "제조업자들은 쌓이고 있는 상품들의 시장을 찾아
전 세계를 헤집고 다닌다. 그들은 면화 제품의 배출구(시장)를 찾기
위해 콩고를 병합하고, 통퀸을 점령하고, 대포로 만리장성을 공격하라
고 정부를 몰아붙인다. ... 상품 뿐만 아니라 자본에도 잉여분이 있다.
자본가들은 더 이상 그것을 어디에 투자해야 할지를 모른다. 그러면
이들은 담배를 피우며 태양 아래서 한가하게 빈둥대고 있는 행복한
나라를 찾아내 기차 선로를 놓고 공장을 세워 그 저주받을 노동을 수
입한다."(64쪽) 그리고 그러한 산업 식민지에서 이 모든 과정이 되풀
이된다.(우리 나라 기업들이 외국에 현지 공장을 세우고 '근면'만을
강요하며 노조를 탄압하는 추태가 생각난다.)

인간의 기술력과 기계가 이 노동의 족쇄를 풀어 줄까? 그러나 "노동에
대한 맹목적이고 완강하며 가히 살인적인 열정이 인간을 자유롭게 해
줄 기계를 자유로운 인간을 노예로 만들기 위한 기계로 변질시켜 버렸
다. 이리하여 기계가 많이 생산하면 생산할수록 그만큼 인간은 궁핍해
지게 되었다."(67쪽) 왜냐하면 기계가 일을 대신해 주는 만큼 노동자
들이 노동 시간을 줄이고 휴일을 더 많이 가지게 되기는커녕, 자본가
들은 기계 수를 늘리는 대신 노동자 수를 줄이고, 남은 노동자들은 기
계에 밀려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노동 강도를 더욱 높이고 기계를
돌릴 수 있는 시간만큼 노동 시간을 늘렸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사람
들은 말한다. "신성한 노동, 일할 수 있어서 기쁘다!" "일이 가장 즐
거운 나는 아름다운 프로!"

노동이 신성시되는 반면 소비는 죄악시된다. 노동자들이 생산하는 재
화와 용역은 누군가 소비해야만 돈이 되는데, 노동자들은 그것들의 소
비 현장에 들어갈 자격을 인정받지 못한다. "분수에 어긋나는 소비는
경제의 적!" 분수에 어긋나는 소비라. 그놈의 분수란 누가 정해 놓은
기준이란 말인가?

그런데 "과잉 생산으로 죽어 가고 금욕주의 때문에 메말라 가는 노동
자의 이중적 광기에 직면하게 된 자본주의 생산의 커다란 문제는, 더
이상 생산자를 찾거나 생산력을 배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를 발
견하고 이들의 식욕을 자극해 허구적인 수요를 창출하는 데 있다."(7
7쪽) 그래서 에스키모에게 냉장고를 팔았다는 말이 자랑이 된다.

그래서 라파르그는 주장한다.
"왜 1년 동안 할 일을 반년 만에 해치우나? 왜 12달 동안 동일하게 분
배하지 않고, 또 왜 6개월 동안 하루 12시간 일하느라 소화 불량에 걸
리는 대신 1년 내내 5-6시간씩만 일하도록 하지 않나? 일단 하루 할
일의 양이 정해지면 노동자들은 더 이상 서로 시기하지 않을 것이며,
다른 사람의 손에서 일자리를 뺏고 다른 사람의 입에서 빵을 빼앗기
위해 싸우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면 몸과 마음도 지치지 않을 것이며,
게으름의 미덕을 실천할 것이다."(81쪽) - 이게 바로 IMF 시대 우리
나라가 부닥친 문제의 해답 아닐까?

라파르그는 노동자들이 임금을 올리고 노동 시간을 줄이면 자본가들
이 기를 쓰고 기계의 생산성을 높일 테니 결국 인간은 더욱 풍요롭게
살 수 있으리라고 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이렇다. 노동 시간을 줄여
생산 과잉을 해소하면 원자재도 적게 소모될 테고, 따라서 환경도 그
파괴 속도를 늦출 테고, 사람들이 환경 보호에 투자하는 시간도 늘어
날 테고, 자연 속에서 게으름을 피우며 심신을 맑게 할 여유도 늘어나
리라고. 생산이 줄어들면... 적게 생산하고 적게 소비하면 될 일이다.

"예수는 산상수훈중에 다음과 같이 게으름을 설교했다. '저 꽃들이 어
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결코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는 못하였다'(공동번역성서 루가 12:27 - 역자).
수염도 제대로 깎지 않고 무슨 일을 할 때면 화를 내곤 했던 여호와는
숭배자들에게 이상적인 게으름의 최고의 본보기를 보여 주지 않았던가.
그는 딱 6일만 일하고 영원히 휴식을 취했던 것이다."(48쪽)

그러면 인간은 왜 게을러야 하나? 라파르그는 글 끄트머리에 이렇게
게으름을 칭송한다. "예술과 고귀한 미덕의 어머니인 게으름이여, 이
인간의 고통에 위안이 되어 주소서!"(95쪽)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
는 게으름은 이기적인 소유욕의 반대말이며 부지런히 돈만 좇게 하는
자본주의 정신의 적이다.

폴 라파르그가 하루 노동 시간 12시간인 시대에 이 글을 썼다면, 프레
드 톰슨은 하루 노동 시간 8시간인 시대(1989년쯤)에 "폴 라파르그,
일과 여가 ; 전기적 에세이"를 썼다. 노동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그리
고 노동자들이 소비와 여가에 신경쓸 수도 있게 되었지만, 진정 게으
를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지는 않았다. '여가'가 산업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자동화 인간Homo automobilis'은 지출 경비, 산업 재해 그리고 환경
파괴 면에서 '도덕적으로 볼 때 전쟁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것'을 자행
하고 있다. 열악한 보수를 받는 날품팔이꾼인 우리로서는 '계약금도
없이 외상으로 우리의 족쇄가 될 자동 레저 기구를 사들여서', 돈을
갚기 위해 야근이나 부업을 하고 그래서 줄어든 여가를 더욱 더 광란
적으로 값비싼 대가를 치러 가며 소비하게 된다."(155쪽)

곧 "노동 시간이 줄어든다고 해서 그만큼 이에 상응하여 여가 시간이
늘어난 것은 아니다. 그 대신 자동 기계와 그 연관 산업이 기술적-경
제적-문화적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들 산업은 해롭다고 여겨지
는 분야에까지 서비스 산업을 확장해 이를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만들
었다. 건설업과 부동산업 그리고 정부 정책에 따라 우리는 한 장소에
서 일하고 수 마일 떨어진 다른 곳에서 수면을 취하고 또 다시 다른
곳에서 레크리에이션을 즐긴다. 자본주의적 시장 메커니즘은 이런 결
과가 우연히 이루어진 것처럼 술수를 부리지만, 실제로 이런 결과에
이르는 과정에서 우리의 시간과 재화를 모두 빨아먹는다. 우리의 문화
체제는 우리 스스로 우리를 착취할 고용주를 찾아다니고, 우리를 지배
할 정치가를 선출하여 이들이 마음대로 조직하는 삶의 양식을 자유라
고 느끼며 살아가도록 만든다."(158쪽)

그래서 프레드 톰슨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는
'가만히 멈추어 서서 바라볼 시간'이 필요하며,
무슨 사건에 참여할 때는
어느 정도 긴장감을 느껴야 한다.
우리는
혼자 있을 시간이,
타인과 깊숙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시간이,
집단의 일원으로서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 자신의 일을 몸소 창조적으로 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 외부에서 주어지는 즐거움을 주체적으로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그저 우리의 모든 근육과 감각을 사용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바라건대,
많은 사람들이 동료와 함께
정말 건전한 세상을 만드는 방법을 기획할 시간이
필요하다."(160쪽)

좋은 말이다. 찬성한다. 하지만 프레드 톰슨 역시, 무작정 게을러서는
안 된다는, 게으르게 보내는 시간에 뭔가를 채워 넣으려는 강박 관념
에서 벗어나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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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03-25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 이거 제가 쓸려고 와봤더니 숨은 아이님이 이미 너무 잘 써주셨네요. 저도 이거 처음 나왔을 때 샀는데...추천 제가 했어요. 흐흐.

숨은아이 2005-03-25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 오래 전에 쓴 것인데, 너무 잘 쓰기는요. 쓸데없이 길기만 하구만요. --a 바람구두님 리뷰 써주세요! 보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