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버먼의 자본론 - 과연, 자본주의의 종말은 오는가
리오 휴버먼 지음, 김영배 옮김 / 어바웃어북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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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가 물었다.
"휴버먼의 자본론을 읽고 무슨 생각했어?"
나는 답했다.
"으응, 절대 일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
B는 왜냐고 물었지만, 나는 설명하기 귀찮다고 했다.
하지만 속으로 괄호를 생각했다. 절대 일하지 않겠다는 생각 옆에 붙은 괄호 - 그것은 이런 체제 하에서는 일하고 싶지 않다는 뜻.

결론이 저렇게 나니, 이 책의 뒷면 광고에 나온 말대로 이 책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불온한 책'일런지도 모른다. 아, 물론 역시 괄호가 있다. (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말이다.
사회주의라면 질색팔색 불온하고 실패한 퇴물 취급하는 사람들에게 대놓고 설득하는 이 책을 읽고나면, 다른 건 다 한번쯤 '그래도 ~ 하지 않습니까?'라고 부러 태클을 걸 망정, 생산수단을 갖지 않은 계급이라면 누구나, 다른 무엇을 떠나서 오로지 <자본가를 위해서> 일하는 수 밖에 없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에, 저런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과연 불온한가?
혹은, 이 책을 썼을 당시가 소련이 아직도 공산주의의 희망을 잃지 않았던 1950년대이기에 지금과는 사정이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대답은 과감하게 노우다.
소련이 망하고 러시아가 들어섰지만, 자본주의는 이제 그 활개를 더욱 펼치고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거센 바람 속에 스스로 들어가 자멸해가면서 전보다 사정이 더욱 나빠졌다.
누구에게? 나에게, 너에게, 우리 모두에게.
실업과 공황과 전쟁을 몸소 겪으며 더 지난하게 일한들, 지금 이 체제가 바뀌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노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숨이라도 쉬려면, 아 - 한숨이 나오지만, 다시 한번, <꿈>을 꾸어야 한다.
그 이름이 사회주의인지, 유토피아인지, 몽상인지, 공산주의인지, 마르크스주의인지, 아무렇게든, 대고 싶은대로 대라.
아무튼 세상에 영원한 시스템은 없다는 역사가 주는 교훈을 믿고, 우선 꿈 꾸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런 꿈에 반기를 드는 사람, 정말로 불온하다. 그는 아마도, 이 체제 하에서 단 한 푼의 이윤도 잃고 싶지 않은 <자본가>일 것인데, 언젠가 자신에게도 돌아올 부메랑을 생각해서, 제발, 어서 정신차리길. 이 책이 알라딘 인문 MD님이 고른 Sorry CEO 추천도서 목록에 오른 이유도 아마 이런 마음에서 연유한 것이리라, 제멋대로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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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ire 2011-09-20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어떤 이유로 '불온'이란 단어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이 책 좀 불온해 보여서 좋네요.
아, 불온해지고 싶은 가을이네요. 잘 지내시죠, 치니 님?

치니 2011-09-21 15:07   좋아요 0 | URL
'어떤' 이유인지 궁금해요. :)
이 책은, 불온하다 아니다를 떠나서, 아주 잘 쓰여진 책입니다. 읽어보심 좋을 거라고 확신해요.
잘 지내요, 카이레님도?

turnleft 2011-09-21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 옆에 붙은 문구가 참 아이러니해 보이는군요 -_-;

"휴버먼의 자본론 - 과연, 자본주의의 종말은 오는가 [1000원 적립금 증정(~9/24)]"

자본주의의 종말은 오지 않을거라는 강력한 암시일까요 -_-;;;;

치니 2011-09-21 15:08   좋아요 0 | URL
ㅎㅎㅎ 예리한 턴레프트 님에게 딱 걸렸네요.
 
북촌방향 - The Day He Arrive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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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이렇게 꾸준하기도 사실상 힘들 터. 홍상수는 성실하다, 그것도 지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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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1-09-15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보는 내내, 지나가는 이 중에 나 없나 뚫어지라고 찾았다. 우리 동네가 그야말로 구석구석 등장, 그나저나 '다정'은 어디더라? 한번 가 봐야겠다.

poptrash 2011-09-15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작은 썸네일로 볼때는 말티즈 같은 작은 견종인 줄 알았는데 큰 사진 보니 리트리버네요 ;; 북촌방향 내리기 전에 빨리 봐야되는데 좀처럼 시간이 안나요 ㅜ_ㅜ

치니 2011-09-16 10:13   좋아요 0 | URL
네, 리트리버에요, 엄청 크죠, 게다게 쟤는 살이 많이 쪄서 아마 40킬로 쯤 나갈 거에요. 흐 -
북촌방향, 씨네큐브에서는 최소한 이번 주까지 할 것 같고,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서 의외로 더 할 수도 있을 듯. 함 보세요, 팝트래쉬 님이 어떻게 보실까 궁금하네요. :)
 
당나귀들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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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배수아는 독특하다(고들 한다). 이 독특함이 문체에 한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때로는 이 독특함이 마음에 들었고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일례로 '나는 네가 지겨워'라는 책을 읽었을 때는 정말 그 책이 너무나도 지겨워서, 혹시 지겨우라고 책을 쓰나,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게는 문체든 내용이든간에, 배수아라는 작가의 존재가 위와 같은 이유, 때떄로 다름 때문에 독특하다. 즉, 어떤 작가의 책을 읽을 때면 대체로 좋거나 대체로 싫어지게 마련인데, 아니 이게 너무 지나친 이분법이라면 대체로 좋은 가운데 가끔 싫거나 대체로 싫은데 간혹 좋거나 해야 하는데, 이 작가의 책은 한 권의 책 안에서도 좋거나 싫거나가 쉼 없이 반복되니, 과연 독특하구나 싶은 거다. 

주절주절 변명을 했지만, 아무튼 배수아의 책을 보면 한번쯤 읽어보고 싶어진다는 점에서 어쩌면 나는 그 독특함을 '좋아하는' 것이리라. 

<당나귀들>은 최근작일 거라고 착각했는데 알고보니 2005년 작이었다. 그렇다면 이 책의 내용이 이렇게나 어수선한 것이 조금쯤 이해가 된다. 그러니까 작가가 쿤데라의 그것과도 같은 관념이 가득한 책을 쓰기 시작한 시점이 되려나. 내 기억으로는 단단하지만 내용상으로 크게 어필할 것이 없는 에세이 식 글을 쓰던 배수아가 지난 해 창비 정기간행물에 낸 단편에서는 꽤나 인상적으로 관념적, 수사적인 단편을 써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간상 추론으로, 2005년 이 책이 나올 즈음에는 정리되지 않았던 관념적 글쓰기가 지난 해 쯤에는 제법 가지런해진 것 같다. 첨언할 필요조차 없이, 이건 무조건 나만의 추론이지만. 

오타조차 수정되지 않은 곳이 여러 군데 있는 (부러 그렇게 했을 것 같은) 번역투 비문이 속속 등장하는 이 책을 그래도 재미나고 흥미롭게 읽은 이유는 아무래도 취향 때문이다. 문학에 대한 난상 토론이 등장하는 장면이야 어쩌면 조금쯤 흔하게 다른 책에서도 나오지만 음악에 대해서 이토록 치열하게 자기 취향을 마음껏 토로하고 주물럭거리며 온갖 생각 꼬리물기를 나열하는 당당함은 (음악을 주제로 한 책이 아닌 이상) 소설에서는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책에 나온 클래식 음악은 대체로 나는 잘 모르는 음악이고, 클래식 음악을 몹시 사랑했다는 노동자 시인 찰스 부코우스키의 시도 처음 읽었기에, 그의 시를 번역하여 놓은 작가의 일면 소녀 감성처럼 보이는 열정에 덩달아 달뜨게 된다. 이 공감력 덕분에 '동물 학대 반대와 절대적 채식주의'에 대한 비논리적인 옹호와 엘리트주의, 한국문학 전반에 대한 무지와 근거없는 폄훼에 대한 반감은 제법 많이 상쇄되었음을 밝혀둔다.

아무튼 작가는 책 속에서 이미 선언했다, 이렇게. 

   
 

 난 어떤 하나의 문학적 언어가 '완성'의 단계에 가 닿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문학의 도구가 되는 그 언어가 항상 폐쇄적인 룰을 갖고 있다고 믿지는 않아. 물론 누구나 그럴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나는 가능한 한 최경계에서 작업하고 싶어. 이미 완성된 문법과 처녀지 사이에서. 그런 예술관을 네가 몽상이라 부르고 싶다면, 그러도록 해!

 
   
 
그러니, 몽상이라 부르던 아니던간에, 우리는 작가의 이 선언만큼은 존중해야 마땅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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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a 2011-09-14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것은 우연인가요!
리뷰를 쓴 지가 백만 년은 된 것 같기도 하지만, 리뷰를 쓴다 해도 이 책은 도무지 뭐라고 써야 할지 감도 안 잡힐 것 같아요.
차근차근 기록을 멈추지 않는 치니님. 참 대단하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클래식을 잘 모르는 처지지만..
음악에 대한 열렬한 사랑, 음악으로 인해 위로받은 사람만이 아는 절절한 감정을 느낄 수 있어서 그녀가 참 가깝게 느껴지더군요.
그건 꼭 클래식에 한정되는 경험만은 아닐 듯해요.
음악이 우리를 만지는 거라고 표현할 정도로, 지극한 감수성을 가진 그녀가 정말 멋졌어요.
이 작가는 때때로 굉장히 극단적이고 독단적이고 지나치게 이상적이거나 관념적인 사변을 펼쳐서 욕을 많이 사서 드시는 듯한데^^ 저는 그런 주장이 꼭 그녀 자신의 가치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것조차 '몽상'의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이 아닐까, 그녀가 추구하는 또 다른 형식의 허구가 아닐까.. 짐작만 해볼 뿐이에요.
설사 그녀가 교조적인 동물학대 반대자에다가 절대적 채식주의자, 엘리트주의자, 외국문물 숭배주의자라고 해도 저는 별로 상관없을 것 같긴 하지만.
(끝없이 나열되는 '-주의'들이 좀 거시기하군요.ㅎㅎ)

치니 2011-09-15 16:12   좋아요 0 | URL
우앙, 난 대체 서재의 뭘 보고 사는 건지, 꽃양배추 님의 40자 평을 이제서야 봤어요! 맞아 맞아, 외로운 사유. 그랬어요. 참으로 고독하고 그런데 그 고독을 절대 놓지 않으려 하는 고집이 느껴졌어요. 지금 생각하니, 그게 매력이구나 싶네요. :)

대단하긴요, 사실 읽고도 리뷰나 페이퍼 안 쓴 책들도 많고, 꼭 읽어야지 하고 쌓아두고 안 읽은 책도 부지기수에요. 다만, 상대적으로 꽃양배추 님이나 그 외 진짜 글을 쓰시는 분들에 비해서는 아무 글이나 내키는대로 잘 쓰기는 하는 모양이죠. 흐 - 무책임한 글쓰기.

음악이 우리를 만지다, 이 말이랑, 인용한 문장 중에서 바흐를 제대로 듣고나면 더 이상 다른 어떤 음악도 들을 수 없다고 한 말은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책에 나온 모든 입장과 주장이, 작가가 추구하는 또 다른 형식의 허구일 수도 있다는 꽃양배추 님 말씀에 동의하지만.....어쩐지, 그 허구조차 꾸며낸 허구가 아닌가, 또 괜한 의심이 들어요. ㅋㅋ

라로 2011-09-15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이 책 그렇잖아도 꽃양배추님이 40자평으로 올려주셔서 궁금햇더랬는데,,,
일단 꽃양배추님이 알려준 책 먼저 읽고,,,암튼 나도 자기에게 감동!!!
어찌 그리 부지런하신가요???
책도 엄청 많이 읽고,,,번역은 잘 되가시는지????
그나저나 사진에 있는 저 발은 당신의 발????가느다란게 이쁘네.^^

치니 2011-09-15 16:15   좋아요 0 | URL
나비 언니가 배수아를 읽고 뭐라고 할지 매우 궁금해지는데요? ㅎㅎ 저도 이래저래 배수아의 책들을 서너 권 이상 읽은 듯한데, 에세이스트의 책상이랑 일요일의 스키야키 식당이 괜찮았던 기억이 나요. 언니도 외국 생활을 오래 했던 경험때문에 공감가는 부분이 분명히 있을 거 같네요. :)
절대 ~ 안 부지런해요. 일단 일어나는 시각이 빨라야 10시인 생활인 걸요. ㅎㅎ 번역은, 잘 되어가는 건지 아닌 건지 평가를 못 받아서 잘 모르겠;;;
사진의 저 발은 하린이 발이에요. ㅎㅎ 저 때는 좀 어렸고, 지금은 아마 저보다 한 10센티는 더 컸을 거에요. 키가 커요, 제법.
 

문장(munjang.or.kr)이라는 싸이트에서 제공하는 시 혹은 소설의 한 구절을 소개하는 낭송 메일을 자주 받는데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많이 참여해서 좋아라 해요.
아마도 그 싸이트와 연동되는지 오늘은 문학나눔이라는 싸이트에서 메일이 와서 보니,
황정은 작가의 <백의 그림자>에 관한 퀴즈 이벤트가 떴네요.
로그인 해야 하는 귀찮음을 무릅쓰고 열심히 풀어보았습니다.
네, 뭐, 제가 할 일이 좀 없기는 한데요, 헤, 그래도, 선물에 대한 기대감도 있고 읽었던 내용을 다시 되살리면서, 초큼 재미나게 했어요.
혹시나 여러분 중에서도 너무 심심하고 더운데 뭐 심심풀이로 할 거 없나 생각 중이신 분 있다면, 아래 페이지로 고고 ~ :)

http://www.for-munhak.or.kr/idx.html?Qy=play&nid=597&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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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ash 2011-09-02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 안 해요

치니 2011-09-02 15:35   좋아요 0 | URL
못 하는 거겠죠, 샤워 하고 외출하셔야 하는 분이니까. 시간 부족으로! ㅎㅎ

hnine 2011-09-02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가 너무 쉬워서 선물 기대는 접어야 할 것 같아요 ㅠㅠ
제가 이런 퀴즈를 보고 그냥 못 지나가는지라 재미있게 풀고 왔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드려요 ^^

치니 2011-09-04 11:26   좋아요 0 | URL
쉽긴 쉽죠? ㅎㅎ 선물 기대도 기대지만, 퀴즈 풀면서 꽤 오래 전에 읽었던 글귀를 다시 읽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라로 2011-09-09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주 못봐서 섭섭한 치니님~~~.
그래도 오늘 댓글로라도 봐서 반가와용~~~~.^^
추석이라네,,,해피한 시간 보내시길...

치니 2011-09-10 12:11   좋아요 0 | URL
저주 저주 저주 ㅋㅋㅋㅋㅋ 오타도 귀여우신 나비 언니.
글은 안 써도 매일 다른 분들 글은 읽는답니다.
추석에는, 저 같은 사람은 먹을 게 없어서 슬프다능. 언니도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

라로 2011-09-13 22:49   좋아요 0 | URL
미쵸!! 저주라니,,ㅋㅎㅎㅎ
귀엽게 봐줘서 고마와~ 그날 댓글을 엄청 많이 달아서 그런가봐,,ㅎㅎ
피곤해서 빨리 자러가고 싶은데 댓글로 인사 할 사람들은 왜 글케 많던지,,ㅎㅎㅎ
오지랖이 넓은 것도 병중에 큰 병이야,,ㅠㅠ

먹을게 없어서 슬프다니,,,저런..
 
데샹보 거리
가브리엘 루아 지음, 이세진 옮김 / 이상북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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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서 좋은 책은 보통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읽고나서 뭐라고 딱 꼬집어 어디가 좋다고 선언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히 좋다! 고 전반적으로 믿게 되는 책과 전반적인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그중에서도 딱 어느 부분, 어느 구절이 내 마음에 쏙 들어서 어쩌면 작가란 이렇게 멋진 통찰력과 표현력을 지녔을까, 하고 감탄하게 되는 책.
이 책, 데샹보 거리는 후자에 속한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작가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초반부터 등장하기 때문에.

   
  그러자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죽고 싶었다. 한 그루 나무가 불러일으키기에 족한 그 감흥 때문에......나를 속였구나. 요 달콤한 감정 같으니! 슬픔은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더 똑똑히 알려준다는 사실을 이렇게 일깨우기냐!
 
   
집안의 막내로서, 아직은 제대로 된 판단조차 할 줄 모르는 꼬마로서, 다락방으로 도망쳐 어른들의 몰이해와 무심코 내뱉은 말에 받은 상처를 혼자서 다독여야 할 때, 우리들 대부분 어린 시절에 한번쯤은, 저렇게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절실하게 죽고 싶었을 것이다. 이제는 자세한 연유가 기억나지 않지만 무척이나 슬프고 서러워서 식구들이 나를 찾을 수 없는 곳에 숨어 울던 어느 오후의 희미한 기억.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감정이 어쩔 수 없이 달콤하기도 하다는 것, 어쩔 수 없이 슬픔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끼지 않았을까. 아, 나는 갑자기 가슴이 저며왔다.

이런 소녀의 엄마 아빠는 그 기질이 참으로 다른 사람들이었다. 언제나 자유롭고 활기 넘치는 바깥 세상을 그리워 하는 영혼을 지닌 엄마를 통해 가브리엘은 (아니, 소설 속 화자는) 가족 간의 사랑이라는 것을 '아마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꽁꽁 잡아놓고 싶었지만, 그래도 그들이 잡혀 살면서도 행복하기를 바랐던 모양이다'라고 진단하는 한편, 언제나 엄격하고 금욕적이며 소심했던 아빠를 통해서는 '아빠는 우리가 엄밀한 진실만을 말하도록 강요했는데, 엄밀한 진실만큼 부정확한 것도 세상에 없는 법이다'라고 깨우친다. 오, 이 얼마나 영민하고 깜찍한 소녀인가.
점점 이 소녀가 들려주는 데샹보 거리 사람들 이야기가 지독하게 궁금해져 온다.

이 소설에서 가장 모험적이고 가슴 두근거리는 사건을 담은 '집 나온 여자들' 편에 이르면 소녀는 이제 바야흐로 작가로서의 관찰력에서 비롯된 통찰을 싣는다.

   
  엄마와 나는 서로 눈길을 피했던 것 같다. 이따금 다른 도리가 없을 때면 서로 잘 모르는 사이처럼 얼른 눈길을 다른 데로 돌렸다. 두 사람이 똑같은 것을 동시에 바랄 때면 꼭 그런 식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어느 한쪽이 너무 득의양양했다가는 상대의 실망이 더욱 커지기에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혹은 두 사람이 함께 행복에 도달한다는 게 거북하다고나 할까.....
 
   

그렇게 해서 자라난 소녀가 십대에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는 부분에 이르면, 우리는 이 소녀가 작가 아닌 다른 일을 했을까봐 조바심이 날 지경이 된다. 그렇다, 가브리엘 루아는 꼭 작가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책으로 감동을 주어야 할 책무를 지니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래와 같은 구절을 쓴 걸 보면.

   
  나는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듯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느꼈다. 아직은 희미하지만 기분 좋고, 조금은 서글프기도 한 마음이었다. (중략) 나는 모두의 눈을 피해 숨어서 책을 읽는 아이였고, 이제 나 자신이 소중히 여김 받는 한 권의 책이 되고 싶었다. 익명의 존재, 여자, 아이, 친구의 손에서 넘어가는 몇 장의 삶이 되어 다만 몇 시간만이라도 그들을 내 곁에 붙잡아둘 수 있으리라. 이에 비길 만한 소유가 있을까? 이보다 우애 넘치는 침묵, 이보다 완벽한 이해가 있을까?
 
   

그런데 작가가 '일상보다 허구를 더 좋아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인 엄마는 애정 가득한 독자이자 자식의 앞날을 걱정하는 어른으로서 이런 말을 한다.

   
  글쓰기는 가혹하지. 그거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까다롭고 요구가 많은 일일게다.....정말로 진실한 글을 쓰려면 말이야. 말하자면, 자기를 두 쪽으로 쪼개는 셈이 아닐까. 한쪽은 아등바등 살아야 하고, 다른 쪽은 응시하고 판단하는 거지....

우선 재능이 있어야 해. 재능이 없다면 얼마나 애가 타겠니. 하지만 재능이 있어도 아마 힘들기는 마찬가지일 게야.....말이 좋아 재능이지. 어쩌면 명령이라고 하는 게 마땅할지도 모르거든. 글쓰기의 재능은 아주 기묘하지. 전혀 인간적이지 않은 재능이랄까. 엄마는 남들이 그런 재능을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단다. 글쓰기의 재능은 남들과 괴리시키는 불운과도 흡사하달까. 거의 모두가 우리를 떠나게 만든달까....
 
   
그런 엄마에게 가브리엘은 (아니 소설 속 화자는) 이렇게 항변한다.

   
  가끔은 말이 진실의 경지에 이르기도 해요. 그리고 말이 없다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진실이란 과연 그러하다, 사실이다, 이 정도밖에 없겠지요.
 
   

그래도 엄마는 안타깝고 무력한 몸짓으로 말한다.

   
  앞날은 끔찍한 거란다. 미래는 언제나 조금은 실패이게 마련인걸.
 
   
아 - 작가란 철저히 혼자일 수 밖에 없음을, 그리고 우리네 삶이 역시 그러할 수 밖에 없음을, 미래를 생각하기보다는 늘 지금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음을, 이토록 간명하고도 따뜻하게 설명해주는 책을 읽은 기억이 거의 없다.
지금은 고인이 된 가브리엘 루아, 그가 있어서 캐나다인들은 참으로 행복했을 게 분명하다. 비록 번역서로 접하지만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작가가 있음에 행복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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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1-08-28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이 책 꼭 읽어볼테야!^^

치니 2011-08-28 00:56   좋아요 0 | URL
네, 꼭 읽어 보셔요! 분명 좋아하시리라는 생각이 들어요. :)

nada 2011-08-29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좋아요, 가브리엘 루아!
싸구려 행복도 재미있어요.^^
저도 이 책 읽을 때, 메모해둔 구절이 숱하게 많았어요.

치니 2011-08-29 20:38   좋아요 0 | URL
네, 안 그래도 이 책을 알게 해준 꽃양배추 님에게 헌사라도 보내야 하나 그러고 있었어요. :)
싸구려 행복도 곧 읽어 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