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샹보 거리
가브리엘 루아 지음, 이세진 옮김 / 이상북스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내게 있어서 좋은 책은 보통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읽고나서 뭐라고 딱 꼬집어 어디가 좋다고 선언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히 좋다! 고 전반적으로 믿게 되는 책과 전반적인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그중에서도 딱 어느 부분, 어느 구절이 내 마음에 쏙 들어서 어쩌면 작가란 이렇게 멋진 통찰력과 표현력을 지녔을까, 하고 감탄하게 되는 책.
이 책, 데샹보 거리는 후자에 속한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작가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초반부터 등장하기 때문에.

   
  그러자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죽고 싶었다. 한 그루 나무가 불러일으키기에 족한 그 감흥 때문에......나를 속였구나. 요 달콤한 감정 같으니! 슬픔은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더 똑똑히 알려준다는 사실을 이렇게 일깨우기냐!
 
   
집안의 막내로서, 아직은 제대로 된 판단조차 할 줄 모르는 꼬마로서, 다락방으로 도망쳐 어른들의 몰이해와 무심코 내뱉은 말에 받은 상처를 혼자서 다독여야 할 때, 우리들 대부분 어린 시절에 한번쯤은, 저렇게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절실하게 죽고 싶었을 것이다. 이제는 자세한 연유가 기억나지 않지만 무척이나 슬프고 서러워서 식구들이 나를 찾을 수 없는 곳에 숨어 울던 어느 오후의 희미한 기억.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감정이 어쩔 수 없이 달콤하기도 하다는 것, 어쩔 수 없이 슬픔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끼지 않았을까. 아, 나는 갑자기 가슴이 저며왔다.

이런 소녀의 엄마 아빠는 그 기질이 참으로 다른 사람들이었다. 언제나 자유롭고 활기 넘치는 바깥 세상을 그리워 하는 영혼을 지닌 엄마를 통해 가브리엘은 (아니, 소설 속 화자는) 가족 간의 사랑이라는 것을 '아마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꽁꽁 잡아놓고 싶었지만, 그래도 그들이 잡혀 살면서도 행복하기를 바랐던 모양이다'라고 진단하는 한편, 언제나 엄격하고 금욕적이며 소심했던 아빠를 통해서는 '아빠는 우리가 엄밀한 진실만을 말하도록 강요했는데, 엄밀한 진실만큼 부정확한 것도 세상에 없는 법이다'라고 깨우친다. 오, 이 얼마나 영민하고 깜찍한 소녀인가.
점점 이 소녀가 들려주는 데샹보 거리 사람들 이야기가 지독하게 궁금해져 온다.

이 소설에서 가장 모험적이고 가슴 두근거리는 사건을 담은 '집 나온 여자들' 편에 이르면 소녀는 이제 바야흐로 작가로서의 관찰력에서 비롯된 통찰을 싣는다.

   
  엄마와 나는 서로 눈길을 피했던 것 같다. 이따금 다른 도리가 없을 때면 서로 잘 모르는 사이처럼 얼른 눈길을 다른 데로 돌렸다. 두 사람이 똑같은 것을 동시에 바랄 때면 꼭 그런 식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어느 한쪽이 너무 득의양양했다가는 상대의 실망이 더욱 커지기에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혹은 두 사람이 함께 행복에 도달한다는 게 거북하다고나 할까.....
 
   

그렇게 해서 자라난 소녀가 십대에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는 부분에 이르면, 우리는 이 소녀가 작가 아닌 다른 일을 했을까봐 조바심이 날 지경이 된다. 그렇다, 가브리엘 루아는 꼭 작가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책으로 감동을 주어야 할 책무를 지니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래와 같은 구절을 쓴 걸 보면.

   
  나는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듯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느꼈다. 아직은 희미하지만 기분 좋고, 조금은 서글프기도 한 마음이었다. (중략) 나는 모두의 눈을 피해 숨어서 책을 읽는 아이였고, 이제 나 자신이 소중히 여김 받는 한 권의 책이 되고 싶었다. 익명의 존재, 여자, 아이, 친구의 손에서 넘어가는 몇 장의 삶이 되어 다만 몇 시간만이라도 그들을 내 곁에 붙잡아둘 수 있으리라. 이에 비길 만한 소유가 있을까? 이보다 우애 넘치는 침묵, 이보다 완벽한 이해가 있을까?
 
   

그런데 작가가 '일상보다 허구를 더 좋아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인 엄마는 애정 가득한 독자이자 자식의 앞날을 걱정하는 어른으로서 이런 말을 한다.

   
  글쓰기는 가혹하지. 그거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까다롭고 요구가 많은 일일게다.....정말로 진실한 글을 쓰려면 말이야. 말하자면, 자기를 두 쪽으로 쪼개는 셈이 아닐까. 한쪽은 아등바등 살아야 하고, 다른 쪽은 응시하고 판단하는 거지....

우선 재능이 있어야 해. 재능이 없다면 얼마나 애가 타겠니. 하지만 재능이 있어도 아마 힘들기는 마찬가지일 게야.....말이 좋아 재능이지. 어쩌면 명령이라고 하는 게 마땅할지도 모르거든. 글쓰기의 재능은 아주 기묘하지. 전혀 인간적이지 않은 재능이랄까. 엄마는 남들이 그런 재능을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단다. 글쓰기의 재능은 남들과 괴리시키는 불운과도 흡사하달까. 거의 모두가 우리를 떠나게 만든달까....
 
   
그런 엄마에게 가브리엘은 (아니 소설 속 화자는) 이렇게 항변한다.

   
  가끔은 말이 진실의 경지에 이르기도 해요. 그리고 말이 없다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진실이란 과연 그러하다, 사실이다, 이 정도밖에 없겠지요.
 
   

그래도 엄마는 안타깝고 무력한 몸짓으로 말한다.

   
  앞날은 끔찍한 거란다. 미래는 언제나 조금은 실패이게 마련인걸.
 
   
아 - 작가란 철저히 혼자일 수 밖에 없음을, 그리고 우리네 삶이 역시 그러할 수 밖에 없음을, 미래를 생각하기보다는 늘 지금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음을, 이토록 간명하고도 따뜻하게 설명해주는 책을 읽은 기억이 거의 없다.
지금은 고인이 된 가브리엘 루아, 그가 있어서 캐나다인들은 참으로 행복했을 게 분명하다. 비록 번역서로 접하지만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작가가 있음에 행복했으므로.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로 2011-08-28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이 책 꼭 읽어볼테야!^^

치니 2011-08-28 00:56   좋아요 0 | URL
네, 꼭 읽어 보셔요! 분명 좋아하시리라는 생각이 들어요. :)

nada 2011-08-29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좋아요, 가브리엘 루아!
싸구려 행복도 재미있어요.^^
저도 이 책 읽을 때, 메모해둔 구절이 숱하게 많았어요.

치니 2011-08-29 20:38   좋아요 0 | URL
네, 안 그래도 이 책을 알게 해준 꽃양배추 님에게 헌사라도 보내야 하나 그러고 있었어요. :)
싸구려 행복도 곧 읽어 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