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불행 속에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추상이 당신을 죽이기 시작할 때는 분명 그 추상에 마음을써야 한다. 그리고 리외는 단지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예컨대 그가 책임을 지고 있던 보조 병원(지금은 세 개가 되었다.)을 관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는 진찰실을 향해 있는 방을 접수실로 꾸미게 했다. 바닥을 파크레졸(cresol)수로 욕탕을 만들었는데, 그 중앙에 벽돌로 된 작은 섬이 있었다. 환자를 그 섬으로 옮겨 빠르게 옷을 벗기고, 옷은 물속에 넣었다. 몸이 씻기고 말려져 거친 병원용 내의를 입은 환자는 리외의 손으로 넘어왔다가, 그다음 단계로 병실 중 한 곳으로 옮겨졌다.

자기가 영위해 온 은둔 생활에 대해 놀라는 타루에게, 이 늙은 천식 환자는 대략 이렇게 설명했다. 즉, 종교에 따르면, 한사람의 반생은 상승이고, 나머지 반생은 하강인데, 하강 중에그 사람의 하루하루는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어서 언제라도그것들을 빼앗길 수 있으니, 그것들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최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 있다고 말이다.

사실 수많은 우리시민들이 서술자의 입장이라면, 오늘날 보건위생대의 역할을과장해서 기술하고픈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서술자는 오히려 이런 훌륭한 행동에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결국 악에 대해 간접적이고 강력한 찬사를 바치게 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런 훌륭한 행동이 그렇게도 대단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주 드물기 때문일 뿐이고, 또 인간의 행동에서 악의와 무관심이 더 흔한 원동력이라고 미루어 짐작하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술자는 이런 생각에 공감하지 않는다.

그때 우리 시의 많은 신도덕주의자들은 백약이 무효이며, 따라서 무릎을 꿇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다녔다. 타루도 리외도 그들의 친구들도 이런저런 대답을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결론은 항상 그들이 알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든 저런 식이든 간에 계속 싸워야지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되도록 많은 사람이 죽는다든가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을 겪지 않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직페스트와 싸우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이 진리는 대단한 것이하나도 없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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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재앙이란 항상 있는 일이지만, 막상 들이닥치면 사람들은 그것에대해 생각하기 어려운 법이다.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페스트가 많이 있었다. 하지만 페스트나 전쟁이 들이닥치면 사람들은 항상 속수무책이었다. 우리 시민들이 그랬듯이 의사 리외도 속수무책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가 망설였던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가 걱정과 자신감을 나눠 가졌던 것 역시 이런 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전쟁이 터지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오래 안 갈거야, 너무 어리석은 짓이잖아." 그리고 분명 전쟁은 너무 어리석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계속되지 않는 건 아니다. 어리석음은 항상 끈덕진 법이다. 만일 사람들이 늘 자기 생각만 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 시민들은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여서 자기 생각만 하고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은 인간주의자들이었던 것이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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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추리소설에 관심을 별로 안 두고 살아서 대 작가라는 것만 알았지 이 정도이신 줄은 미처 몰랐다. 근데 이 작품은 추리소설 아닌데도 읽는 내내 오싹하고 등골 서늘한 걸 보면 인간 심리 파악에 도 트신 분 👍🏻. 마지막까지 한 치의 오차 없는 스토리 구성에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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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02-21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네!! 정말 아직까지 가끔 생각 나는 책이야,, 특히 나는 블란치가 한 얘기가 꼭 나에게 한 얘기 같아서 그런가 자주 곱씹고 있어,,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말고 할 일이...˝ 그 부분 특히;;;; 반성도 하고,, ^^;;; 근데 심리 묘사 쩔지!! 그래서 추리소설의 여왕이 아닐까 싶고,,, 추리소설도 아주 재밌어,,생각나면 읽어보길.. 불어도 많이 나와,,ㅋㅋㅋ

치니 2022-02-21 11:26   좋아요 0 | URL
네네, 안 그래도 언니 덕분에 이 책 읽었어요 😊 리뷰에 여러 번 좋다고 해서 호기심 일었죠. 역시 주변에 책 잘 읽는 분들을 많이 둬야 함 😎 추리소설도 함 시도해볼게요!

웽스북스 2022-02-23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그렇단말이죠! ㅎㅎㅎ

치니 2022-02-23 16:05   좋아요 0 | URL
강추 강추여요!
 
고맙습니다 (일반판)
올리버 색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알마 / 2016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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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고나서 갑자기 이 분 일대기를 영화화 하면 흥미진진하게 볼 것 같다 싶어서 찾아보니 2019년도에 이미 나왔음. 인생을 그 누구보다 역동적으로 사신 분, 인류에게 많은 걸 남기신 분, 제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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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너무 어려워요!

Q 집착 없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갑니까? 부모가 무심하다면 아이들조차돌보지 않을 거예요. 집착 없이 어떻게 사랑하고 삶을 살아갑니까?
A 집착 없음이 무관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은 ‘신성한 무관심‘입니다. 부모로서 당신은 자녀를 사랑으로 돌볼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집착하지 않고 그렇게 해야 하지요. 책임을 다하되 사랑이 넘쳐흘러서 그렇게해야 합니다. 당신이 아픈 사람을 돌봐준다고 합시다. 당신이돌봐줬지만 그는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이때 울지 마세요. 그건 쓸모없는 짓입니다. 평정심으로 그를 도울 다른 방법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성한 무관심입니다. 가만히 있는것도 아니고 반응하는 것도 아니지요. 대신 균형 잡힌 마음으로 실질적이고 긍정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입니다.
Q. 그건 너무 어려워요!
A 그렇지요. 그러나 이것이 당신이 배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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