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 - Late Autum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어느 온라인 잡지에서 읽었던 김태용 감독의 인터뷰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나도 궁금해요"라고 웃으며 이야기하는 감독이, 나는 좋다. 일관성도 없고 지그재그, 그 순간 하고 싶은 걸 그저 해볼 수 있는 환경이 될까 라는 문제를 생각하면, 어쩌면 많은 감독 지망생에게 꿈 같은 이야기로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고개를 끄덕거리게 하는 '영화라는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그래야 할 것 같은' 담담함과 용기로 보인다. 

무서운 영화라면 딱 질색이고 받아들일 자신도 없던 내가 이 감독의 <여고괴담 2>를 본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다. 왜 그랬나 모르겠는데 그 영화가 끌렸고 그 당시에는 감독의 영향은 전혀 받지 않은 채 공포 영화 쟝르에 속하는 이 영화를 본 그날, 나는 '이런 영화를 만든 감독이 남자!!!라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생전 자신이 속해보지 않은, 그래서 보통은 그 가장자리를 만지기조차 힘든 세상 - 여학생이라는 이름 하에 잔인하게 겪어야 하는 성장통이 고스란히 담긴 - 을 실제 겪은 나조차도 잊고 있던 가장 마지막 감정까지 끌어올리며 연출한 사람에게 가없는 호의를 느꼈던 것이다. 

다음 영화인 <가족의 탄생>은 아무래도 이전 감동을 배제할 수 없는 선입견을 지닌 채 보러 갔다. 오, 기대 이상이었다. 이 감독은 예의 '겪지 않은 이야기를 담을 때에도 유지되는 따뜻한 시선'을 또 한번 근사하게 선사하면서, 더불어 공포영화에선 채 발화하지 못했으리라 짐작되는 명랑성과 (우울한 명랑성이라고 해도 좋겠다) 유머 감각까지 보여준다. 그 안에서 천진난만함의 표상으로 떠오르던 정유미는 이제 충무로의 스타가 되었고, 나는 이런 발군의 실력을 제대로 캐치해내는 감독이 또 어떤 배우들과 호흡을 맞출 지 궁금해졌었다.  

그 다음, 오늘 이야기하려는 <만추>까지 오기에 시간은 아주 더디 흘렀다. 하지만 나는 기다림이 싫지 않았다. 마치 영화 속 탕웨이 - 애나의 기다림이 싫어보이지 않았던 것처럼.  

사람은 혼자 태어나서 혼자 죽지만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좋다'는 감정을 가장 절실할 때 느끼게 해준 사람을 잊지 못하게 되어 있고, 그럴 때 기다림은 죽도록 힘든데도 죽도록 매혹적인 그 무엇, 그러니까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 그래서 기다림은 사랑을 가장하지만 때때로, 그 자체로 참으로 충일한 감정이고, 우리는 그 감정을 잊거나 피하며 살지만, 마침내 이런 영화에서 발견할 때 아 - 하는 탄성과 함께 꼭 끌어안게 되기도 하는 걸 테지, 라는 생각을, 영화 보는 내내 헀다. 

훈도 애나도, 세상에 대한 기대가 없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에게는 서로를 알아보는 마음이 있다. 세상에 대한 기대 - 이것이 중요하다. 알아보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세상에 대한 기대가 있나 없나 여부가 알아본 다음에 어떻게 할 지를 정해주니까. <만추>는, 원작이 어땠는지 몰라도, 이렇게 느리고도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감정을 애써 짓누르며 알아보는데도 외면하는 마음, 그래도  결국 사랑하게 되는 슬픈 예감과 운명을 탄식하는 동시에, 그 탄식의 행간 속 빛나는 하루살이의 환락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일 거라, 약간은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감독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일관성 따위는 없다고(과연, 영화의 톤은 한결같지 않았다, 이 슬픈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관객석에서 낄낄거리는 웃음이 나올 만큼), 앞으로 무엇을 할 지 본인도 궁금할 뿐이라고, 오예, 그렇다면 다음에는 보편적인 이해도 따라오는 영화를 만들게 될 지도 몰라, 나는 또 다시 그에게 반한 마음으로 설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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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2-24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왕 보셨군여,,어제 영화좋아하는 친구들이랑 커피마시면서 이야기하다가 이 영화 다들 강추하더군여~ 다들 김태용팬이라서^^ 원래부터 보려고하던 영화인데 ㅋㅋ 훈과 애나,,이름 멋있져? 그런데 예고편에서 나오는 상황을 물어봤어여,,버스에서 훈이 애나에게 돈빌릴때 이게 가능한 얘기일까라고질문의 돌아오는 답변 현빈이니깐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좌절스러운 OTL!! 아놔 현빈의 럭셔리한 외모~

치니 2011-02-24 15:17   좋아요 0 | URL
아, 네오 님은 아직 안 보셨구나. 스포일러는 최대한 자제했지만 이 영화는 어떤 이야기를 써도 스포일러가 되는 영화 같아요. -_-;
제 주변엔 김태용이 누구야? 이런 분들도 많은데, 역시 네오 님은 ~ ㅎㅎ
현빈이니까 가능하다 - 흠, 이건 저로서는 동의하기 어렵사옵니다. 그냥, 세상에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란 없다, 정도로 해두죠. :)

네오 2011-02-24 15:48   좋아요 0 | URL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을일이란 없다란 현빈이 아니어도 보통의 남자도 가능하다는 희망스러운 답변 인가여? ^^;

치니 2011-02-24 16:33   좋아요 0 | URL
그럼요! 제 눈에 안경, 이란 말도 있고요. :)

nada 2011-02-24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김태용 감독에 대한 애정이 뚝뚝 흐르는 리뷰네요.
창작자로서 김 감독님이 무척 흐뭇하실 듯합니다.
전 가족의 탄생밖에 못 봤지만, 이런 영화를 만든 사람이 남자라니, 하는 생각 저도 했던 거 같아요.
나쁘지 않았지만 제 눈에 비친 몇 가지 틈들이 못마땅해서 야박한 별점을 매겼는데, 치니님의 따뜻한 리뷰 앞에서 제 냉소가 부끄러워집니다.

세상에 일어나지 않을 일이란 없다, 이 말 참 좋네요.^^

치니 2011-02-24 16:35   좋아요 0 | URL
제가 원래 애정에 있어서 편파적이라, 어차피 좋아하는 사람 영화는 객관적으로 못 봐요. 평론가도 아니니 맘껏 편애 ~ 헤헤.
하지만 몇 가지 틈들이 있다는 것 - 요건 또 동의합니다.

세상에...이 말은 저도 어디서 읽은 말인데, 지금 그 책 제목이 생각 안나요. 히잉.

프레이야 2011-02-24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에요, 치니님^^
세상에 이해하지 못할 일도 없다는 말, 같이 생각나요.
아직 보지 못했어요. 이번 토욜쯤 볼 거 같은데 소문난 잔치라 해도
충분히 그 잔치에 가보고 싶은 곳이 있지요.
말씀하신 전작 둘 다 봤는데 저도 박수 주고 싶은 영화였어요.
참 섬세한 인상만큼 영화도 그렇다는 느낌, 만추에서는 어떨까 더 궁금해지네요.

치니 2011-02-24 19:29   좋아요 0 | URL
오, 프레이야 님이 보시면 또 어떤 느낌을 받으실지, 벌써 궁금합니다. :)

인상 이야기가 나와서 덧붙이자면, 저는 김태용 감독님처럼 생긴 분을 좋아해요. 하하. 외모까지 마음에 든다는 게 점수를 더 주게 되는 요소.

라로 2011-02-24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님~~~"내가 뭘 하고 싶은지 나도 궁금해요"라고 저도 늘 생각해.^^;;

그나저나 나는 김감독의 영화는 [만추]가 처음이네.
[여고괴담2]나 [가족의 탄생]을 찾아보고 싶게 만드는 리뷰야!! 이렇게 멋진 리뷰를 써주는 사람이 있는 김감독이 갑자기 왜 부러운걸까???( ")

치니 2011-02-25 11:54   좋아요 0 | URL
맞다, 나비 언니도 그런 분이죠! ㅎㅎㅎ 그러니 이렇게 인기가 높죠. 다음엔 또 무엇으로 우리를 놀라게 할까, 궁금하게 하는 사람.

[여고괴담2]는 상당히 무서워요, 밤에 혼자 보시지 말길. ^-^;;
[가족의 탄생]은 꽤 유쾌하게 보실 수 있을테니 남편 분과 같이 봐도 좋을 듯?

2011-02-24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25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와 2011-02-25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족의 탄생]도 그렇고 [만추]도 그렇고.
저는 이 영화들을 보면서 소름이 돋았어요.
그래서 김 감독의 다음 작품도 기대중입니다! ^^

치니 2011-02-25 11:57   좋아요 0 | URL
오, 레와 님도 [가족의 탄생] 보셨군요. 이 작품은 당시엔 흥행에 쫄딱 실패한 걸로 아는데, 의외로 나중에 챙겨본 분들 많은 듯. :)
저도요, 다음 작품 기대중이긴 한데, 솔직히 개인적으로 액션물이나 사극은 하지 말았음 하는 바람이;;; ^-^;

따라쟁이 2011-02-25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독은 <마음이 열리는 순간>을 담고 싶었다고 어디선가 본것 같아요. 저는 영화를 보면서 그 순간은 어디일까.. 하고 생각했었었어요.

멋진 리뷰에요^-^

치니 2011-02-25 11:59   좋아요 0 | URL
그 순간은 어디였을까요, 정말...처음 훈이 30불을 빌리던 때부터일까요, 아니면 애나가 장례식에서 오열할 때일까요, 그도 아니면 변사놀이? 아니면 하오/화이 놀이? 아니면....아, 매번 다, 였지 않을까요.

chaire 2011-02-25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리뷰 정말 좋네요. 감독과 영화에 대한 진심이 털옷 짜듯 언어와 언어 사이에 한가득..
가족의 탄생을 감동적으로 봐놓고도 그게 만추 김태용의 전작인 줄은 또 잊고 있었어요, 전.
만추를 봐야 할 이유가 늘었군요.
아참, 치니님의 '편애'라는 단어가 정겹습니다.

치니 2011-02-25 12:00   좋아요 0 | URL
카이레 님, 진심이 털옷 짜듯 언어와 언어 사이에 한가득, 이 표현 참 좋네요. 고마워요, 그렇게 읽어주셔서. :)
카이레 님도 제가 편애하는 알라디너인 거, 아시죠? (헤 - 낯 간지럽지만서도 커밍 아웃)

굿바이 2011-02-25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결국 사랑하게 되는 슬픈 예감과 운명을 탄식하는 동시에, 그 탄식의 행간 속 빛나는 하루살이의 환락! 캬~~~~~~~ 커피가 술처럼 꼴딱꼴딱 넘어가요 :)

그러니까, 저는요, 그런 걸 맨날맨날 일부러(!) 스스로 제 발로 찾다가 완전히 망해버린, 변태 오브 더 변태!! 그래도, 저는요, 막 그렇게 살래요. 그렇게 살아서 그렇게 사는 것들과 죽자살자 부대끼며 살래요. 이런 다짐을 이런 나른한 오후에 해요. 유후~~~
(봄이 온다고 하니, 춘삼월 미친년이기를 미리 선언하는 굿바이입니다)

치니 2011-02-26 12:46   좋아요 0 | URL
ㅎㅎㅎ 춘삼월 미친년, 낭만적인 굿바이 님, 저도 그래요, 그....변태 오브 더 변태!
인간이 좀 하루살이보다야 길게 살지만서도, 덧없이 환락에 목 메고 사는 거야 비슷하지 않습니꺼.

... 2011-02-26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모든 리뷰를 그냥 지나쳤는데 보고 나니까, 하나 둘 찬찬히 읽을 수 있게 되네요. 저도 만추의 김태용감독이 유머감각을 꾸준히 유지해줘서 좋았어요! 유머감각을 일관되게 유지한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

치니 2011-02-26 12:48   좋아요 0 | URL
저도요, 보기 전에는 아무리 리뷰가 궁금해도 읽지 않고 나중에 하나하나 봤어요. 모두 공감되는 편이었죠. 그 말은 아마도, 영화가 은근 다채로운 감성을 전해준다는 뜻이기도 하겠고요. :)
아, 저는 유머 감각 있는 남자에게 사족을 못 씁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