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대신 보옴, 이라고 늘여 불러줘야 할 것 같은, 죽어도 끝날 것 같지 않던 혹독한 추위 끝에 느릿느릿 다가온, 계절이 왔다. 마침내. 

그토록 기다렸음에도, 간사하기 이를 데 없는 내 마음, 다시 서늘한 추위가 그리운 이 마음은 또 어쩌누. 살랑거리고 미적지근하고 먼지가 푸울풀, 눈쌀이 햇살 때문에 찌푸려지고 잡은 손에는 슬며시 땀이 고이는, 이 봄의 끈적함이, 갑자기 견디기 어렵다.  

"고개를 숙이고 메이는 목으로 밥을 넘기는" 대신 저 먼 상등성이 아지랑이를 실눈을 뜨고 바라보면서 깔깔거려야 할 것 같은 계절, "봄 무순이 잊어버린 눈설(雪)처럼" 나도 그렇게 누군가의 얼굴을 잊고 살아야 할 것 같은 계절, "어린 꽃을 단 눈먼 동백처럼" 바보가 되어야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이 계절이 두려운 것이리라. 가는 겨울과의 이별이 조금쯤 미안하기도 한 것이리라.

찬란한 바깥에서 나딩굴지 못하고, 처박혀 이런 시를 읽고 있으니, 말이다.  

 

수수께끼  

 

극장을 나와 우리는 밥집으로 갔네  

고개를 숙이고 메이는 목으로 밥을 넘겼네 

밥집을 나와 우리는 걸었네 

서점은 다 문을 닫았고 맥줏집은 사람들로 가득해서 들어갈 수 없었네 

 

안녕, 이제 우리 헤어져 

바람처럼 그렇게 없어지자 

먼 곳에서 누군가가 북극곰을 도살하고 있는 것 같애 

 

차비 있어? 

차비는 없었지 

이별은? 

이별만 있었네 

 

나는 그 후로 우리 가운데 하나를 다시 만나지 못했네 

사랑했던 순간들의 영화와 밥은 기억나는데 

그 얼굴은 봄 무순이 잊어버린 눈설(雪)처럼 

기억나지 않았네 

 

얼음의 벽 속으로 들어와 기억이 집을 짓기 전에 얼른 지워버렸지 

뒷모습이 기억나면 얼른 눈 위로 떨어지던 빛처럼 잠을 청했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당신이 만년 동안 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들여다보고 있었네 

내가 만년 동안 당신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붙들고 있었네 

먼 여행 도중에 죽을 수도 있을 거야 

나와 당신은 어린 꽃을 단 눈먼 동백처럼 중얼거렸네 

 

노점에 나와 있던 강아지들이 낑낑거리는 세월이었네 

폐지를 팔던 노인이 리어카를 끌고 지하도를 건너가고 있는 세월이었네 

왜 그때 헤어졌지, 라고 우리는 만년동안 물었던 것 같네 

아직 실감 나지 않는 이별이었으나 

이별은 이미 만년 전이었어 

 

그때마다 별을 생각했네 

그때마다 아침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던 

다리 밑에 사는 거지를 생각했네 

수수께끼였어, 

당신이라는 수수께끼, 그 살肉 밑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잊혀진 대륙들은 

횟빛 산맥을 어린 안개처럼 안고 잠을 잤을까?

- 허수경 시인의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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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2-21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 시 좋다!
저도 이 시집을 사겠어요! 불끈!

치니 2011-02-21 17:51   좋아요 0 | URL
불끈! ㅎㅎㅎ 다락방 님은 언제나 책에 대한 열정이 넘쳐요.

hnine 2011-02-21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불끈! ^^

치니 2011-02-21 17:51   좋아요 0 | URL
^-^ 읽어보시고 소감 알려주세요.

웽스북스 2011-02-21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아요 이 시집!

치니 2011-02-21 17:52   좋아요 0 | URL
웬디양 님 페북에서 보고 사고싶다 했는데, 멋진 님께서 선물로 보내주셔서 얼마나 고마웠던지요.

차좋아 2011-02-21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이 왔군요... 저는 몰랐네요 ㅎㅎㅎ 봄 소식 알려줘서 감사해요. 그러고보니 봄이었네요. 나는 왜 따뜻한 겨울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치니 2011-02-21 19:56   좋아요 0 | URL
따...따뜻한 겨울, 이것도 맞죠, 뭐. ^-^;;
추운 봄도 맞을 테고.
기냥, 시 적고 싶어서 헛소리 한 거여요.

차좋아 2011-02-22 12:33   좋아요 0 | URL
치니님... 아침에 추워 혼났어요. 아직 겨울이에요ㅜㅜ

아침에 브이넥에 홑껍데기 윗도리 입고 나온 건 치니님의 봄 소식을 듣고...
ㅋㅋㅋㅋㅋㅋ

치니 2011-02-22 14:40   좋아요 0 | URL
일교차가 큰 것도 봄의 징후라고 우겨봅니다. ㅇㅎㅎ 감기 조심하세요 ~

굿바이 2011-02-22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왕~ 읽으셨군요. 우왕~ :)

치니 2011-02-22 14:40   좋아요 0 | URL
우왕 ~ 누구 덕분에 잘 읽었답니다, 우왕 ~ :)

가시장미 2011-02-23 0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보다 치니님의 앞 글이 더 감동적이네요. -_ㅠ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고,
비워야 또 채울 수 있고,
겨울을 보내야 봄을 맞이할 수 있고...

이히히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제가 좀 우습네요.
봄날은 간다..는 영화가 떠올랐어요.
사실 그래서 엊그제 제가 올린 페이퍼의 부제는
봄날은 온다..로 정했답니다.

올꺼에요. 비록 같은 봄은 아닐지라도.
비록 같은 사랑은 아닐지라도요. :)

치니 2011-02-24 11:38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계절은 어김이 없고, 우리는 보내기 싫어도 보내야 하는 사람,일,계절을 보내고나서 또 새로이 그들을 맞이하고, 그걸 알면서도 못내 아쉬워하고 또 반가워하고. :) 어찌 보면 굴레 같다가도, 가끔은 축복 같은 삶이에요.

네오 2011-02-24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수경 시인님 요근래의 인기인이신가요? 아님 전부터?? 최근 한겨레21에서의 신형철의 칼럼에서 황정은 소설가랑 이분을 리뷰하시더라구여,,아 그런데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 새롭지만 도대체 뭐가 뭔지 잘, 난 안읽히더라구여,,뭐지뭐지 하면서 계속 읽어던,,그리고 겨울날은 아쉽지만 갔습니다,,

치니 2011-02-24 16:37   좋아요 0 | URL
인기인,이라고 할 만한지 그건 전혀 모르겠는데 아마 주목받는 시인? 그런 듯해요. 저야 뭐, 늘상 그렇듯 알라딘이나 지인들의 포스팅을 보고 삘 받아서 보니까 대세는 몰라요. ^_^;;
백의 그림자 - 음, 그럴 수 있다 싶어요. 잘 안 읽힐 수도. 뭐지뭐지, 그런 느낌. 알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