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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평점 :
덥다.
성급한 이들은 근 한달 전부터 가을 냄새가 나네 어쩌네 호들갑들 떨었고, 이젠 한가위도 지냈는데, 그 모든 것이 무색하게, 아무 냄새도 없이 그냥 덥다. 원래 더울 거라고 생각했던 여름보다, 지금 가을인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의 더위가 괜히 미욱스럽고 꼴보기 싫고 견뎌내야 할 무엇이 아닌 것만 같아 더 억울하다.
이런 억울함에도 분개하는데, 계절이 그냥 조금 답지 않아서, 그것도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자연 앞에서도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는 것이 약하디 약해빠진 인간인데,
인종 차별 때문에 겪는 모든 불이익, 그 중에서도 나치가 유대인에게 한 인류 최악의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보거나 들을 때, 나는 차마, 그 억울함의 수위가 - 아니, 단순히 억울함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건 그저 내 언어 표현의 한계다 - 어느 만큼인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의 첫 장을 열 때는 이 아름답고 강인한 영혼을 가진 한 사내가, 나에게 어떤 슬픔을 줄 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슬프다.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읽어서 슬픈 것이 아니라, 그가 이미 죽어서 슬프다. 그것도 자살이라는 선택을 했다는 것이, 나는 슬프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난 시점에서, 왜인지 그가 자살을 선택한 것이 당연해 보였다면, 말도 안되는 합리화일까.
이기적이고 무관심한 대다수에 속한 평범한 인간들이, 미안하다 불쌍하다 따위의 1차적인 감정 같은 걸 주섬주섬 싸들고 끼어들지도 못하게, 두텁고도 부드러운 장막을 치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안개 속 부슬비처럼 들려주는 그의 증언, 그리고 예의 이기적이고 무관심한 대다수에 속했지만 그래도 선량하다 자부하는 인간들이, 아름답다 재미있다 따위의 편안한 감정을 마음껏 풀어헤치며 문장과 문장을 곱씹게 하면서 뛰어난 화학자로써 원소들을 메타포로 삼아 그린 사랑과 우정, 일이 모두 담긴 서사시.
이 두 가지를 대비해서 읽느라, 그리고 철저한 인문계 교육을 받은 고등학교 시절 덕분에 지금은 아예 완전히 잊어버린 화학 원소들과 그 성질들을 어렵사리 떠올리며 읽느라, 첫 줄부터 사랑하게 된 이 책을 덮을 때까지의 진도는 느렸다.
그러나 ,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처럼 떡 하니 내리쬐는 이 더위처럼, 이 책이 내 가슴 가장 밑의 어떤 것을 달궈놓은 뜨거움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고 근 한달 계속 표지만 봐도 눈물이 핑 돌게 한다.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서, 유치한 감상을 치워버리려고 책을 잘 안 보이는 책장 구석에 밀어 넣은 것이 어저께. 지금은 이 글을 쓰면서, 가을이 언젠가는 오듯이, 내 가슴 가장 밑 뜨거움도 다시 서늘해졌다가, 언젠가 여름이 오면 떠올릴 정도로 무감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난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하지만 기록해두련다.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은, 자신이 용서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감히 하나님이 맘대로 그놈을 용서하냐고 울부짖는다. 나는 그 마음이 어렴풋이 이해 된다. 사람들은 용서를 너무 쉽게 말한다.
프리모 레비의 글을 읽고, 용서를 쉽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를 미워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