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가 없는 그림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림만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이유로 너무 많은 것을 그려 놓거나, 반대로 너무 많은 것을 숨겨 놓아 예술성을 강조하는 책들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당연한 얘기지만 단서가 너무 많으면 시시하고, 적으면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 또 많은 경우에 글자 없는 그림책은 어린이에게 읽어주기가 어렵다. 대사를 지어내거나 어린이의 상상을 엿보는 것이 말만큼 쉬운 일이 아니기 떄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글자 없는 그림책의 좋은 점을 상기하라고 나온 것 같다. 놀 친구도 없고 가족도 바빠 홀로 심심해하던 소녀가 마법의 펜을 발견한다. 이 빨간색 펜으로 벽에 문을 그려 열고 들어가면서 여행이 시작된다. 신비로운 숲을 지나자 화려한 왕궁이 나오는데, 거기서 소녀는 새장에 갇힌 아름다운 보라색 새를 구해준다. 그러느라 펜을 잃어버리고 감옥에 갇혔지만 이번에는 새가 소녀를 구한다. 새는 소녀를 보라색 작은 문 앞으로 인도한다. 그 문은 새가 이 세계로 들어온 문, 곧 새의 세계로 연결되는 문인데, 문 밖에서는 보라색 마법 펜을 든 소년이 새를 기다리고 있다. 소년과 소녀는 각자의 펜으로 바퀴를 하나씩 그려 자전거를 만들어서는 나란히 타고 놀러 간다. 물론 소년의 세계는 소녀가 있던 바로 그 현실 세계다. 책을 다시 본다. 첫 장면, 외로운 소녀가 웅크리고 있는 그 골목 한 쪽에 다른 소년들과 조금 떨어진 채 보라색 펜을 든 소년이 있다. 두번째로 책을 읽자 더 많은 것이 보인다. 세번째는 어떨까? 놀랍게도, 더 많은 것이 보인다.

 

 

 

 

 

 

 

 

 

 

 

 

 

 

 

다른 나라 사람이 쓴 "현대의 고전"을 읽을 때면 왠지 입이 나온다. 이 책을 읽을 때도 그랬다. 1900년대 중반의 미국 시골의 풍경도 낯설고, 강박적으로 검소한 셰이커교도의 생활도 낯설다. '내가 이거 알아서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다 알아두면 좋은 교양이지만 우리나라 것도 잘 모르는 처지니 하는 말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왜 우리나라엔 그런 청소년소설이 없나 아쉬운 마음이 들고, 이런 나는 국수주의자인가 회의가 들고, 그보단 내가 좋은 작품을 몰라서 그렇겠지 싶어서 한심하다.

 

오리 입을 하고 '그래 뭐, 로버트가 돼지 잡는 일을 하는 아빠를 사랑한다는 얘기겠지. 로버트가 정성껏 키우는 돼지도 결국 죽겠지. 아빠가 아프다고? 아빠가 세상을 떠나고 로버트가 어른스러워지는 얘기겠지. 끝에 조금 울리겠지.' 하면서 읽었는데 이야기는 정말 그렇게 진행되었지만 나는 아이고 엉엉 울었다. 정말 많이 울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아빠 손을 잡아 입을 맞췄다. 돼지 피가 잔뜩 묻어 있는 그 손에 말이다. 죽은 돼지의 기름과 피가 묻어 있었지만 나는 계속 아빠 손에 입을 맞추었다. 설사 나를 죽이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아빠를 용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170쪽)

 

'사람의 것도 짐승의 것도 아닌' 숨을 쉬며 돼지를 잡는 아빠. 인생이 준 직분을 묵묵히 해나가는 도살꾼 아빠.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들의 돼지를 죽이고 그 손으로 아들을 쓰다듬으며 '어른스럽게 받아들여주어 고맙다'고 하는 아빠. 로버트가 아빠가 자신을 죽인다 해도 아빠를 용서하겠다고 할 때, 나는 감히 그들의 종교 속 신과 신의 아들을 떠올렸다. 그래, 재미없는 배경 묘사를 견딜 가치가 있었다. 충분히 있었다.

 

*

 

무한도전 다큐멘터리를 보니까 유재석이, 노홍철 사건 때문에 멤버들도 힘들고 토토가 촬영도 다시 해야 돼서 위기였는데 오히려 재촬영을 하면서 감동적인 장면이 많이 나왔다면서 "인생은 참 알 수 없구나" 했단다. 난 그 말이 이상하게도 마음에 남아서 자꾸 떠오른다. 참 알 수가 없다. 책 읽는 작은 일 하나도 이렇게 생각과 다르다. 마음을 열고 살자. 좀 엉뚱한 결론이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마음을 열어 두자. 햇볕을 받자. 곧 봄이니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15-03-12 0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재 들어왔다가 네꼬님의 새 글이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얼른 `좋아요` 부터 눌렀어요. 곧 봄이라는데 날이 참 춥고 바람이 많이 불어요. 잘 지내고 계신가요.

네꼬 2015-03-12 00:12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 안녕하세요? 저는 바람에 맞서 먼지를 한 움큼씩 먹으면서 잘 지내고 있어요 (^^)..... (ㅠㅠ) 그래도 봄이 오는 바람이다 생각하고 씩씩하게 지내기로 해요. 감사합니다!

다락방 2015-03-12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돼지가 한마리도 죽지 않던 날, 은 또 뭐지? 하고 갸웃 거리다가 으음, 저 그림책도 타미를 위해 찜, 해보다가 역시 오랜만에 네꼬님 글은 좋구나, 하다가 가요.

안녕?
:)

네꼬 2015-03-12 13:34   좋아요 0 | URL
다락님,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은 왠지 재미 없을 것 같아서 안 읽다가 읽었는데 흑. 그림책은 타미 추천해요. 아주 추천해요!

치니 2015-03-12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 님의 오리 입을 연상하면서 읽으니까 안 그래도 재미있는 페이퍼가 더욱 재미있다는 사실! ㅎㅎ

네꼬 2015-03-12 13:35   좋아요 0 | URL
제가 봐도 꽥꽥 소리가 안 나는 게 이상할 정도로 오리 입이었어요. 뭐 부정을 할 수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