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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이아
권윤덕 글.그림 / 창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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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가 보는 책이라고 해도, 어려운 지식은 어렵게 전하는 게 맞다. 오래 두고 고민해야 하는 내용을 간단히 전하려고 술수를 쓰면 안 된다... 이런 생각을 내가 해낸 거면 평생 잘난척하며 살 수 있을 텐데, 안타깝게도 이건 어린이책을 만드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경전 삼아 곁에 두고 보는 책 『책 어린이 어른』(폴 아자르)에 나오는 얘기다. 어린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전달하는 것과, 손쉬운 설명으로 '아는 것 같은 느낌'을 전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뜻일 것이다. 『피카이아』를 읽으면서 다시금 그 대목을 떠올렸다. 이 책은 어려운 이야기를 담은, 간단치 않은 책이다.

 

한국 그림책 작가중 가장 사랑받는 작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권윤덕과 척추동물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고생물 '피카이아'의 조합은 얼핏 신기하게 보인다. 그림책과 진화론이라니. 게다가 책도 두껍다. 아름다운 표지와 그림이 무게를 좀 덜어주지만, 저 멀리 고생대의 피카이아에서 인간의 기원을 찾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고, 그로써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반추하는 책이 쉬울 리 없다. 그러나 작가는 차근차근 독자를 설득하고 때로는 질문하면서, 어렵지만 생각해보아야 할 것들, 어렵기 때문에 오래 생각해야 하는 것들을 글과 그림으로 풀어놓았다.

 

도서관에서 개 '키스'에게 책을 읽어주는 아이들이 묵묵한 리스너 키스에게 각자 속얘기까지 털어놓는다. '폐지 145킬로그램을 모아서 13500원을 버는' 할아버지와 사는 상민이는 출발부터 불평등한 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 뜨개질을 좋아하는 미정이는 공부밖에 모르는 엄마의 압박 때문에 올이 풀리듯 자기 존재가 사라지는 것만 같다. 폭력적인 부모의 무관심에 성폭력에 노출된 윤이는 목소리가 사라지는 듯하고, 정리해고 위기에 놓인 아빠 때문에 걱정이 많은 채림이는 헤어진 가족이 다시 모여 살기를 소망한다. 고기를 좋아하는 강안이는 이따금 친구의 말을 떠올리며 육식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 아이들에게 '피카이아'를 알려준 것은 혁주다. 혁주는 만난 적 없는 엄마를 그리워하다, 책에서 '피카이아'를 처음 알게 되었다.

 

"고생대 캄브리아기에 생겨났던 많은 동물들이 5억 3천만년 전 갑자기 멸종했다. 어떤 종은 멸종하고 어떤 종은 살아남은 원인이 무엇일까? 훌륭한 가시를 가졌고 개체 수도 많았던 마렐라, 몸집이 크고 먹이를 부수어 먹을 수 있는 턱을 가졌던 최고의 포식자 아노말로카리스는 멸종하고, 왜 피카이아가 살아남았을까? 피카이아는 모양이 특별하지도 않고 개체 수도 많지 않았는데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어쨌든 그렇게 많은 동물들이 멸종한 시기를 피카이아는 이겨 냈고, 그래서 인간이 생겨날 수 있었다." (112면)  

 

피카이아가 그랬듯이, 남보다 뛰어나야만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는 걸 상민이는 어렴풋이 생각한다. 뜨개질이 그렇듯 경쟁보다는 협동이 좋기 때문에 미정이는 친구를 찾는다. 인간은 스스로 치유하기 때문에, 윤이는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는다. 무리지어 사는 흑두루미를 보며 가족을 떠올리는 채림이도, 고기는 먹지만 '육식'이 무얼 뜻하는지는 생각하는 강안이도 각자 고민을 안고 그것을 피하지 않으면서 자기 생각을 다져간다. 역시 피카이아가 그랬듯이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살 이유가 된다. 어렵지만 놓쳐서는 안 될 생각이다.

 

작가는 진중한 주제, 어쩌면 논란이 될 수도 있는 여러 주제들을 정면으로 다루면서 독자 역시 피하지 않기를 주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를 옥죄지 않는 것은 차분한 톤의 아름다운 그림 덕분이다. 독특한 글 텍스트 배열 방식도 독자가 숨을 고르며 읽어갈 수 있게 한다. 책 뒤에 실린 작가 인터뷰와 참고 그림도 작품 이해를 돕는다. 다만 군데군데 어려운 서술이나, 어린이들의 대사에 작가의 목소리가 묻어나는 점이 아쉽다. 

 

이렇게 '어렵고 두꺼운 그림책'을 누가 읽으면 좋을까? 작가의 말에 힌트가 있으니, 이 책은 읽어주는 그림책이 아니라 '읽는' 그림책, 어린이와 어른 누구나 읽을 만한 책이다. 읽는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방식도 수준도 다를 것이다. 어린이가 혼자 읽는다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해볼 만한 책이다. 아름다운 것들이 종종 그렇듯, 어렵기 때문에 문득 더 아름다운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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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9-25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 리뷰는 오늘 내가 하루종일 읽은 글 중에서 가장 좋은 글이에요. 네꼬님이 신간평가단을 해서 무척 좋아요. 어쨌든 정기적으로 글을 꾸준히 써줄테니까. 다음에도 꼭 신간평가단 해주도록 해요, 알았죠?

나도 읽어볼래요.

네꼬 2013-09-25 23:52   좋아요 0 | URL
다락님, 좋은 책인데 리뷰 쓰기가 어려웠어요. 으아 나 똑똑했으면 좋겠다. 내 지식과 언어의 한계를 느끼며 잠깐 절망했다가, 에이 뭐 그럴 것까지야, 하고 씩씩하게 마무리해보았어요. 근데 다락님이 좋다니까 좋군요. 껄껄껄.

레와 2013-09-27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맙소사.. 이 리뷰 정말 좋잖아요!!
네꼬님 나 이 리뷰에서 위로 받았어요. 어디라고 콕 찝어서 말 할순 없는데. 읽고나니깐 뭉쳐있던 뭔가가 툭툭 터졌어요. 고마워요.^^


네꼬 2013-09-30 20:58   좋아요 0 | URL
이거 참.. 이럴 때 의연하게 껄껄 웃고 말고 싶지만... 이런 칭찬을 받으면 저도 모르게 상모를 돌리며 꽹가리를 치게 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