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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응의 건축 - 정기용의 무주 프로젝트
정기용 지음 / 현실문화 / 2008년 10월
평점 :
이 책을 읽기 전에 나는 정기용이라는 이름을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적의 도서관들을 설계했고, 회자되는 건물들도 지었다 하니 아마 여기저기서 이름을 들은 적은 있을 텐데도 그랬다. 한때 서현 선생의 건축 관련 책들을 좋아했던 것 말고는 건축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다. 그러니 이런 책이 있는 것도 몰랐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림일기 : 정기용 아카이브전'을 본 친구가 트위터에 올린 사진을 보고 주말 나들이 삼아 미술관에 가기로 결심했고, 그 참에 정기용 선생 관련 책들을 찾아보느라 이 책을 알게 됐다. 친구가 올린 사진은 선생의 스케치 일부였다. 거기엔 이런 메모가 달려 있었다. '좁은 공간에 사는 사람들에게 큰 산 큰 하늘 큰 빛 큰 바위를 보고 살게 하자.'
이 책은 '건축계의 공익요원'이라는 별칭을 얻은 정기용이 10여 년 간 전북 무주를 오가며 말 그대로 한 지역을 설계한 기록이다. 책 뒤에 실린 좌담에서 농담처럼 얘기 되었듯이 정경유착이라든가 건축가의 전횡 같은 것을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매우 낮은 수준(짐작컨대 손해 수준)의 비용을 받는 대신 건축가의 열정과 사랑, 실험을 고스란히 쏟아 부은 독특한 프로젝트였다. (이번에 알게 된 것이지만) 시대와 사회, 특히 농촌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탐구하면서 발언하고 운동해온 건축가다운 행보이기도 했다.
영세민의 집값을 낮추기 위한 방책으로 흙건축을 연구하던 정기용은 그 인연으로 진도리마을회관을 지었는데, 그 상량식에서 당시 무주군수를 만나 무주 프로젝트의 싹을 갖게 됐다고 한다. (마을회관 상량식에서!) 이후 십여 년, 정기용은 군수를 비롯한 공무원들과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대치하면서 무주의 여러 공공건축을 설계했다. 무주가 작은 군이니, 공공건축이라 해도 대형 경기장이라든가 시청 신축 같은 일이 아니다. 면사무소, 청소년회관, 농민의 집, 된장 공장, 요양원, 버스정류장 등 주민의 생활과 직결된 보통의 건물을 설계한 것인데, 각각을 지을 때 에피소드들이 다채로우면서도 정직하게 서술되어 있어 읽는 재미만도 쏠쏠하다. 무엇보다 설계할 때 건축가의 이상과 실험정신보다 주민의 삶과 요구를 우선으로 한, 그러나 완전히 고집을 꺾지도 않은 정기용의 성품이 소박한 문장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를테면 면사무소를 지을 때 주민들은 "면사무소는 뭐 하러 짓는가? 목욕탕이나 지어 주지." 라며 심드렁했단다. 평생 농사로 안 아픈 데가 없는 마을 노인들이 몸 뜨끈히 담글 목욕탕이 없어 옆 동네까지 차를 빌려 가야 된다는 말에, 면사무소에 목욕탕을 마련한 이야기는 여러 번 다시 읽었다. 유지비를 줄이기 위해 홀수날은 남탕으로, 짝수날은 여탕으로 쓰고 있다고 한다. 공설운동장에서 열리는 군내 행사 때 주민들이 하도 참여를 안 해 고심하던 군수가 이른바 VIP석에만 차양이 있고 주민들은 뙤약볕 아래 스탠드에 앉기 때문임을 알고 등나무를 심은 이야기도 있다. 정기용은 이 등나무가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소박한 지지대를 했다. 이제 등나무 넝쿨이 우거진 공설운동장은 산책 코스로, 쉼터로 사랑받고 있다 한다. 리노베이션으로 주변이 정리된 군청이라든가 풍경을 끌어안는 방식으로 간결하게 설계된 버스정류장 이야기도 좋다.
그런데 더 좋은 것은, 이 책이 프로젝트의 성과만을 기록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노인요양시설을 침대마다 독립된 방 비슷하게 꾸민 것은 사생활을 존중하는 설계였으나, 요양원 운영 인력이 부족한 현실에서는 침대들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 결코 이전보다 좋다고 말할 수 없다 한다. 청소년수련관은 청소년 수가 적어 취지와 달리 잘 활용되지 않고 있고, 감리를 하지 못한 식물원은 오히려 주변 경관을 해치듯이 자리 잡아 버렸다. 또 완공 이후 임의로 덧댄 공사가 건물을 망친 경우도 있다. 정기용은 자신의 성과를 자랑하듯 늘어놓지 않고, 지나치게 겸손한 언어로 포장하느라 옆길로 새지도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후학과 사회를 위한 것이지만, 마치 혼자 있는 방에서 쓰인 결연한 일기 같다.
건축가의 이런 태도 때문일까. 책을 만든 모양새도 그렇게 성실하면서 객관적이다. 설계도면과 메모, 완공된 사진들이 적절한 캡션과 함께 잘 정리되어 실렸다. 책 뒷부분에는 이 프로젝트의 성과와 한계를 짚는 좌담이 실렸다. 2007년말 희망제작소에서 진행된 이 좌담에는 강내희, 박원순, 홍성태 등 각계 연구자들이 함께했는데, 이들의 발언들에 밑줄 그을 부분이 많다. (2007년말....) 사람과 사회, 지역, 특히 농촌을 향한 건축과 사회운동이 어떻게 결합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한편, 이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드러난 문제점도 조목조목 짚었다. 이어 이유주현 기자가 실제 주민들을 인터뷰한 내용도 실렸다. 새로운 건축들이 주민의 삶에서 실제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냉정하게 짚은 것인데, 다른 면사무소까지 번진 '목욕탕문화'에 대한 칭찬뿐 아니라 아름답긴 하지만 너무 얇아 역할을 다 못하는 전통시장 천막에 대한 불만, 인기에 비해 너무 작게 지어진 천문대에 대한 아쉬움 등 생생한 주민의 목소리를 솔직히 담았다. 나는 무엇보다 정기용의 설계도를 들고 동분서주한 사무실의 실무자 인터뷰가 인상 깊었다. 무주라면 치를 떨고 도망가고 싶다고 하면서도 선생의 스태프라는 사실이 더할 수 없이 자랑스럽다고 고백하는 그 인터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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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되는 전시는 2011년 작고한 건축가 정기용의 건축도면과 관련 자료들로 꾸며졌다. '국립' 미술관이면서도 외곽 산 밑에 자리잡아 찾아가기 어려운 곳, 심지어 놀이동산이 옆에 딱 붙어 있어 어수선한 곳. 모르긴 몰라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은, 건축은 우선 건축물이 들어서기 전 '공간'과의 감응에서 시작한다고 했던 선생이 생전에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전시에서는 아파트가 국토를 점령하고 농민에겐 여전히 땅이 없는 이 나라를 어찌하면 좋겠냐는 선생의 강의를 영상으로나마 들을 수 있다. 기증받은 것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지만 그 양이 방대해 관람객을 압도하는 자료들을 볼 수 있다. 복잡한 도면, 감정이 느껴지는 드로잉과 스케치, 꼼꼼한 메모들은 관람자에게 '감응'을 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