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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할머니의 비밀 - 초등학교 저학년 동화 ㅣ 동화는 내 친구 55
타카도노 호코 글, 지바 지카코 그림, 양미화 옮김 / 논장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린이와 노인은 통한다고들 한다. 어린이들은 세상의 잣대를 아직 다 알지 못해서 본의 아니게 놀라운 통찰력을 보일 때가 있다. 반대로 (어떤) 노인들은 오랜 세월 세상의 잣대에 다치기도 하고 그것과 싸우기도 하고 지키려 애쓰기도 하면서 마침내 자유로워져서 지혜와 진짜 통찰을 얻기도 한다. 멋진 일인 것 같다.
84세 에라바바 선생님은 옷 연구가로, 옷 만드는 방법이나 젊어 보이는 차림새를 연구하고 가르쳐서 아주머니 할머니 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그런데 에라바바 선생님의 진짜 연구는 바로 진짜로 젊어지는 옷을 만드는 데 있었고 어느 날 한 겹 입을 때마다 한 살씩 젊어지는 옷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얇고 투명한 속옷을 여러 벌 겹쳐 입으면 원하는 나이로 돌아간단 말씀. 에라바바 선생님은 점찍어 둔 제자 효코르 할머니(68세)에게만 이 사실을 알리고 모험을 시작한다. 효코르 할머니는 한 오십살만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에라바바 선생님은 단호하다. "한 번 더 아이가 되어서 마음대로 놀 수 있는데, 물구나무 서기 하나 하지 못하는 중년 아줌마가 되는 걸로 좋다니, 바라는 게 그렇게 작아서야 원, 뭐가 제대로 되겠어요?"(27쪽)
이렇게 해서 여덟 살로 돌아간 두 할머니는 겉으로는 교양 넘치지만 허영뿐인 아주머니들을 골탕먹이기도 하고, 아이들 마음은 생각하지 않고 무섭게 합창 연습을 시키는 선생님을 혼내주는 등 소동을 벌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두 할머니가 두 꼬마가 되어 어린시절을 다시 한번 만끽하는 것이다. 다시 어린이가 되자마자 "조금 전까지 그러고 싶다고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31쪽)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폴짝폴짝 뛰게 되고, 서로 간지럽히고 꺅꺅 소리 지르면서 뛰어다니면서 별것 아닌 일에 웃음을 터뜨리는 두 꼬마는 바로 보통 아이들이다. 길을 걸을 때도 가만히 지나가는 법이 없고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역할극을 하고 저희들끼리 깔깔거리는 어린이들, 작가는 그런 것이 어린이에게는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는 걸 말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공원에서 실컷 놀던 두 어린이가 인형극을 보러 들어간 장면을 나는 되풀이해서 읽었다.
"신 나게 뛰어논 뒤에 아담한 홀에 들어가 줄을 맞추어 의자에 앉으니 마음이 따스했습니다.(...) 마침내 인형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제목이 '치콜의 모험'인데, 씩씩한 남자 아이 이야기였습니다. 사건이 연이어서 일어났습니다. 숨고, 발견되고, 거의 죽을 뻔하다가, 촐랑대다 실패하고, 나쁜 사람과 만나고, 도망치고, 붙잡히고, 이제 희망이 없다고 실망하고.... 그때마다 모두들 손에 땀을 쥐고 응원했습니다. 무서워서 눈을 가리다가, 배를 쥐고 웃기도 했습니다. 날이 저물고 해가 뜨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치콜은 지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도 지치지 않았습니다. 치콜과 같이 긴 모험을 했습니다. 나쁜 사람을 전부 물리치고, 보물을 손에 넣었습니다. 길고 즐거운 모험이 끝나자, 모두들 가슴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부풀어 오른 기분은 박수 소리가 되어 바깥으로 흘러넘쳤습니다."(121-122쪽)
얼마나 따뜻한 광경인가. 아이들은 이야기에 빠져서 자기도 같이 모험을 한다. 제 모험이기 떄문에 주인공이 지치지 않는다면 자기도 지치지 않는다. 이런 공감 역시 어린이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폐장 위기에 놓인 극장을 구하기 위해 두 꼬마가 그런 어린이의 본성을 이용(?)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스포일러니까 밝히지 않겠어요)
에라바바 선생님이 만들어낸 옷이 '마법의 옷'이 아니라 본인 설명 대로 '발명한 옷'이라면, 이 책에는 어떤 마법도 등장하지 않는다. 어린이가 된 두 할머니가 벌이고 겪는 모험들은 모두 자기들 힘으로 해내는 것들이다. 고심해서 편지를 쓰고, 적당한 사람에게 부탁을 하고, 필요할 땐 '삽질'을 해가면서 자기 몸으로 사건을 만들고 돌파한다.
"오늘 대작전은 할머니 두 사람에게는 너무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택시를 타고 가고 싶었지만, 손수레를 끌고 가야만 했습니다."(148쪽)
모험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러나 이렇게 고단한 대작전 끝에 두 할머니에게 조그마한 마법이 일어난다. 할머니들이 모르는 사이, 비밀 옷을 입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아이들처럼 즐겁게 말하고 거리낌없이 행동하게 된 것이다. 조그마하지만 더없이 따뜻한 보상이다. 이따 다시 만나서 놀 약속을 잡는 두 할머니를 보여주는 엔딩에서 나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재미와 감동이 있는 책. 나는 동화책에 대한 더 좋은 찬사를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