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들통 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다같이 찐만두가 되어가는 날들. 누군가는 "끝을 알고 견디고 싶다. 멸망의 날짜를 알려 달라!"고 울부짖고, 누군가는 자동차 보닛에 계란후라이를 해보는 날들. 사람도 나뭇잎도 다같이 울적한 얼굴로 축 늘어져 고통을 견디는 날들. 그런데 나는 사무실에서도 집에서도 에어컨을 마구 틀어 대고 있다. 나는 절제도 모르고, 환경에 해를 끼치며, 거리를 더 덥게 하고.. 하여간 나밖에 모른다... 그래, 나밖에 모른다! 나란 여자 이기적인 여자.

 

에어컨의 자애로운 품에 안겨 밀렸던 책읽기를 몰아서 하고 보니 소설, 동화, 그림책, 에세이가 뒤죽박죽. 그래, 내가 언제는 질서정연했다고... 나란 여자 산만한 여자.

 

 

 <킁킁이가 간다 1, 2>라는 굉장한 책을 읽었다! 우리나라 야생동물의 생태를 알려주는 지식 그림책인데, 설명은 쉽고 그림이 엄청 좋다. 동물마다 심플한 그림 -> 호기심을 끄는 짤막한 만화 -> 아름다운 그림과 글 -> 생김새와 생태를 파헤쳐 보기 -> 마무리 만화 -> 그리기 순서로 알게 된다. 초등 1~2학년 아이들이 보면 좋을 것 같은데, 너무너무 재미있기 때문에 전학년이 봐도 좋고, 모든 좋은 어린이책이 그렇듯이 어른이 봐도 된다. 실은 나도 몇 번이나 여기 나오는 삵을 따라 그렸다. 엄청 잘 그린다, 나. (V)

 

'앵거스 시리즈'를 샀다. 오래 전에 보고 좋아했었는데, 요새 강아지에 대한 사랑이 불타오르고 있어서, 리퍼브도서 매장에 간 김에 확 사버렸다. 집에 와서는 그동안 이 책을 안 보고 어떻게 살아나 싶게 읽고 또 읽었다. 조그만 강아지 앵거스는 호기심에 오리들을 쫓아다니다 된통 혼나지만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 시간은 딱 삼 분. 늘 제것을 빼앗는 고양이를 미워하지만 막상 안 보이면 찾고, 때로는 세상이 궁금해 집을 나섰다가 길을 잃기도 한다. 그렇다, 바로 어린이의 상징. 그림은 딱 앵거스의 키 높이에서 그려져, 강아지 특유의 자세와 행동이 사실적으로 전달된다. 그런데 이 책이 1930년대에 나왔다는 거.... 미국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이런 책 읽고 자랐다는 거....

 

*엇, 짧게 써야 되는데

 

<꿈꾸는 징검돌>은 화가 박수근의 어린시절 어느 날을 그림책 작가 김용철이 이야기로 복원한 그림책이다. 징검돌에 그림을 그리느라 삼매경에 빠진 소년 수근의 이마 위 물그림자가 얼마나 예쁜지, 나는 우리집 거실에 그 장면을 펼쳐 며칠동안 전시(?)해 두었다.

 

최나미 단편동화집 <천사를 미워해도 되나요?>에는 삐딱한(?) 동화들이 실려 있다. 보통'동화'에서는 조연으로 나오거나 안 나올 아이들이 주인공이고, 보통 동화에서는 살짝 문제제기가 되거나 안 될 (응?) 이야깃감이 주제가 된다. 이를테면 표제작 '천사를 미워해도 되나요?'의 주인공은 지각도 하고 가끔 선생님한테 말대꾸도 하고 친구랑 다투기도 하는 보통 아이인데, '천사표' 친구 때문에 상대적으로 나쁜 애가 되는 곤경에 처한다. (이거, 제 얘기예요?) 작가가 아이들한테 "너 이런 적 있었지?" "너도 이런 적 있었지?" 하면서 "그런 꽁한 마음 원래 다 드는 거야. 괜찮아. 그리고 (비밀인데) 꼭 착한 아이 안 돼도 돼. ㅋㅋ"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완전 좋다 이 책.

 

* 앗, 짧게 짧게.

 

<놀기 과외>는 사실 쓸 말이 없는데.. 이건 그냥 내 기분인데, 이상하게 우리나라에서는 프랑스 동화들이 과대평가되어 소개된 것 같다. 일부의 어떤 동경 때문은 아닐까? 근거는 없고 진짜 그냥 기분.

 

 

 

 

 

 

이 유명한(!) 책을 그래, 엄청 뒤늦게 읽었는데 엄청 이상했다! 1988년에 서양 사람들은 막 이런 야한 책 읽으면서 막 좋아했던 거야? 음흉한 사람들!

 

 

 

 

 

성석제라면, '고수가 돌아왔다'는 담백한 한 줄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입담계의 아트이자 재담계의 클래식'이라는 광고문구가 싫었는데, 그게 책을 사서 보니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의 표현이어서 저으기 놀랐다. 일개 독자이자 성석제의 오랜 팬으로서는 그런 표현이 이 작품을 단순히 '말 잘하는 사람이 쓴 글'처럼 느끼게 하는 듯해 못내 못마땅하다. 오히려 표지에 인용된 그림(띠지에 가려서 잘 안 보이는!)이 작품의 성격을 더 잘 보여준다. 장편소설답게, 진경산수화처럼 기품있게 그려진 풍경, 물밖과 물속, 강과 산에서 펼쳐지는 크고작은 전투들, 여럿의 욕망을 촘촘하게 엮어내는 찰진 서사와 대사. 그래서 웃길 때 진짜 빵 터지는 거다, 성석제 소설은.

 

 다 읽고 나서 혼잣말을 해봤다. "어떡하지, 다들." 크고 작은 비극, 오래됐거나 새것인 비극, 혼자의 것이거나 가족의 것인 비극. 한숨을 쉬며 읽어가면서 주인공들에게 마음 속으로 계속 잔소리를 했다. 그런 남자라면 귀싸대기를 때려야지, 왜 곱게 돌아서! 그러게 만삭의 몸이면서, 그 반지 잃어버리고 말지 거기가 어디라고 내려가! 어쩌겠어 그냥 짐 챙겨서 나오지, 왜 버티다가 집에 물이 차도록 있어.... 하지만 마지막 작품 '서른'에서만큼은 나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불행의 피라미드.

 

 

<1945, 철원>은 보기 드문 청소년역사소설. 십대는 제 삶만도 언제나 격랑 속에 있는 법인데, 해방의 그날은 어땠을까. 양반집 종으로 살던 경애, 공산주의 사상을 갖고 있으나 양반집 막내 도련님인 기수, 양반의 자부심으로 살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집안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은혜.. 아이들이 몸으로 겪은 해방과 이후의 혼란은 생각보다 거대하고 충격적인 것이었다. 읽노라면 중간에 그만 두기 어렵고 몇 번쯤 놀라게 된다. 극중 어떻게 해도 이해가 안 되는 기회주의자이자 사기꾼 나쁜 자식이 하나 나오는데 그 이름은 기영박. 나쁜 자식 기영박..... 다분히 누군가 연상되는 이름이잖아.

 

 

 

*

 

 

 

 

 

 

 

힐링 캠프에 안철수가 나온 날 밤, 나는 남편한테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하고 물었다. 문재인은 어떻게 해? 안철수는 대선 나오려면 당 만들어야 될 텐데, 지금부터 해도 될까? 만약에 안철수 쪽으로 단일화되면 민주통합당은 후보 없이 선거운동 하는 셈인데 시장 선거도 아니고 대선인데... 그러다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다. "노무현 보고 싶네." 그렇게 말하니 왈칵 그런 마음이 올라왔다. 그가 그렇게 떠나지 않았다면 우리가 지금 이런 이야길 하게 됐을까? 어찌 됐든 노무현의 명예는 많이 다쳤을 거고, 우린 계속 그를 욕했을 거고, 누가 돼도 똑같다고 쓰게 웃었겠지. 지금처럼 사람 귀한 줄 모르고 내 일처럼 걱정하진 않았겠지. 그러고 보면 그 사람, 너무 불쌍해. 어떻게 한 사람한테 그런 운명이 주어졌을까? 너무 불쌍하고, 너무 미안해.

 

안철수에겐 생각이라는 말이, 문재인에겐 운명이라는 말이 마침 더 어울린다. <안철수의 생각>은 대답하는 책이라기보다 묻는 책이었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무얼 짚어야 하는지, 이 대목에서 나(안철수)의 생각은 이런데 너(독자)의 생각은 어떤지.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인데 그런 나를 지지한다는 건지. 그런 걸 미리 밝혀주어 고맙고, 덕분에 나도 몇 가지 생각을 해보게 됐다. 그가 정말 대통령이 된다 해도, 무슨 생각을 갖고 어떻게 하려는 건지 알 수 있어서 찬성도, 반대도 할 수 있을 듯하다. 좋은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아직까지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이미 진흙탕 싸움을 시작한 문재인 쪽에 더 마음이 간다. <안철수의 생각>에 비하면 <문재인의 운명>은 개인적인 에세이처럼 보이지만, 그가 살아온 길이 결국 그의 생각을 말해주는 것이니 그것으로 되었다. '대한민국 남자'니 하는 카피로 사람들을 걱정시키기도 했지만, 그는 남의 말을 들었고 고쳤다. 이후로도 그의 팀은 사실 미덥지 않다. 그런데 어쩔 수 없잖아. 노무현에게는 문재인이 있었지만, 지금 문재인에게는 그런 문재인이 없으니까. 이 가을이 어떻게 지나갈지 모르겠지만, 두 분 모두 파이팅이에요. 나도, 내 친구들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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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2-08-04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왈왈! ㅎㅎ 나도 따라해봐요. 우리 두리 너무 보고싶어요. 엉엉.

네꼬 2012-08-06 10:08   좋아요 0 | URL
헤헤, 치니님이 왈왈 하시니까 완전 그럴듯해요 (응?) 으헝. 저도 그 두리가 보고 싶군요. ㅠㅠ

레와 2012-08-05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어컨 없이 살수가 없어요. 엉엉 ㅠ ㅠ

네꼬 2012-08-06 10:09   좋아요 0 | URL
맞아 맞아, 누구 말마따나 원래 인류는 멸망해야 하는데, 에어컨 덕에 살아 남은 것 같아요. ㅠㅠ

moonnight 2012-08-07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짧게 짧게. 는 안 돼요. 네꼬님은 길게 길게 글을 써 달라. ^^

네꼬 2012-08-09 11:23   좋아요 0 | URL
재밌게 길게 써야 되는데 나는 꼭 페이퍼를 쓰면 잔소리가 많아지더라고요.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