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여름 아침에
다니카와 슌타로



거인이 되고 싶다
이 산 저 산을
이 구름을
이 푸른 하늘을
이 여름 아침을
양팔로 받아들이고 싶다
거인이 되고 싶다
산 저편의 행복을
손가락으로 집어서
호주머니에 넣고
밤으로 향하는
모든 그리움을
작은 새처럼
잡아버리는
거인이 되고 싶다
하루 한 번 울리는 심장
영원을 바라보는 눈동자
태양에 화상 입은 손가락 끝
일기에는 역사를 기록하여
혁명의 비참을
배신의 영광을
빠짐없이 양손으로 건져내는
거인이 되고 싶다
암흑의 우주에 몸 던져
흘러가는 은하에서 수영하고
양팔에 지구를 안고서
묵묵히 눈물을 흘리고 있는
영원히 무력한
거인이 되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한 마리 개미가 되고 싶다
달개비꽃 미로에서 끝없이 헤매며
언제까지도 계속 헤매고
그래도 좋다
이 아름다운 여름 아침에


-『이십억 광년의 고독』에서 

  

『이십억 광년의 고독』은 아름답고 천진한 시집이다.
「아름다운 여름 아침에」가 보여주듯이 시공간을 마음대로 오가면서 때로는 우주를, 때로는 공책을, 때로는 슬픔을, 어떤 때는 책을
내키면 지우개와 연필을 사색하는 시인의 감각이 편편이 놀랍다.  

하루 한 번 심장이 울리는, 지구를 안고 우는 거인이 되거나 아니면 달개비꽃 미로를 언제까지고 헤매는 개미가 되고 싶다는 게 얼마나 광활하고 또 아담한지.  

마음이 개미만큼 작아진 요즘 자꾸만 생각이 나서 오래간만에 시집을 찾아보니 포스트잇을 붙여 놓은 시가 열 편. 시집 하나에서 다섯 편 건지면 성공이라 생각하는 나에게는 귀한 시집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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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0-05-16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저도 시집 하나에서 다섯 편 아니 두어 편만 좋아도 당장 그 시집은 잘 샀다 싶어져요. 시라는 게, 그런가봐요. :)
아참, 이창동 감독의 시 보고 싶은데 못 보러 가고 있네요, 힝.

네꼬 2010-05-17 09:35   좋아요 0 | URL
맞아요. 한 시집에서 시 다섯 편 좋아하기가 어렵죠. 그러니 저 시집은 성공 중에서도 대성공 쪽에 가까워요. 근데 그 영화요, 어휴, 감당할 수 있을까요? (이창동 감독님은 너무 좋지만.)

다락방 2010-05-16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답고 천진한 시집 읽느라 알라딘에 뜸한거에요? 네?
그렇다면 내가 아름답고 천진한 시를 몇편 뚝딱 써내면, 자주 와서 얼굴 보여주는거에요? 네? 대답해봐요! 대답해 보라구욧!!

네꼬 2010-05-17 09:35   좋아요 0 | URL
으... 응? 다락님은 언제나 아름답고 천진한 시를 쓰잖아요. 페이퍼도 그렇고 리뷰도 그렇고. 미안해요 미안해, 뭘 한다고 이렇게 바빴누... ㅠ

비로그인 2010-05-16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십억 광년의 고독이라니...
좀 심한데요.

그나저나 잠수가 네꼬님의 특기?

네꼬 2010-05-17 09:37   좋아요 0 | URL
읽어보면 전. 혀. 심하지 않습니다. 음, "이십억 광년의 고독에"에 이어지는 대목이 "나는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거든요. (^^) 유머가 가득해요.

제까짓게 뭐라고 잠수 씩이나겠습니까. 그냥 게으름이죠. ㅠㅠ

마노아 2010-05-17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진한 얼굴로 돌아와준 네꼬님이니까 오래 기다리게 한 거 용서할게요. 네꼬님이 그리웠어요.^^

네꼬 2010-05-17 22:04   좋아요 0 | URL
앗, 마노아님한테 혼날까봐 서재 가서도 기웃대다 나와버렸네. 용서해주셔서 고마워요. ㅠㅠ

paviana 2010-05-17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해 놓으시고 ......
넘해요 넘해요 (뒤돌아 울면서 뛰어감)

네꼬 2010-05-17 22:05   좋아요 0 | URL
덥석! (이것은 파비님 어깨를 붙잡는 소리.)
파비님, 날 두고 어딜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