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어떤 아동문학평론가가 늘 하는 말인데, 동화작가는 두 종류의 눈을 갖고 있어야 한단다. 하나는 아이들과 똑같이 보는 눈, 또 하나는 어른인 작가로서 세상을 보는 눈. 동화를 쓰는 사람의 태도에 대해서는 많은 견해가 있다. 어른의 시선을 일체 배제하고 무조건 아이들과 '눈높이'(난 이 말이 싫다)를 같이해야 한다는 사람들은 아이들 눈치보기가 쉽다. 아이들의 동심을 지켜줘야 한다며 동화에서 현실을 지워버리는 사람들은 모두가 알듯이 동심천사주의에 빠진다. 그 반대로 아이들에게 현실을 똑바로 보게 해야 된다면서 '악역'을 자처하면서 분노의 자판을 두드리는 사람들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들이 위험한 중 제일 위험한 부류의 작가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 평론가의 말이 좋다. 소설가나 시인, 기자나 선생님과 동화작가가 다른 점은 두 개의 정직한 시선을 가져야 된다는 거다. 그래서 동화가 좋고 그래서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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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어린이』 2009년 겨울호 '창작'면에 '중학생을 위한 소설' 다섯편이 실렸다. 그중 이금이의 「열네살, 나이에 관한 고찰」은 명불허전 작가의 내공이 느껴지는 딱 좋은 '중학생을 위한 소설'이다. 동화와 소설의 경계에 선 아이들의 세계를 역시 판타지와 현실을 교묘하게 교차시키는 방식으로 따뜻하고 깔끔하게 그렸다. 이금이 작가의 팬이라면 단박에 알아볼 만한, 자신의 작품에 대한 농담도 있다. 작가가 가진 '두 가지 눈'이 참으로 미덥고 고맙다.
그런데 내가 지금 이 페이퍼를 쓰는 것은 바로 김중미의 「꿈을 지키는 카메라」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괭이부리말 아이들』 『종이밥』의 김중미 작가는 이른바 현실주의 아동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작가이고, 또 '기찻길옆공부방' 아이들과 하는 완벽한(내가 봤다, 정말 완벽하다) 인형극으로도 이미 팬이 많다. 이 작가의 작품은 감동이 있고 정치적으로 옳다. 나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방심하고 읽다가 그만, 눈물 콧물을 다 뺐다. 처음 읽을 때도, 다 읽고 나서도, 혼자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울었다. 절박한 현실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친구와 친구 엄마를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든 주인공의 말, "눈물 때문에 초점이 잘 맞지 않는다." 이 문장의 진심에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그렇다. 울지 않고 보기만 해도 안 된다. 우느라고 못 봐도 안된다. 이 시대를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눈물 때문에 초점이 맞지 않아도 끝까지 카메라를 내려놓지 않는 것이다. 나는 지금 여기에 아주 긴 단락을 썼다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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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두 가지 눈을 가져야 된다고 했겠다.
김중미의 「꿈을 지키는 카메라」는 어떤 면에서는 그런 두 개의 눈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 애쓰기보다 '어른인 작가의 눈'에 솔직한 작품이다. 균형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데도 이 작품이 나를 울린 것은 작가가 열네살의 아이들에게 '너의 눈'을 가지라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제 막 동화의 세계를 통과한 아이들에게 이제 '너의 카메라'를 가지라고, 우는 한이 있어도 그걸 내려놓으면 안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렇지만 열네살의 아이들은 더욱 그래야 된다. 2009년 열네살을 통과하는 아이들은 더더욱. 열네살과 열네살을 지나온 모든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