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이 글을 쓰려고 마음 먹었을 때부터 울었어요. 기분이 너무 이상해요. 꽤 울었는데도 다 운 것 같지가 않아요. 이러다 배우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언제 어디서든 마음만 먹으면 울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한 때는 당신에게 돼지저금통을 보내던 때가 생각나서 그랬고, 어느 때는 당신이 손녀의 얼음과자를 휴지로 싸던 모습이 생각나서 그랬고, 어느 때는 전직 대통령을 보러 '이만 오천 원씩 걷어서' 관광버스 빌려 온 분들이 얼굴이 새카맣고 몸이 조그마한 촌로들이었다는 게 떠올라서 그랬고, 나중에는 그냥 당신만 떠올려도 그렇게 눈물이 났어요.

당신이 떠난 뒤로 쏟아져나온 익살맞고 친근하고 엉뚱한 수많은 사진 중에서 나는 이 사진을 제일 좋아해요. 저 아이 표정 말이에요. 나는 알고 있어요. 아이들은 이런 표정을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않는다는 걸요.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바로 저런 표정으로 답해줄 사람에게만 저렇게 거리낌없이 안길 수 있다는 것도요. '설정'으로는 나올 수 없는 이런 장면들을, 왜 이제야 보았을까요.
그래서 말인데 너무 부끄럽지만 꼭 해야 될 말이 있어요. 설령 내가 뭘 잘 알고 그걸 근거로 당신을 비판했다고 치더라도, 당신이 고향 마을로 내려간다고 했을 때 그렇게 매정하게 굴 건 없었어요. 나라를 이 꼴을 해놓고 끝까지 저 혼자 멋있는 척한다면서 야박하게 당신을 밀어낼 것까진 없었어요. 그냥 그쯤 거리를 둬야 내가 이성적인 거라고 쿨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정치인이니까 그래도 되는 줄 알았어요. 변치 않는 사람이라고 좋아해놓고, 대통령답게 변하지 않는다고 미워했어요. 그 사실이 너무 부끄러워요. 당신을 한때 사랑했다 미워했던 이들 중에는 여전히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나는 비판도 비난도 정당하지 못했어요. 그러니 고백을 해야 돼요. 정말로 미안해요.
당신을 대통령으로 뽑기 전날 밤, TV에서 당신 목소리를 들었더랬죠. "오늘 밤이 지나면 우리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납니다." 어느 꿈은 현실이 되었지만 어느 꿈에는 땀을 더 쏟아야 된다고 당신은 말했어요. 그리고 정치가 썩었다고 고개를 돌리지 말라고도 했지요. 당신이 떠난 뒤로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영상 중에 제일 아프게 저를 할퀴는 것은 그때의 목소리예요. 오늘 밤이 지나면.
이제, 오늘 밤이 지나면 당신은 다른 세계로 간다지요. 49재. 오늘 밤이 지나면 당신을 보내야 돼요. 슬픈 것도 슬픈 거지만 무엇보다 나는 막막해요. 당신 같은 사람도 없는데 나는, 우리는 이제부터 어떡하지. 그런데 당신 역시 그토록 약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어요. 어쩌면 당신은 이렇게 빈자리를 느끼게 하기 위해서 거기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당신은 떠난 뒤에 오히려 더 많은 일을, 더 큰 일을, 더 작은 일을, 더 복잡한 일을 하게 될 셈인 거죠. 우리는 더 강해지고 더 다정해질 거예요. 당신이 이룬 것과 그러지 못한 것을 공부할 거고, 당신의 한계를 지적할 거고, 당신을 더 좋아할 거예요. 우리는 당신이 잘못한 걸 찾아낼 거예요. 다음에 만날 이상주의자는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
열정은 식어버리기도 하지만 그리움은 어지간해서 사라지지 않아요. 아니, 시간에 힘입어 점점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편파적으로 좋은 기억만 키우게 마련이죠. 이 공정치 않은 그리움의 울타리 안에서 오랫동안 당신을 기억하고 오랫동안 사랑하고 오랫동안 갚아가면서 살겠어요. 울타리 밖의 사람들이라고 미워하지 않고 억지로 끌어오지 않을게요. (대신 혼내줄 놈들은 모조리 혼내주겠어요.) 나는 그렇게 당신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넓혀가겠어요. 그러니 당신, 어느 세계로 건너가든 아주 가버리지는 말고 이따금 이 공터에 찾아와 내가 전에 내주지 못했던 당신의 자리에서 언제까지고 쉬다 가시길. 고마웠어요. 미안해요. 잘 가요.
내 살고 있는 곳에 공터가 있어
비가 오고, 토마토가 왔다 가고
서리가 오고, 고등어가 왔다 가고
눈이 오고, 번개탄이 왔다 가고
꽃소식이 오고, 물미역이 왔다 가고
당신이 살고 있는 내 마음에도 공터가 있어
당신 눈동자가 되어 바라보던 서해바다가 출렁이고
당신에게 이름 일러주던 명아주, 개여뀌, 가막사리, 들풀이 푸르고
수목원, 도봉산이 간간이 마음에 단풍들어
아직은 만선된 그리움에 그래도 살 만하니
세월아 지금 이 공터의 마음 헐지 말아다오
-함민복 「공터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