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를 함께 보낸 친구. 이런 말만큼 강력한 게 또 있을까?

'성인'이 되었다는 야릇한 해방감과 그보다 큰 불안을 함께한 친구들. 셀 수 없이 많은 술잔을 함께 비운 친구들.(그때부터 술값을 모았으면 우리가 술집을 하나 차렸겠지.) 싸우고 화해하고 눈물이 날 때까지 웃고 남을 따라 울었던 친구들. 크고 작은 고민을 시시콜콜 들어주고, 서로의 연애에 간섭하고 다독이고, 사회생활의 난감함에 같이 우울해하고, 이젠 값싼 안주를 고집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은밀한 웃음을 주고받은 친구들. 서른살이 되는 기념으로 봉고차를 빌려 바다를 보러 갔던 친구들. 그러니까 생각해보면, 그런 게 청춘이었구나. 청춘.

어제는 그 강력한 친구 중 하나가 나를 찾아왔다. "너한테 꼭 소개해주고 싶은 맥주가 있어"라고 몇번이나 얘기하더니, 그 맥주를 한아름 사들고 왔다. ('술을 사들고 찾아오는 친구'라니 이 얼마나 그림같은 풍경인가!) 얼굴을 본 것은 반 년도 넘었고, 술을 함께 마신 것은 일 년도 더 된 일. 그런데 전전 날도 전 날도 그랬다는 듯이 건배가 자연스러웠다. 좀 촌스러운 설정이긴 하지만 김광석을 들으며 늦도록 술을 마셨다. 친구는 내가 엘리엇 스미스를 안지 한달도 안 되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라면서 "많이 듣지 마, 그러다 죽는다, 너... 너 근데 왜 자꾸 일찍 죽은 사람들 노랠 좋아하냐? 걱정되게" 하면서 진지한 얼굴을 해서 나를 웃겼다. 그때 우리, J랑 양평에 놀러갔을 때 기억나? 그때 태풍 와서 콘도에 손님이 우리밖에 없었지. 거기 지키는 아저씨들 되게 무서웠는데. 맞아 중간에 전기도 끊기고. 근데 우리 그 와중에 술 모자라서 수퍼마켓 간다고 촛불 켜고 지하까지 내려갔잖아. 셋이 덜덜 떨면서 서로 꼬리를 잡고서. 낄낄. 그래, 그런 게 청춘이었구나, 청춘.

 

 

 

 

 

며칠 전에 누군가 내게 씨디를 한 장 주었다. 혹시나 네꼬 씨가 나중에 제프 버클리를 들었는데 왜 아무도 나한테 알려주지 않았냐며 입 내밀까 봐 선물하는 거라고 했다. "들을 때마다 나를 청춘의 한복판으로 데려다 놓는. 들어도 들어도 아쉽고 그리운."이라는 쪽지를 읽는데 거기 적힌 '청춘'이라는 말이 어쩐지 신성해 플레이어에 씨디를 거는 일조차 조심스러웠다. 우리는 20대를 함께하지 않은 친구. 그러나 나는 제프 버클리 덕분에 그녀의 청춘을 엿보았다. 격정과 불안, 낙관과 사랑, 무엇보다 자존감이 가득했던 그녀의 청춘을. 나는 비로소 그녀의 강력한 친구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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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햇빛, 시원한 바람, 매미소리. 일요일 오후 내내 집 안을 서성거렸다.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리 큰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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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08-24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용돌이 치는 그 마음도 청춘의 한 증거일까요. 이런 날은 말없이 손을 잡아주고 싶어요. 우리 네꼬님, 힘내요!

네꼬 2008-08-26 08:56   좋아요 0 | URL
(^^) 마노아님은 어쩜 그렇게 늘 기운이 넘치세요? 기운 센 사람 나 좋아.
:)

다락방 2008-08-24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지금 같은 생각을 하며 같은 기분으로 이 시간들을 버텨내는지도 모르겠다고 네꼬님의 글을 읽으며 생각했어요.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 큰일도 아닌데 마음을 다쳐서 저도 일요일 오전 오후 내내 집 안에서 꼼짝도 않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문제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될지도 모르겠고, 나는 이대로 여전히 계속 이런 나일 것 같은데, 내내 마음이 무거워요.

토닥이는것 말고,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 말고, 도대체 무엇이 이 마음을 다스려줄까요.
이 아픈 마음은 내버려두어야 하는걸까요.
저절로 나아질까요.


재미없어요, 세상이.

네꼬 2008-08-26 08:58   좋아요 0 | URL
세상이 왜 재미가 없어. 내가 있는데. 아마 그 일요일이 재미가 없었겠죠.

모기 물린 다음에 긁어봤죠?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가도 샤워하다가 물이 거기 닿으면 앗 따가워 하고 깜짝 놀라잖아요. 아 거기 상처가 있었구나 하고. 그런 거예요.

맛있는 것 먹고, 좋은 것 보고, 즐거운 생각해요. 자자, 응?

순오기 2008-08-25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대의 문턱에 들어선 딸을 보며 내 청춘을 되돌려 보지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했던 우리는 그해 여름, 기차를 타고 부산에 갔었는데...우리 딸도 제 친구들과 셋이 첫여행으로 부산을 다녀왔어요. 이런 건 말도 한적이 없었는데~~~ 딸이 부산 갔다온 다음날 엄마의 청춘기를 얘기하면서 우린 마음의 손을 잡았죠. 모전여전이란 말을 실감하면서...
네꼬님이 20대를 함께 한 친구들과의 추억이나 집안의 서성임이 모두 '빛나는 청춘'을 살고 있다는 증거죠! 힘내세요~~~

네꼬 2008-08-26 09:00   좋아요 0 | URL
부산이라. 전 서른살 기념 바다구경으로 속초에 갔는데. 바닷가에서 새벽이 오는 게 보일 때까지 각자 아는 노래는 전부 다 불렀어요. 부르다 부르다 나중엔 캐롤까지.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 순간이 참 빛나요. 아니, 그때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아 이 밤은 오래오래 빛날 거야, 하고. 순오기님 따님은 그 빛나는 순간을 엄마와 나눌 수 있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따뜻할까요.
: )

nada 2008-08-26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을 사들고 찾아오는 친구! 정말 완벽한 단어의 조합이잖아요!
계획되지 않은 술자리의 서프라이즈와 설렘. 파자마 입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강력한 친구. 불멸이 된 음악들. 생각만 해도 행복해지는 것들이에요.

mong 2008-08-26 13:05   좋아요 0 | URL
이 댓글 읽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파자마 어쩌구 하는 노래가 흘러나와요 낄낄

네꼬 2008-08-28 17:27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꼬장배추님. 몽님이랑 같이 술을 사들고 오세요. 아니아니 내가 갈까요? (^^) 생각만 해도 행복하게 하는 것들. 요즘 같은 땐 그런 것들마저 잊지 않도록 각별히 마음 써야 해요. (응? 이게 무슨 소리?)

몽님. 몽님이 "낄낄" 하면 어쩐지 더 웃겨요. 좋아요. 낄낄.

mong 2008-08-26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니깐
저에게는 지미 페이지가 청춘이더라구요
할배가 나의 청춘이라니 웃기긴 하지만 히힛
레드 제플린은 결코 나이 든 음악이 될 수 없어요 :)

네꼬 2008-08-28 17:28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그래서 동거녀도 넋을 놓았다고요. 꼭 묶은 백발(은발?), 송글송글 맺힌 땀. 음향은 뭔가 시원치 않았지만 그 연주가 얼마나 아름다웠을지는 화면 너머 여기서도 충분히 느껴지더군요. 좋은 것은 결코 나이가 든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지요. 그럼요. :)

2008-08-27 13: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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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8 17: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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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4 15: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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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4 15: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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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4 15: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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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4 15: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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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4 15: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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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7 18: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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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8 15: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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