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용기가 되어 - 초등학생이 궁금해하는 시민운동 이야기
레베카 준 지음, 시모 아바디아 그림, 김유경 옮김 / 북멘토(도서출판)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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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용기와 힘이 모이면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세상도 바뀐다!

 

어떤 사람은 뉴질랜드 열대 우림 푸레오라 숲을 구하기 위해 나무 위에 올라가고, 영국에서는 선거권을 얻기 위해 진흙이 묻은 치마를 입고 행진했고 , 기후 위기를 위한 평화 시위, 아프리카 라이베리라에서는 전쟁 종식을 위해 여성들이 침묵 시위를, 볼리비아에서는 영토를 지키기 위한 원주민들의 평화 행진, 서독과 동독을 가로질렀던 침묵의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기도회, 러시아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한 노래로 축제를 열었던 에스토니아 등 연합과 협력이 기적을 만든 사례들이 그림으로 독자들에게 큰 소리로 외치고 있다. 

 

언제나 고여 있는 물은 섞기 마련이듯이 권력은 부패하고 만다. 부패한 권력은 권력을 누리기 위해 최대한 권력에 접근하는 세력들을 짓밟는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하며 자신만의 권고한 성벽을 높이 세워간다. 그 뿐인가.

 

인간과 환경이 서로 공존하며 함께 살아가야 하는 터전을 만드는 것이 기본 상식인데 돈에 눈이 먼 이들은 기후 위기라는 말을 귓등으로 듣고 돈벌이에만 혈안되어 있다. 이들을 향해 청소년들이 등교를 거부하고 평화 시위를 하며 오래된 나무 위에 올라가 벌목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행동에 나타낸다. 이 작은 움직임들이 모여 아름다운 지구를 그나마 보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어른이 깨닫지 못하는 바를 어린이의 눈으로 보여주며, 사회의 기득권층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약자라 분리되는 이들이 직시하고 있다. 그들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한 권력은 사유화되고 힘 있는 자들의 도구로 전락 당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을 인간답게, 환경을 환경답게 보존하는 것은 인류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연합의 정신이고 협력의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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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학습자를 위한 문해력 - 천천히 생각하는 아이가 읽고 이해하고 쓰기까지
박찬선 지음 / (주)학교도서관저널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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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학습자라 함은 기본적으로 학습이 더디고 한 번에 많은 내용을 배우지 못하는 학생들을 의미한다." 

 

느린 학습자는 학습이 더딜뿐만 아니라 혼자서 공부하기 어려운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느린 학습자를 위한 학습 처방전을 제시하고 있다. 소위 기본 학습이 뒤쳐진다고 해서 학습지를 반복해서 투입하는 방법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독서 경험을 최상위 목표로 둔다. 문해력을 통해 글쓰기를 병행할 것을 강조한다. 

 

문해력은 독해력과 달리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과 함께 이해한 것을 활용하고 표현하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느린 학습자에게 문해력은 단계적으로 점진적으로 학습에 정상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전문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문해력을 점진시키기 위한 방법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가령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조급한 마음 때문에 독해력에 주안점을 두고 접근할 것이 아니라 읽기의 유창성에 초점을 맞출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읽기 유창성이 되지 않은 느린 학습자들에게 유창성 텍스트를 제시하고 유창성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기준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반복해서 읽기를 지속해 간다.그리고 느린 학습자의 특성에 맞춰 읽는 책의 수준을 높이며 적절한 책을 읽어갈 수 있도록 교사 또는 학부모가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느린 학습자들이 독해력에 어려움을 겪는 주 원인 중 하나가 바로 기초적인 국어 문법의 미습득임을 밝히고 있다. 느린 학습자들이 문장을 읽더라도 이해하는 수준이 떨어지는 주 원인이 문법 미습득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교육과정 안에서 일부러라도 국어 문법 학습을 지도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문법 지식이 탄탄하게 갖추어 질 경우 느린 학습자들의 읽기 수준은 맥락을 관통하는 힘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맥락을 살펴보는 힘이 생기면 읽기가 즐거워지고 읽기가 쉬워지면 스스로 생각하는 힘도 길러진다. 생각하는 힘은 글쓰기로 표현된다. 느린 학습자에게 글쓰기를 기대하는 것이 너무 과한 욕심이 아닌 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최종적인 목표인 문해력은 천천히 생각하며 읽고 이해하고 쓰기까지 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영상과 게임에는 반응 속도가 빠르지만 유독히 학습에 흥미를 잃고 더디게 참여하는 느린 학습자에게 알맞은 처방법이 필요한 시기임에는 분명하다. 느린 학습자들에게는 양적으로 학습양을 늘리기 보다 교사 대 학생 즉 1:1 지도가 필요하며 오랜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단기간 안에 문해력이라는 도달점에 이르게하겠다는 목표는 교사 또는 어른의 과한 욕심으로 보인다. 느린 학습자에게 필요한 것은 체계적이면서 함께 공감해 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느린 학습자와 보조를 맞출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느린 학습자를 이해하기 위한 교사의 노력도 필요하다. 이에 『느린 학습자를 위한 문해력』을 모든 어른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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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하얼빈의 11일
원재훈 지음 / 사계절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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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 영웅적 인간에게 그의 본모습보다는 자기 생각에 맞는 부분만을 확대하여 어울리지도 않는 동상을 만들어 세운다. 어설픈 동상이나 정치적인 외침보다는 안중근의 한마디를 되새기는 정신이 필요하다" (338쪽)

 

『안중근, 하얼빈의 11일』은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다시 한 번 살펴 볼 수 있는 책이다. 「안응칠 역사」를 통해 안중근 의사의 생애에 대한 일대기를 살펴보면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지만 그가 이토를 저격한 후 순국하기 전까지남긴 말 한마디, 가족들(어머니, 동생들, 아내)에게 쓴 편지, 뤼순 형무소에서 검사와 간수에게 남긴 대화의 흔적들을 통해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정신과 삶의 목표를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하얼빈에서의 11일 간은 숨막힐 정도로 긴장감이 도는 기간이었다.

 

한 치의 오차 없이 거사를 성공적으로 해내야 했던 안중근 의사에게 있어서는 하루 하루가 무척이나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자금이 없어 창춘행을 포기하고 다시 하얼빈으로 돌아와야했던 사연, 거사를 위해 지인(김성백)에게 돈을 빌려야 했던 사연, 거사일 당일 이토를 어디에서 저격해야 하는지 등의 모든 결정은 오로지 안중근 의사 본인에 의해 진행되어야만 했다. 거사 후에도 그가 자결하지 않았던 이유도 명백하다. 세계 만방에 대한 독립의 정당성과 동양 평화를 위한 목소리를 내야했기 때문이다. 순국하는 그날까지 안중근 의사는 죽음과도 싸워야했던 나날을 보내야했다.

 

이토가 저지른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내가 이토를 동양 평화의 적으로 삼게 된 결정적 단초였다. _27쪽

 

나는 이제 도마(안중근의 호) 안중근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이라는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갈 것이다. _28쪽

 

장소에 의해 삶이 결정된다. 안중근에게는 하얼빈이 그러했다. _60쪽

 

만주 벌판에 떨어지니 한 인간의 존재가 신과 연결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_66쪽

 

로맹 롤랑은 영웅이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자" 라고 했다. _92쪽

 

이순신 장군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정신이 있다면 그것은 상대를 미리 알고 준비를 하는, 즉 이겨 놓고 싸우는 그 정신이다._104쪽

 

역사란 참으로 사소한 일로 위대한 장면을 만들어낸다. _140쪽

 

상하이에서 안중근은 두 개의 큰 벽을 만나게 된다. 안중근의 눈에 비친 중국에 사는 동포들은 조국의 운명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단 먹고살기에 급급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조국은 '먼 나라' 일 뿐이었다. _210쪽

 

문은 걸어 잠그면 벽이 된다. _ 202쪽

민영익과 같은 고관대작이 결코 문이 될 수 없음을 절감하고 길을 떠났다. _203쪽

 

 

뤼순 지방법원으로 결정한 이유는 청일전쟁의 전리품으로 점령한 뤼순이 국제 여론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고, 단독판사 제도를 시행한 탓에 일본 정부의 의지대로 조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_210쪽

뤼순은 일본과 멀리 떨어진 곳이고 단독판사가 재판을 진행하기 때문에 안중근 사건을 일본 정부의 뜻대로 끌고 갈 수 있었다. _211쪽

뤼순 감옥은 안중근 의사와 더불어 민족의 선각자 단재 신채호와 우당 이회영이 옥사한 곳이기도 하다._241쪽

 

삼흥학교(안중근 의사가 가산을 팔아 진남포에 세운 학교)는 훗날 오성학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_231쪽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었던 독방은 다른 옥사에 비해 매우 특별한 장소였다. 형무소장의 집무실과 거의 같은 규모였다._244쪽

일본에서 특수 제작된 호송용 마차가 바로 일제가 안중근 의거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물이다._260쪽

 

두려움은 욕심에서 오는 거지요. 내가 동양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도 그런 맥락과 이어집니다. 욕심을 버리면 두려움도 없습니다. _264쪽

위이불맹, 위엄이 있으되 사납지 않다. 정치를 하기 위해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 논어. _264쪽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는 친일파와 하루하루 살림 걱정을 해야 하는 사람들의 무관심에 안중근은 상처 입은 짐승처럼 외로웠다. _276쪽

 

단지 동맹을 정천 동맹이라고 명명하고. 1909년 3월 5일이었다. 당시 엔치야 하리 마을에서 결성된 '바른 하늘 아래 맹세'인 '정천 동맹'은 대부분 의병 출신 동지들이었다. _279~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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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과 걷다 - 크라스키노에서 상하이까지
박영희.최종수 지음 / 숨쉬는책공장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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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자세히 보면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하얼빈도 한반도에 아주 멀리 떨어진 지역이고 더구나 의거후 하얼빈에서 남쪽 뤼순으로 호송되어 간 거리도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안중근 의사는 의병 활동 중 국내 진공 작전에서 승리를 한 적도 있었지만 패전을 한 뒤에는 천신만고 끝에 연해주 크라스키노라는 곳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크라스키노, 포시에트, 블리디보스토크는 안중근에게 있어 독립 운동을 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이미 그곳에는 한인 사회에서 명망이 두터운 최재형과 이범윤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안중근의 독립 운동에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해 주었다. 

 

크라스키노에는 단지동맹비가 세워져 있다. 안중근의 손도장 기념비다. 단지동맹은 1909년 2월 7일 안중근을 포함한 12명의 동지들이 대한독립을 위해 뜻을 모은 날이다. 안중근,김기룡, 백남규, 황길병, 조순응, 강기순,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 김천화. 

 

"오늘 우리가 손가락을 끊어 맹세함으로써 한마음으로 단체를 이루고,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어떻소?" (16쪽)

 

"고향에서 사서(논어,맹자, 중용, 대학) 삼경(시경,서경,주역)을 공부한 안중근은 세 가지를 먼저 생각했다. 이천만 동포, 이토 히로부미, 그리고 신앙이었다" (70쪽)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신문사 <대동공보> 편집장 이강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가 특급열차로 하얼빈역으로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특히 신문사 <대동공보>는 하얼빈 의거 당시 안중근이 소지하고 있었던 총기, 그리고 경비를 제공해 주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안중근은 블라리보스토크에서 기차를 타고 우수리스크, 포그라니치니, 쑤이펀허, 하얼빈으로 이동한다. 함께 동행한 이는 우덕순이며 하얼빈에서 조덕순과 우동하를 만난다. 우동하는 러시아 통역을 위해 함께 한다.  참고로 안중근의 세례명은 도마(토마스)이며 한자로 다묵이라 표기한다. 

 

'무링'이른 곳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 후 안중근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안창호 선생이 앞장 서 그들의 가족들을 '무링'으로 피신시킨다. 무링에서 일본의 밀정에 의해 안중근의 장남 분도가 의문사를 당한다. 낚시터에 놀러갔다가 그곳에서 낯선 이로부터 받은 과자를 먹고 죽음을 당한다. 아마도 안중근의 가족을 놀린 일본 밀정에 의한 행동인 것 같다. 

 

'창춘'은 안중근이 호송되면서 하루 저녁 정차한 곳이다. 관동 헌병대가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뤼순'은 청일전쟁의 전리품으로 일본이 지배하고 있던 항구 도시로 일전에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에서 '뤼순'에다가 청,일,한국 3개국이 공동 경제구역을 만들자고 제안한 바가 있다. 뤼순 형무소, 뤼순 법정에서 안중근은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후 안중근의 남은 가족 김아려 여사와 두 아이는 상하이로 이주하며 독립 운동을 하러 온 많은 청년들이 잠시 머물다가 가는 안식처로 사용되었다. 

 

안중근의 발자취를 따라가다보면 한국 근대 독립운동의 발자취와 일맥상통함을 느낀다. 기회가 닿는다면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연해주 일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통해 고려인들의 독립 운동 흔적지, 하얼빈과 뤼순 지역을 탐방하고 픈 마음이 든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까지는 780킬로미터. 국경이 가까워오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안중근은 우덕순과 미리 의견을 나눴다. 첫째, 이토 히로부미를 반드시 쏠 것. 둘째, 달아나지 말고 총을 내던진 다음 코레야 우라(대한 독립 만세)를 크게 외칠 것. 셋째, 산 채로 잡혀 우리의 억울함과 정당성을 세계에 알릴 것." (84쪽)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거사를 행한 뒤 권총으로 자살을 하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가 법정에서 대한국민의 억울함과 정당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인만큼이나 러시아 정부도 내심 고려인 추방을 반겼다는 점이다.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내쫓을 수만 있다면 두 가지 계획은 분명해 보였다. 황무지 개발과 군량미였다. 실제로 스탈린 정부는 고려인들이 수확한 고식을 러시아 혁명군 군량미로 사용했다." (88쪽)

 

안중근과 동시대를 살았던 연해주 지역에 있었던 우리 한인들은 러일전쟁 후  6000킬로미터 떨어진 중앙아시아 벌판에 버려지게 되었다. 일본이 스탈린 정부에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는 연해주에 있었던 우리 동포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우리 한인들이 까레이스끼가 되어 집단 이주하게 되었으니 지금의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이 우리의 후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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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안쏠로지 - 다시 안중근을 읽는 시간
(사)안중근의사숭모회/기념관 지음 / 서울셀렉션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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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모든 것, 안쏠로지

 

이 책에는 안중근 의사의 옥중 집필서이자 안중근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가 번역되어 있다. 한문으로 된 안중근 자서전이 한글로 읽기 쉽게 번역되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남녀노소 구분없이 한 번 쯤은 읽어봐야하지 않을까. 최근 영화관에서 상영된 정성화 주연 「영웅」의 스토리가 안중근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옥중에서 안중근 의사가 자신의 자서전을 쓰지 못했다면 안중근 의사의 32년 개인사를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에 『안응칠 역사』는 소중한 사료로 취급되어야 할 것 같다. 

 

『안응칠 역사』에는 안중근 의사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얼마나 희생하고 노력했는지 한 눈에 볼 수 있다. 나라 잃은 백성으로 한을 풀기 위해 고향을 떠나 의병에 가담하고 목숨을 잃을  뻔 한 여러 번의 고생 끝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둥지를 트는 과정이 담겨 있다. 어렸을 때에는 죽을 고비도 넘긴 사연, 아버지와 도와 동학당과 전투를 벌인 일, 부패한 관료들의 민초들을 향한 몹쓸 짓들을 방관하지 않고 불의를 꼬집다 변고를 치룬 일, 아버지 안태훈 진사가 성당에서 서너달 숨어 지내면서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의 가족들 모두 천주교로 입교한 이야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의병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친 일, 그리고 영화 「영웅」의 주 스토리인 하얼빈 의거의 드라마틱한 사건의 전말, 뤼순 형무소에서 사형 직전까지 만났던 간수들, 일본인 법관들, 동생들과의 회후 등의 일화가 『안응칠 역사』에 일일히 담겨 있다. 

 

특히 『안응칠 역사』 즉 안중근이 자서전을 쓴 시점이 무척 중요한 것 같다. 사형 선고를 받은 후라는 점이 보통 사람과는 다른 면이다. 짧은 32년의 자신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기술하였으며 자신의 이토를 저격한 이유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영화 「영웅」에서도 미조부치 검찰관 앞에서 이토를 가해한 이유 15가지를 분명하게 말했다. 이 내용도 자서전에 실려 있다. 

 

안중근은 국내외 정세를 정확히 판단하는 전문가임을 자서전에서도 살펴 볼 수 있다. 

 

"더구나 일본은 불과 오 년안에 반드시 러시아와 청나라, 미국 등 세 나라와 전쟁을 하게 될 것이므로, 그것이 한국의 큰 기회가 될 것입니다" (212쪽)

 

먼 훗날의 일본의 패망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는 한국 사람이 일본 법정에서 일본 사람들에 의해 자신의 죄목이 판결되는 점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며 만국공법으로 처리되어야 하는 이유를 자선전에서 밝히고 있다. 

 

"그때 김두성과 이범윤 등이 함께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 사람들은 전에 이미 총독과 대장으로 임명된 이들이다. 나는 참모중장으로 임명되었다." (214쪽)

"현재 만국 공법에 사로잡는 적병을 죽이는 법은 없소. 어딘가에 가두어 두었다가 뒷날 배상을 받고 송환하는 것이 법이오."(217쪽)

 

의병 활동을 하면서 풍찬노숙한 사연도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더구나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어 인가도 전혀 없는데, 사오 일을 헤매면서 한 끼니도 먹지 못해 배가 고프고 발에는 신발조차 신지 못했다. 굶주림과 추위의 고통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풀뿌리를 캐어 먹고 담요를 찍어 발을 싸매고서 서로 위로하고 보호하며 무작정 걷노라니" (221쪽)

 

독립운동가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희생을 통해 이 나라가 지금껏 지켜 올 수 있었음에 숙연해질 수 밖에 없다. 

 

영화 「영웅」 시작과 동시에 안중근 역할을 맡은 정성화 배우가 하얗게 눈 덮힌 들판에서 동지 열 두사람과 함께 손가락을 끊어 함께 맹세하는 장면이 나온다. 안중근 자서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마침내 열 두 사람이 각각 왼손 약지를 끊어 그 피로 태극기 앞면에 글자 넉 자를 쓰니 대한독립이었다." (227쪽)

 

영화 「영웅」 의 감동이 아직도 뇌리에 새겨 있다. 덕분에 안중근 관련 책을 찾게 되고 구제적으로 관련 내용들을 읽으니 마음 가짐이 새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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