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과 걷다 - 크라스키노에서 상하이까지
박영희.최종수 지음 / 숨쉬는책공장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도를 자세히 보면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하얼빈도 한반도에 아주 멀리 떨어진 지역이고 더구나 의거후 하얼빈에서 남쪽 뤼순으로 호송되어 간 거리도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안중근 의사는 의병 활동 중 국내 진공 작전에서 승리를 한 적도 있었지만 패전을 한 뒤에는 천신만고 끝에 연해주 크라스키노라는 곳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크라스키노, 포시에트, 블리디보스토크는 안중근에게 있어 독립 운동을 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이미 그곳에는 한인 사회에서 명망이 두터운 최재형과 이범윤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안중근의 독립 운동에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해 주었다. 

 

크라스키노에는 단지동맹비가 세워져 있다. 안중근의 손도장 기념비다. 단지동맹은 1909년 2월 7일 안중근을 포함한 12명의 동지들이 대한독립을 위해 뜻을 모은 날이다. 안중근,김기룡, 백남규, 황길병, 조순응, 강기순,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 김천화. 

 

"오늘 우리가 손가락을 끊어 맹세함으로써 한마음으로 단체를 이루고,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어떻소?" (16쪽)

 

"고향에서 사서(논어,맹자, 중용, 대학) 삼경(시경,서경,주역)을 공부한 안중근은 세 가지를 먼저 생각했다. 이천만 동포, 이토 히로부미, 그리고 신앙이었다" (70쪽)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신문사 <대동공보> 편집장 이강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가 특급열차로 하얼빈역으로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특히 신문사 <대동공보>는 하얼빈 의거 당시 안중근이 소지하고 있었던 총기, 그리고 경비를 제공해 주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안중근은 블라리보스토크에서 기차를 타고 우수리스크, 포그라니치니, 쑤이펀허, 하얼빈으로 이동한다. 함께 동행한 이는 우덕순이며 하얼빈에서 조덕순과 우동하를 만난다. 우동하는 러시아 통역을 위해 함께 한다.  참고로 안중근의 세례명은 도마(토마스)이며 한자로 다묵이라 표기한다. 

 

'무링'이른 곳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 후 안중근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안창호 선생이 앞장 서 그들의 가족들을 '무링'으로 피신시킨다. 무링에서 일본의 밀정에 의해 안중근의 장남 분도가 의문사를 당한다. 낚시터에 놀러갔다가 그곳에서 낯선 이로부터 받은 과자를 먹고 죽음을 당한다. 아마도 안중근의 가족을 놀린 일본 밀정에 의한 행동인 것 같다. 

 

'창춘'은 안중근이 호송되면서 하루 저녁 정차한 곳이다. 관동 헌병대가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뤼순'은 청일전쟁의 전리품으로 일본이 지배하고 있던 항구 도시로 일전에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에서 '뤼순'에다가 청,일,한국 3개국이 공동 경제구역을 만들자고 제안한 바가 있다. 뤼순 형무소, 뤼순 법정에서 안중근은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후 안중근의 남은 가족 김아려 여사와 두 아이는 상하이로 이주하며 독립 운동을 하러 온 많은 청년들이 잠시 머물다가 가는 안식처로 사용되었다. 

 

안중근의 발자취를 따라가다보면 한국 근대 독립운동의 발자취와 일맥상통함을 느낀다. 기회가 닿는다면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연해주 일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통해 고려인들의 독립 운동 흔적지, 하얼빈과 뤼순 지역을 탐방하고 픈 마음이 든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까지는 780킬로미터. 국경이 가까워오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안중근은 우덕순과 미리 의견을 나눴다. 첫째, 이토 히로부미를 반드시 쏠 것. 둘째, 달아나지 말고 총을 내던진 다음 코레야 우라(대한 독립 만세)를 크게 외칠 것. 셋째, 산 채로 잡혀 우리의 억울함과 정당성을 세계에 알릴 것." (84쪽)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거사를 행한 뒤 권총으로 자살을 하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가 법정에서 대한국민의 억울함과 정당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인만큼이나 러시아 정부도 내심 고려인 추방을 반겼다는 점이다.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내쫓을 수만 있다면 두 가지 계획은 분명해 보였다. 황무지 개발과 군량미였다. 실제로 스탈린 정부는 고려인들이 수확한 고식을 러시아 혁명군 군량미로 사용했다." (88쪽)

 

안중근과 동시대를 살았던 연해주 지역에 있었던 우리 한인들은 러일전쟁 후  6000킬로미터 떨어진 중앙아시아 벌판에 버려지게 되었다. 일본이 스탈린 정부에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는 연해주에 있었던 우리 동포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우리 한인들이 까레이스끼가 되어 집단 이주하게 되었으니 지금의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이 우리의 후손인 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