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없는 구원? - 이신칭의를 넘어, 다시 읽는 바울의 복음
권연경 지음 / 야다북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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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안에서 여러 오해를 받았다고 하는 저자의 설움이 괜한 소리가 아님을 책을 읽는 내내 느껴졌다. 과연 용기 있는 목소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다수가 가는 길이 아닌 소수의 편에서 자신의 연구 결과를 소신 있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길이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계에서 퇴출 대상이 될 수도 있었을 터인데 오랫동안 버티며 누구도 과감히 말할 수 없는 교리의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야다북스에서 다시 개정판으로 출간한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의 『행위 없는 구원?』은 무기력한 한국 교회의 권위를 다시 일으킬만한 도전이 되리라 생각된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장 낯 뜨거운 적이 있었다. 직장 안에서 저돌적으로 교회를 다니라고 외치는 동료 직원을 만났을 때였다. 그분은 아마도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데 듣는 사람들은 얼굴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교회를 다니는 나조차도 괜히 그 자리를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을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그분을 칭찬하고 용기에 박수를 쳐주어야 마땅한데 당시에 나는 쥐구멍이라고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이유는 직장 안에서 그분의 평소의 행실이 썩 칭찬받을 만한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메시지에 힘이 있기 위해서는 그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가 누구냐에 달려 있다. 메신저의 평소의 삶이 메시지와 일치할 때 메시지에 힘이 있다. 메신저의 인격과 평소의 삶이 귀감이 된다면 메시지는 울림이 된다. 만약 정반대라면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훨씬 좋은 방법이다. 직장 안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말이 아니라 삶이어야 한다. 자신의 믿음을 제대로 표현하는 방법은 말이 아니라 평소의 행동이다. 믿음은 개인적인 것인 반면에 행동은 공동체에 영향을 미친다. 개인적 믿음이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서는 믿음에 걸맞은 행동이 꾸준하게 실천되어야 한다.

권연경 교수는 『행위 없는 구원?』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의 실체를 비판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다른 이름이 '행위'라고 정의한다. 믿음과 행위를 분리하는 현재의 한국의 기독교인들의 모습 속에서 나약한 한국 교회의 모습이 그려진다. 행위와 믿음은 이원론적으로 구분될 수 없다. 권연경 교수가 말한 종말론적 구원의 필수 조건이 행위가 뒤따르는 믿음이라고 이야기한 것이 논란의 중심이 되는 이유는 기존의 우리가 잘 알고 있었던 루터의 오직 믿음, 오직 은혜에 정반대의 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실천(믿음의 행위)과 뗄레야 뗄 수 없다.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과 구분될 수 없다. 선한 행실을 드러내는 것이 제자 됨의 본질이다. 실천적 행위는 제자의 기준이 된다.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행위는 거룩한 믿음의 행위임에 틀림이 없다. 오히려 행위가 없는 믿음이 손가락질을 받는다.

권연경 교수는 신약 성경 안에 있는 야고보서, 마태복음서의 저자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행위 없는 믿음'을 자기 기만적인 태도, 허위의식, 속 빈 강정, 불신앙의 행위, 말뿐인 믿음, 행함이 없는 믿음, 과시하는 믿음, 빈 믿음, 생명이 사라진 믿음, 시체, 기름 없는 자동차, 헛것, 가짜 믿음, 엉터리 믿음, 죽은 것, 빈 껍질, 불량품 복음 등으로 비유한다.

한국 교회가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야 교회다워진다.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새로워져야 땅 위의 소금,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말로만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안주할 것이 아니라 행함이 있는 믿음을 드러내야 한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거룩함이고 경건이다. 경건은 약한 자, 소외된 자, 어려움에 처해 있는 모든 자를 기꺼이 돌보고 사랑하는 행위다. 믿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행할 수 없는 섬김이다.

한국 교회의 영향력은 엉터리 믿음이 아니라 성령이 역사하시는 거룩한 삶에 있다. 하나님의 뜻은 거룩함과 순종에 있다. 이제 역동성 있는 우리의 믿음을 드러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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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권세 - 전체주의 공포와 기능장애에 빠진 민주국가들에서 기독교의 정치적 증언
톰 라이트.마이클 F. 버드 지음, 홍종락 옮김 / 야다북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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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신학 입문서라고 할 수 있는 톰 라이트 & 마이클 F. 버드의 『예수와 권세』는 그리스도인들의 정치 참여에 대해 성경적 근거와 역사적 사례들을 들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더 나아가 기독교 공동체(교회)가 세상 권세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적절한 답을 안내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믿는 자녀이면서 동시에 시민으로 살아간다.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치적 현안에 대해 회피하거나 무관심하는 태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겸손을 가장한 무관심은 경계'해야 한다. '권력을 향해 진리를 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정치 문제에 대해 기독교적 사고방식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개인의 영혼에만 방점을 두고 '천국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종교적 소비자에 머무르게 한다. 가장 큰 위협은 교회가 텅텅 비는 일이 아니라 '사람들의 냉담함과 무관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곳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야 한다. 직접적으로 하나님이 왕이심을 증거해야 한다. 모든 권위는 왕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권위를 받은 사람에게는 책임이 뒤따른다. 권위에는 문제가 많다. 남용, 오용은 교만이자 오만이다. 교회는 '세상 권력에 거울을 들이대고 권력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권력을 향해 진리를 말해야 한다. '약함 속의 권력, 겸손한 섬김을 통한 권력, 자기희생을 통한 권력'이라는 성경이 말하는 삶의 방식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소명을 잃을 때 한낱 국가의 도구가 된다. 기독교 민족주의가 대표적 사례다. 기독교 민족주의는 복음을 부정한다. 피상적인 기독교일 뿐이다. 국가가 종교를 규제한다. '십자가 없는 하나님 나라'를 추구한다. 특정한 국가적 야망을 뒷받침하는 용도로 기독교 민족주의가 사용되고 있다. '기독교 민족주의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모두에게 위험'하다. 시민 불복종이 필요할 때가 있다. 부당한 법률 앞에서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 저항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권력은 선을 위한 하나님의 일꾼이다. 권력이 정상적으로 작동될 때 우리는 국가에 복종할 명분이 선다. 선을 위해 권력이 사용되지 않을 때에는 국가에 맹목적으로 복종할 이유가 없다. 권력은 한계가 있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권위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위임받은 것이고 허가받은 것이다. '모든 권리에는 한계가 있고, 모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권력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자신의 이익과 이념을 추구하기 위해 정치권력을 쥐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권위가 위에 있는 신으로부터 위임된 것이 아니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치는 불과 같아서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타버리고, 너무 멀리 떨어지면 얼어붙는다' 『예수와 권세』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권위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뱀 같은 지혜를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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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빠진 교회
권수경 외 지음 / 야다북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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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출판사(야다북스) 『토브 처치』가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 위해 교회 안에서 방관해 온 악한 교회 문화를 지적했다면 『정치에 빠진 교회』는 최근 대통령 탄핵 사건 이후 사회적 이슈가 된 '교회의 정치화'에 대한 기독교 안에서 반성과 교회가 교회답게 되기 위해 '교회의 진정한 사명'이 무엇인지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특히 『정치에 빠진 교회』에서는 '교회의 정치화'를 비판하며 한국 교회사에서 교회가 중심을 잃고 본격적으로 정치와 타협했던 시기를 학술적 근거 자료를 토대로 분석하고 있다. 단순히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초기 한국 교회의 시작이 되었던 1880년대부터 시작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 교회의 여정을 조목조목 살피며 왜 한국 교회가 결정적인 순간에 빛과 소금의 역할보다는 정치에 예속화가 되었는지를 자성하는 목소리로 비판하고 있다.

『정치에 빠진 교회』를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 읽어내기가 참 쉽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자칫 제 얼굴에 침 뱉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자신의 얼굴의 민낯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더더욱 꼴불견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는 교회의 현실을 알기에 기독교계 안에서도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을 『정치에 빠진 교회』에서 다뤘다는 점은 용기 있는 결정이라고 볼 수 있다. 외면하고 싶고 적당히 덮어 버리고 싶은 것이 나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한국의 기독교가 아직 살아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교회의 정치화'에 대해 애정 어린 비판의 목소리를 다각도로 낼 수 있다는 점이다.

『정치에 빠진 교회』를 집필한 다섯 명의 저자들은 아마도 한 줄 한 줄 문장을 써 내려가면서 자신이 비판한 내용들이 과연 논리적 근거가 정확한지를 누구보다도 더 자세히 살펴보았을 것이며 더구나 한국의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는 일에도 많은 문헌과 자료들을 살펴보았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넘어 미래의 한국 교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한국 안에서의 상황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을 포함한 세계의 기독교 동향을 살피는 일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히틀러 정권 당시의 독일 교회의 모습, 현재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교회, 1930년대 신사참배를 묵인하고 인정한 일제강점기 시대의 한국 교회의 모습의 공통점은 하나님보다 국가, 민족을 우선한다는 명목하에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가 아닌 사람의 눈으로 본 교회를 추구하고자 했던 시도였다는 점이다. 교회의 정치화를 자리 잡게 했던 독일, 미국, 한국의 모습은 국가와 교회의 존재 목적을 분명하게 구분하지 못했다는 점도 나타난다. 정교분리의 원칙은 오래전부터 교회가 추구해 왔던 방향이었지만 교계의 지도자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원칙을 지켜가지 못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정치에 빠진 교회』를 통해 우리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해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됨을 깨닫게 된다. 교회는 오직 주 예수의 십자가만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교회가 정치에 종속되거나 전락될 경우 교회는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될 것이다. 독일 바르멘 신학 선언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해 말한 내용 중에 '교회는 국가의 기관이 되려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고백은 교회가 다시 교회가 다시 성경적인 본보습을 찾아야 한다는 절절한 외침이기도 하다.

결코 종교는 이념이 될 수 없다. 종교가 이념이 되는 순간 폭력을 용인하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종교가 '종교성'을 나타낼 때 성경적이지 않고 힘의 논리를 드러내게 된다.

교회가 전해야 것은 정치가 아니라 복음이다.

'정치의 언어가 아닌 진리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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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브처치 - 권력에 저항하고 치유를 촉진하는 선한 문화 만들기
스캇 맥나이트 외 지음, 김광남 옮김 / 야다북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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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교회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교회는 예수의 복음의 한 부분이다', '교회는 예수의 복음을 선포한다', '교회는 정의를 추구하고, 겸손하게 섬기고, 투명하게 운영되고, 실패를 고백하고 탄식함으로써만 예수의 진리를 증거할 수 있다'라고 (공) 저자들은 강조한다.

『토브처치』는 교회가 순기능을 잃었을 때 어떤 악한 모습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지 미국의 여러 교회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해 교회 본연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토브처치'라른 개념으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미국의 대형 교회 윌로우 크릭의 빌 하이벨스 목사는 대표적으로 교회 안에 유해한 문화를 조성한 인물로 지목하고 있다. 그는 자아도취적이며 두려움을 조장한 리더였음을 많은 피해자들의 증언을 근거로 폭로하고 있다. 교회 안에 그런 일이 없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예수의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리더가 자신의 정체성을 잃었을 때 목사직이라는 리더십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토브처치』는 교회 안에 '선한 문화'가 조직되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당연한 이야기임에도 당연하지 못했던 것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조직 안에는 언제나 권력에 대한 유혹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고 정의와 용서를 추구하는 문화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반대로 교회의 평판과 브랜드를 우선시하고 교회 리더들을 숭상할 때 어김없이 유혹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교회는 선해야 한다.(토브) 진실해야 한다. 옳은 것을 추구해야 한다. 교회는 더더욱 그러해야 한다. '선을 행하고 선을 행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 주심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선함은 성령께서 임재하심을 보여주는 증거다'. 예수의 복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사랑하는 것이 곧 선함이다. 선함은 관대함을 뜻한다. 친절함이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라고 시편 기자는 말한다.

예수는 긍휼하신 분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나신 분이다. 공감은 우리 자신의 감정을 벗어나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능력이다. 교회는 세상의 가난한 자, 억눌린 자, 곤경에 처한 자를 따뜻하게 품는 곳이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모습이다. 교회 안에 리더일수록 섬김을 받기보다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서로 조화롭게 지내며 신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회 문화가 곧 교회를 드러낸다.

선한 교회 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공) 저자들은 7단계 '토브 써클'을 제안한다. 교회 리더를 포함한 구성원들이 선한 습관을 키우기 위한 일종의 프로젝트다. 특별한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특별한 것도 아니다. 예수의 삶을 보고 배우는 것이다. 성경에서 줄곧 강조하는 선함(토브)을 실천하는 것이다. 교회가 예수를 바라보지 않고 세상을 볼 때 선한 문화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만다. 많은 시간과 안내가 필요한 일이겠지만 다시 선한 교회 문화를 회복하기 위해 예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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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도 1 - 포수의 원칙
방현석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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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없는 백성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에 불과하다. 구한말 일본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군대가 강제 해산된 나라가 과연 나라일 수 있을까. 백성의 선한 움직임을 민란으로 규정하고 외국의 군대가 자신의 백성들을 무차별하게 죽이도록 방관하는 지도자가 과연 한 나라의 믿을만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을까.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념 아래 양반과 천민의 반상 제도를 철떡 같이 신봉하며 기세 좋게 명분을 삼은 위국 운동이라고 하는 의병 운동은 결국 나라가 놓인 현재의 상황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 어리석은 행동에 불과했다. 나라가 망가지고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그나마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무명의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구한말 함경도 일대에서 호랑이를 잡던 포수들이었다.

호랑이를 '범'으로 칭하며 호랑이를 잡는 용맹 무쌍한 그들을 '범포'라고 불렀다. 깎아지른 산세 지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범포들은 구역을 나누어 포수의 원칙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양반들에게는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받았지만 벼랑 끝 위기 앞에 놓인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이들은 바로 무명의 범포들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독립군의 효시였던 봉오통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홍범도 장군이 바로 '범포'였다. 범포의 세계에서도 뛰어난 포수장이었고 포연대장이었다. 아마도 홍범도 장군의 이름도 어찌 보면 실제 이름이 아니라 호랑이를 잡는 '범'에서 유래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홍범도 장군에 대해 우리가 아는 바는 그렇게 많지 않다. 다만 그가 노년에 강제로 이주된 러시아 땅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점과 독립운동 투쟁기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점 등이다. 방현석 작가의 장편소설 『범도』1권 포수의 원칙(629쪽 분량)에는 홍범도 장군의 유년 시절의 생활 모습을 독자들이 유추할 수 있도록 작가의 상상력이 문장으로 잘 나타나 있으며 실제로 함경도 산악 지형에서 포수로써 다져진 탁월한 사격 솜씨가 실감 나게 표현되어 있다.

"총잡이를 세 가지로 나누었다. 복부를 맞춰 낙명시키지도 못하는 총잡이는 백정이고, 심장을 맞춰 고통스럽게 낙명시키는 총잡이는 사냥꾼일 뿐이야. 두부의 급소를 맞춰 일격에 낙명시켜야 포수라고 할 수 있지" _500쪽

기관총과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정예 부대와 산속 지형에서 오랫동안 포수로 살아온 포수 부대를 단순 비교하면 전력 면에서 천양지차다. 하지만 홍범도 장군이 꾸렸던 부대는 외형적으로는 화승총과 일본 군으로부터 노획한 소총으로 간신이 군대의 모양을 갖추었던 것으로 볼 수 있으나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정신력은 그 누구보다도 압도적인 힘을 발휘했다.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것은 적의 상태와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하고 해석하는 정보력이 4할이고, 작전 계획을 세우는 능력이 3할이며, 싸움에 나서는 군병의 역량과 전의가 2할, 선전 역량이 1할이다"_ 588쪽

4정 3작 2전 1선의 원칙으로 부족한 전력을 보완한 홍범도 장군의 대일 전쟁은 오늘날로 말하면 민관군 협력으로 치러낸 전투였다. 나라를 위태롭게 만든 당시의 기득권 세력들은 일본에 넙죽 엎드리고 있을 때에 조선 팔도 무명의 백성들은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라를 구하겠다고 자시의 모든 것들을 조건 없이 받쳤다. 그 결과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게 된 것이다.

나라를 위한 첫걸음은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의 숭고한 발자취를 찾아보는 일부터 시작이다. 그런 의미에서 방현석 작가의 장편소설 『범도』를 모두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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