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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타고 조선 너머 ㅣ 샘터어린이문고 73
오진원 지음, 최희옥 그림, 이지수 기획 / 샘터사 / 2023년 5월
평점 :

『열하일기』는 박지원이 사신단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과정을 기록으로 남긴 책이다. 이 기록물은 조선 후기 최고의 기행문으로 꼽힌다. 중국에서 3대 기행문으로 꼽히는 기록문 중에 조선 사람이 쓴 책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제주도 사람 최부가 쓴 『표해록』이다.
"1488년 윤 1월 3일, 최부는 아버지 장례를 치르기 위해 제주도 조천관에서 고향 나주를 향해 배를 띄웠다. 배에는 최부를 포함해 모두 43명이 타고 있었다" _7쪽
제주도 사람 최부는 바다에서 표류되고 만다.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중국 저장성에 도착한 뒤 항저우, 북경을 거쳐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표해록』이다. 중국에서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함께 최부의 표해록을 3대 기행문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그 이유는 당시 중국의 생활 상을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료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기록의 힘이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고 언어와 문화가 다른 곳에서 살아남은 것도 쉽지 않았을 터인데 일일이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으니 참 대단하다. 또한 그 기록을 잘 보관하여 후대에 전했으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파도 타고 조선 너머』에는 최부처럼 바다에 표류되었지만 새롭게 만난 세상을 기록으로 남긴 다섯 명의 조선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의 필리핀인 여송국, 일본 오키나와인 유구국, 중국 마카오, 일본 홋카이도 등 조선 시대에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세상에 발을 내디뎠다. 무명에 불과한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낯선 세계를 만난 것이다. 만약 이들이 표류되어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면 그냥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을 것이다. 기록으로 남겼기에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남길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 역사적 사료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기록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반드시 용기가 필요하다. 표류되어 살아남아 새로운 세상을 만났던 이들도 그랬을 것이다. 기록은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다. 자신의 존재를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며 생을 이어가기 위한 결심이다. 평범한 삶의 기록 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에게는 삶의 나침반이 된다. 기록은 서서히 빛을 발한다. 역사는 기록하는 사람에 의해 진보된다. 기록하는 것이 곧 역사를 만들어 가는 일이며 기록하는 삶이 곧 자신의 삶이자 역사다.
나는 매일 책을 읽고 단상을 기록으로 남기거나 일상의 삶을 글로 적어낸다. 나만의 역사를 기록해 간다. 모래알처럼 흩어질 수 있는 삶의 흔적을 글로 수집하고 모으는 과정을 쉼 없이 하고 있다. 기록이 곧 내 삶이다. 기록은 생각의 칼날을 날카롭게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무뎌질 수 있는 사고의 칼날을 날마다 갈고 있다. 필요할 때 사용하기 위해 평소에 날을 갈아야 한다. 글로 기록하는 일은 사고가 반드시 동반된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에 의존할 수 없기에 기록으로 남긴다. 어떤 내용이든 괜찮다. 누가 뭐라고 해도 괜찮다.
참고로 『파도 타고 조선 너머』에 소개된 홍어장수 문순득은 우리가 잘 아는 흑산도에 유배된 정약전과 강진에 유배된 정약용 사이를 오가며 편지를 전달했던 인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