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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지나간 세계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부키 / 2021년 1월
평점 :
"세상에는 잊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지"
책 표지를 찬찬히 살펴보면 빨간색 지하철 앞에 중년의 남성과 여성이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빨간색 지하철에는 은하수 물결이 하얀색 테두리 무늬로 되어 있고, 출근 길 지하철 역임에도 불구하고 인적이 드물다. 아니 두 사람밖에 없다. 현실 세계가 아닌 듯한 느낌이 든다.
이야기는 한 중년의 남성이 정년 퇴직을 기념하는 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다가 갑자가 쓰러지는 사건으로 전개된다. 뇌졸중이다. 중년의 남성은 종합 무역회사 중역이며 명예롭게 정년을 맞이하여 그동안의 무거운 짐을 털어버리고 평범한 일상의 삶으로 돌아갈 날만 남아 있는 사람이다.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응급실에 실려가고 뇌사 판정을 받는다. 의식은 살아 있으나 외부인이 보았을 땐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상태로 중환자실에 안치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급물살을 탄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중년의 남성은 무의식의 세계 속에서 과거의 기억에 가물가물한 자신의 삶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들과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만남을 갖고 대화를 나눈다. 상대방이 누군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왠지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상처가 드러나며 잊어된 기억이 되살아 난다. 사실 중년의 남성은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일본의 전쟁 후 태어난 전후 1세대다. 그의 출생에는 큰 비밀이 있다. 책의 마지막에 비밀이 밝혀진다. 그의 생모는 15살 어린 소녀다. 전쟁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전쟁 고아다. 이리 저리 떠돌다가 원치 않은 아이를 베게 된다. 그 아이가 바로 <겨울이 지나간 세계>의 주인공 중년의 남성이다. 부모도 모르고 자신이 언제 태어난 지도 모르고 살아왔다. 고아원에서 줄곧 자라나 공사판에서 일하다가 독지가를 만나 대학을 다니고 그러다가 가족을 이룬다. 그의 아내도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는 잊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지"
상처를 잊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버린 부모를 잊어야지만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가족들에게 밝히지 않아야 떳떳할 수 있다고 여긴다. 철저히 감춰야 하고 죽는 순간까지 알려져서는 안 되는 특급 비밀이다. 그런데 그는 뇌졸중을 통해 뇌사 상태에 빠진 뒤에야 무의식의 세계 속에서 자신의 과거를 직시하게 된다. 자신이 태어난 곳이 책 표지에 나온 바로 그 지하철 안이다. 15살 생모는 그를 키울 자신이 없어 지하철 좌석에 놔두고 내린다. 무의식의 세계 속에서 만난 이름모를 여인들은 그의 생모이기도 하다.
저자는 <겨울이 지나간 세계>에서 독자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상처가 없는 사람들이 누가 있을까. 잊고 싶은 기억들이 없는 사람들이 누가 있을까. 기억조차 하기 싫은 쓰라린 추억을 간직하지 않은 사람들이 누가 있을까. 특히, 전쟁통에 수 많은 사람들이 불에 타 죽고 방금까지 같이 있었던 가족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결코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을 것이다. 꺼내고 싶지 않고 무덤까지 숨기고 싶은 기억일 것이다. 저자는 말 못할 상처와 아픔을 지닌 독자들에게 상처는 끄집어 내야 한다고, 상처를 지닌 사람들을 찾아가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고 말해주는 듯 싶다.
나에게도 말 못한 과거의 비밀이 있다. 누구에게도 쉽게 이야기 할 수 없는 비밀이다.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아내 말고는 모른다. 아니, 아내도 아주 깊숙한 곳의 비밀은 자세히 알 지 못한다. 덮고 싶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뒤돌아보면 과거의 아픔과 상처가 나에게는 자양분이 되었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원천이 되었다. 아픔과 상처를 들어주는 사람, 함께 공감해 주는 사람, 상처를 잊는 것이 아니라 딛고 일어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겨울이 지나간 세계> 에는 따뜻한 봄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