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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당연함을 버리다 - 고지마치중학교의 학교개혁 프로젝트
구도 유이치 지음, 정문주 옮김 / 미래지향 / 2020년 2월
평점 :
절판
"변혁을 가로막는 것은 법률이나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다. 부조리, 비효율적인 상황이 있는데도 아무 의심 없이 전례를 답습하는 교육 관계자들이 적지 않다"
학교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을 의심부터 해야 한다. 구도 유이치 교장(고지마치 중학교)은 학교 부임 후 '학교의 당연함' 부터 찾아내기 시작했다. 학교가 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어떤 것이 있었을까? 진학을 위한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와 같은 시험, 경쟁을 유발하는 체육대회, 교복 규정, 학생 규정, 학부모는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들어오면 안된다라는 규정 등 변화된 현실과는 동떨어진 당연함을 교직원들과의 회의를 통해 차근차근 개혁해 나갔다.
핀란드에서는 교사와 아이들 모두 입버릇처럼 '왜?' 라는 말을 한다. 유독 동아시아에서는 유교권 문화 탓인지 '왜?'라는 말을 반항이나 버릇 없음 취급한다. 학생이나 교사나 불합리한 상황이 학교에 존재한다면 개선할 수 있도록 학교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왜?' 라는 질문을 던지도록 유도해야 한다. 복종에 길들어진 학교 문화에서 쉽게 왜? 라는 말문이 쉽게 터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교장은 의도적으로 왜?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도록 권장해야 한다. 모두가 꺼려한다면 X맨을 정해 놓더라도 시도해 보자. 왜? 이것을 해야 되죠?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서 적절한가?
구도 유이치 교장은 어떤 문제 상황 앞에 이런 질문을 던진다.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서 적절합니까? ' 고지마치 중학교의 학교 목표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이 '사회에 나가서 더 잘 살아갈 수 있도록 ' 하는 것이다. 학생의 자율성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다. 자율성을 바탕으로 이질적인 집단 내에서 교류하기, 도구의 상호 이용을 지향한다. 만약 학생이 학교에 오지 않고 학교 밖에서 자신의 적성과 진로를 찾고 싶다고 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권장한다. 학교가 학생이 학교 오지 않는 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오해할 수 있는 대목이지만, 학생의 자율성을 존중한 결과 학교 밖 학생들이 결국 학교로 돌아오더라는 것이다. 고지마치 중학교는 인권을 존중하고 생명을 중시한다. 서로 다른 다양한 학생들이 모인 집단에서 갈등 생성은 당연한 귀결이다.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는가가 중요한 것이지 갈등을 없애거나 못 본척 하는 것은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이 된다고 말한다. 어떤 학교 행사든 학교의 목적에 위배된다면 그 수단은 다시 재고하도록 요청한다.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치루는 목적이 진학을 위한 것이라면 학교의 최종 목적인 자율적인 사회인 육성에 위배되는 것이므로 다른 방법으로 학력을 점검하도록 요청한다.
"개인에게 자기 희생을 강요한 나머지 개성을 인정하지 않는 조직은 본질적으로 강해질 수 없다"
교사들에게도 자발성을 요구해야 한다. 교장이라는 이름 하에 지시는 결국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서로의 합의 하에 학교 목적을 이루기 위한 다양한 의견을 수렴 후 스스로 움직일 수 있도록 권한과 책임을 부여해야 한다. 권한 위임은 신뢰의 표시다. 동질성을 중시한 나머지 이질적인 사람을 따돌리거나 교육 또는 지도를 통해 상대를 바꾸어 놓으려는 리더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교사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창조해 갈 수 있도록 여유를 드려야 한다. 온전히 수업과 생활 교육에 전념할 수 있도록 근무 조건을 개선시켜야 한다. 교사가 학교 내에서 움직이는 데 시간을 불필요하게 소모한다면 공간 혁신을 통해서라도 최대한 피로를 덜 느끼게 조정해 주어야 한다. 교장의 몫이다. 교사마다 개성이 다양하다. 획일적으로 통일시키려 든다면 낭패를 당하기 쉽다. 시대가 변했다. 교사마다 다양한 개성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변화를 가로막는 것은 법률이나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다. 교사가 움직이지 않는들 어떻게 학교가 변화될 수 있겠는가?
서로가 다른 것은 당연한 것이다. 서로 달라야 좋은 시대다. 의견 차이도 당연하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합의하는 것이 중요하지 갈등도 필요도 없는 문제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역이 운영하는 학교 = 학교, 학부모, 지역 주민이 책임과 리스크를 동시에 짊어지는 학교"
학교 운영위원회 회의는 청문회가 아니다. 간혹 학교 운영위원회 회의에 참석하시는 학부모 위원들이 '소비자'의 입장에서 따지고 들거나 학교에 이런저런 주문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학교와 학부모 간 관계를 보면 학부모가 '소비자', 학교가 '서비스 사업자' 로 변해가고 있는 느낌이다. 학부모의 불만을 최대한 받아들이고 대응하다보면 학생의 자율, 학교의 자율을 뺏기는 결과가 나타난다. 학부모가 '손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학교의 주체가 되지 못한 결과다. 학부모들에게도 오너십을 부여하고, 같은 목적을 공유하며, 합의를 이뤄내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 말보다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고지마치 중학교는 불가능한 현실을 변화시켰다. 학교, 학부모, 지역 주민이 오너십을 가지고 책임과 리스크를 동시에 짊어지고 학교를 변화시키고 있다.
"학교 문화가 세상의 상식을 벗어나 있으면 안 된다"
예전에는 학교가 사회의 최상 문화를 선도했다. 교사가 지역 주민들보다 앞선 시대 감각을 가지고 선도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반대가 됐다. 세상의 상식 수준에 못치는 경우가 종종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다. 구도 유이치 교장은 고지마치 중학교 교직원 규칙을 개정하는 가운데 직원들의 반발을 샀다고 한다. 학교에 걸려오는 전화 조차 친절하게 받지 못하는 학교가 어떻게 세상을 선도할 수 있냐면 전화받는 태도부터 변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학교 내에서 통상 직원들 간에 부르는 '선생님' 이라는 호칭도 과연 옳은가를 생각해 보도록 했다. 고지마치 중학교에서는 그냥 '씨'라고 부른다고 한다. 학생들 앞에서 스스로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물론 이 예는 특수한 예다. 학교 사회에서 거부감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제한적 조건 속에서 창조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할 임무가 교사에게 있다. 학생 한 명 한 명이 소중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학생의 성장과 변화를 위해 제한적 조건 속에서도 창조적으로 문제점들을 해결해야 한다.
교사의 가치는 외부적으로 주어진 직업적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사로써 가진 생각과 마인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