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아내의 등장.
원숭이 귀신으로 나타난 실종된 아들,
숲 속 원숭이 귀신들.
메기왕자(왕자?)와 인간 공주의 짝짓기.
분미 아저씨의 마지막 날 하루,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비일상적 사건의 연속...
영화는 이해할 수 없는 초현실적인 사건이 개연성없이 벌어진다.
영화.
내 상식 밖의 현상에 의문부호를 달 필요도, 이유도 없다.
아! 귀신이 나왔구나, 음 메기랑 하는구나, 별스러운 장면들을 통해 무엇인가 암시하겠지 그 메세지를 찾아보자, 각오를 다지며 집중 집중, 했으나... (영화를 보면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영화관을 나와 뒤늦게 팜플렛을 훓어보니 그냥 느껴보라,는 아티찻퐁... 이라 기억되는 감독의 당부를 읽고서야 쓸데없는 고생을 했구나, 라고 생각을 했다.
나는 추리소설을 보면서 범인 찾기를 좋아하고 꽤나 잘 하는 편이다.(에헴~)
드라마를 보면서도 극 전개를 예측하길 좋아한다.
분명 느끼기 보다는 사고하고 추론하길 좋아한다. 느껴,보라니...아 어렵다.
예술영화 예술영화... 만만히 볼 게 아니었다.
분명한 서사적 플롯 전개가 없는 <엉클 분미>를 보고 감탄하는 사람들은 감독 말대로 영화를 느끼고 온 사람들일 것이다. 부럽다.
의심이라기 보다는 의문(?)
보편적 이야기 구조를 따르지 않은 이런 예술영화는 보는 사람의 입장과 시선에 따라 달리 보일 수 밖에 없을텐데 어떻게 같은 감동을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류의 영화를 보고 같은 감동을 할 수 있을까?
'협의의 감동'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같이 느낀다,라는 것은 무언가 공유했다는 말이다.
형식은 보편적이지 않고 서사는 일관성이 없고 남는건 정서인데 태국 북동부라는 특정지역의 정서와 특정민족의 신비주의를 그렇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집에 오는길에 영화를 복기했다.
알 수 없는 존재들이 우리 곁에 있다.(그럴 수 있겠다 싶다)
분미 아저씨는 전생을 기억하는 남자다(부제)
영화 시작에 한 마리 소가 나온다.
도망나온 소가 주인에게 붙들려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어떤 존재(분미 아저씨의 아들로 추정되는 원숭이 귀신)
분미 아저씨의 마지막 하루, 그리고 전생을 느낄 수 있는 어떤 장소.
영화는 -나는 그 곳에 가면 전생에 다른 존재였던 나를 느낄 수 있다.- 라는 자막이 나오고 뒤이어 소 한마리가 숲 속 어딘가로 뛰쳐가며 시작한다.
소는 숲 속을 헤메지만 곧 농부에게 붙들리고 어떤 존재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포스터의 그 눈 빨간..)
소는 분미의 현생이었던 것이다.
엉클 분미는 죽었고 소로 환생했다.
소는 인간으로서의 생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있었고 아들과 아내를 기억할 수 있는 그곳으로(분미 아저씨가 죽은 전생을 기억하는 곳) 가려했던 것이다.
소(분미)가 주인인 농부가족의 행복한 모습을 바라보던 중에 도망을 치게된 것도 소가 전생의 가족을 그리워했음을 암시한다.
다시 농부에게 붙들려 가는 소(분미)를 지켜보는 존재는 분미(소)의 아들이었던 원숭이 귀신이다.
원숭이 귀신이 된 분미의 아들은 시간의 개념이 또 다른 존재다. 다른 존재가 된 아들조차 인간이었던 때를 그리워하고 있기에 소가 된 아버지를 지켜본다. 과거를 잊지 못하는 존재들의 고통을 생각할 수 있다.
이제 영화는 소가 기억하는 분미의 생을 보여준다.
소의 추억. -분미의 마지막 하루.-
영화에서 분미의 마지막 하루는 초자연적인 일과 일상적인 농촌의 풍경이 매우 잘 섞여있는데 이것은 실재하는 모습이 아니라 소의 기억 속 모습이다. 따라서 일상적인 태국 농촌의 모습이 소에게 비현실적일 수도 있고 인간의 시선에서 초자연적인 일들이 소에게도 비현실적일리 없는 것이다.
소의(창조자) 기억에서 재생된 세상은 놀랍게도 자가발전을 하게 된다.(소를 생각을 현제시점의 화자로 본다면 분미의 하루는 이미 과거)
분미가 죽은 이후에 분미 주변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설명할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소의 기억에 의해 생긴 공간의 초자연적인 현상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모습일 수 있다.
소가(분미) 만든 의식 속 공간이지만 분미가 없어져도 이미 생겨난 존재들로 인해 공간은 존속 되고 발전하게 된다. 소의 전생에 대한 기억은 분미(소)의 죽음까지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이후의 장면을 담고 있다.
놀랍게도 소의 의식에서 생성된 존재들은 소의 의지를 벗어나 잔존하게 된다.
존재의 의식에 의해 생겨나 무의식의 공간에 남아진 존재의 찌꺼기들은 스스로 실재하는지 누군가의 의식의 산물인지 자각할 능력이 없다. 다만 존재할 뿐, 생겨났으니 존재할 뿐이다. 소의 의식구조가 탄탄하지 못하다면 곧 소멸 되겠지, 아니면 영원히 갇혀있거나.
분미가 죽은 후 남겨진 사람들의 자기 분열(스님과 분미 처제의 분열)은 갇힌 세계의 존재라 설명된다. 어쩌면 창조자에게 잊혀진 존재들이 소멸하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
메기와 공주...
분미 이전의 어떤 생에서 소는 메기었다. 미물에서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거듭나게 된 어떤 존재.
그 때부터 생긴 전생을 기억하는 능력, 능력 이상의 능력. 그리고 그 곳, 소가 가려고 했던 곳.
추한 인간조차 동경했던 다른 존재(메기)는 상처받은 인간과의 교합을 톻애 다른 존재(인간)로 환생할 수 있었다.
<엉클 분미>의 감독이 이야기 하고자 했던 다른 존재들.
하지만 그 역시 인간인지라 인간이라는 존재를 다양한 존재들의 중심에 놓고 있지는 않은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장 추하고 상처 받은 인간을 통해 인간이 되는 메기.
인간으로서의 삶에 미련을 가진 소, 인간이었던 전생에 대한 추억.
다른 존재에 대한 동경으로 스스로 원숭이 귀신이 된 분미아들의 인간 세상에 대한 미련...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검증된 작품. 이해 하고 싶은 강박. 특히 '나는' 이해하고 싶은 바람.
관대하게 볼 수 밖에 없다.
말이 되든 안 되든 영화인데 그게 뭐가 중요한가. 분명한 메세지가 담겨 있다고 믿고 있는데 말이다.
천재 감독의 메세지를 전달 받기 위해 무장해제다.
평론가들과 정서를 공유하기 위해선 나도 벌거벗은 임금님의 옷이 아름답다 감탄을 할 수 밖에 없다.
탄성 소리... 오션스
비명... 올드 보이
흐느낌...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웃음... 주성치 영화들
비웃음... 용가리
이것이 공유되는 정서다.
<엉클 분미>를 보면서 함께 느낀 것은 힘겨움이었다.
엉클 분미.. 고도의 집중력과 인내심을 발휘해서 본 영화.
나는 주변의 하품소리와 힘겨운 뒤척임을 느끼며 정서적 유대감을 느꼈다.
영화 너무 좋았어,라는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영화관의 분위기에서 말이다.
추석 날 <엉클 분미>씩이나 보러온 사람들도 그랬다. 착각인지는 몰라도 다들 힘겨워하는 것 같았다.
소가 분미다. 라는 해석은 나의 해석이다. 아라찻퐁 감독의 말대로 영화를 느낀 것,은 아니고 나름의 추리를 한 것이다. 뭐 그럴 듯 한 것 같은데 아님 말고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