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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저넌에게 꽃을 (아트 리커버 에디션) - 운명을 같이 했던 너
대니얼 키스 지음, 구자언 옮김 / 황금부엉이 / 2021년 4월
평점 :
"분노와 의심이 내 주위의 세상을 향한 첫 번째 반응이었던 것이다"(93).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내 인생의 책'으로 꼽았다는 이 책을 읽으며,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란 얼마나 대단한 착각 속에서 오만하게 살아가는 '이기적인 개새끼(개에게 미안)'인가 하는 자괴감이 들어 슬펐습니다.
지능이 낮아 어눌한 '찰리'는 항상 똑똑하고 싶고 바보가 아니기를 바랐습니다. 뇌수술로 인간의 지능을 높이는 실험을 하고자 했던 과학자들은 찰리를 실험대상으로 선택합니다. 찰리가 선택된 것은 낮은 지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배우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앨저넌'은 찰리와 똑같은 실험의 대상이었던 쥐의 이름입니다. 앨저넌은 수술 후 높은 지능을 유지하는 최초의 동물이었고, 앨저넌과 미로 찾기 대결에서 늘 지기만 했던 찰리 또한 뇌수술 이후, 지능이 좋아진 최초의 인간이 됩니다.
찰리가 똑똑해지고 싶었던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친구들을 사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찰리는 자기가 주변 사람들처럼 똑똑해지면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들과 더 잘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찰리가 똑똑해질수록 더 많은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찰리는 똑똑해질수록 가슴속이 텅 빈 것처럼 느꼈습니다. 사람들의 겉모습 뒤에 무엇이 있는지가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사람들의 웃음이 그를 향한 미소가 아니라, 멸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과 함께 웃었던 자신을 떠올리며 그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지금까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해왔는지 진실을 알아낼수록 그는 친구라고 믿었던 사람들을 잃어갔습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찰리가 자신들보다 열등하다고 느꼈을 때는 괜찮았는데, 그 바보가 놀랍게 성장하자 그들은 위축되었고, 그 '바보' 앞에 자신들의 무능력함이 드러날수록 똑똑해진 찰리를 증오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내게 지식과 이해력이 있다고 미워한다"(163). 이것은 찰리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기대했던 방식으로 날 자랑스러워하지는 않는다"(105).
지능이 천재적 수준으로까지 좋아진 찰리는 그가 천재적일수록 새로운 친구도 사귈 수 없었습니다. 누구도 그의 지식을 따라오지 못했고,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찰리이 높은 지식은 지식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모멸감을 안겨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똑똑하게 말할수록 사람들은 그에게 적의를 느꼈고, 찰리는 똑똑해질수록 모든 즐거움이 사라져갔습니다.
'나도 사람이에요, 사람. 부모도 있고, 지난 일도 기억하고, 과거도 있어요. 그리고 당신들이 나를 저 수술실로 옮기기 전부터 난 존했다고요!"(238)
찰리와 유일하게 소통하는 과학자들에게도 찰리는 하나의 실험대상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실험 쥐와 같은 취급을 한다는 사실에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그의 높아진 지능을 관찰하고, 놀라고,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조차, 그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지 않다는 사실이 그를 고독하게 만들었습니다. "니머 교수가 나를 창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과연 어떻게 그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215)
찰리는 고독해지고 말았습니다. 과학자들이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했지만, 그것이 아무리 근사한 일이라고 해도, 그를 실험실 동물처럼 다룰 권리는 없다는 사실을 이해시킬 수가 없습니다(357).
"들꽃 한 다발을 앨저넌의 무덤에 올려놓으며 나는 울었다"(372).
지능이 낮은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학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학대의 의미조차 이해할 수 없음을 비웃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를 우리는 과연 지능 있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 어줍잖은 '지능'이 우리의 삶을 스스로 고독 속으로, 지옥 속으로 몰아넣고 있음을 봅니다.
이 세상에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한 사람, 의미 있는 친구이고 싶었던 찰리에게 유일한 친구는, 같은 운명을 지녔던 '앨저넌'뿐이었습니다. 찰리는 기꺼이 앨저넌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누가 더 똑똑한지 앨저넌과 경쟁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앨저넌과 함께 놀기를 원했던 찰리는, "바보 같고 감상적이지만", 앨저넌이 죽었을 때 소각로에 넣어져 태워질 앨저넌을 뒷마당에 묻어주었고, "들꽃 한 다발을 앨저넌의 무덤에 올려놓으며" 울었습니다(372).
누군가는 실험실의 '쥐'였던 앨저넌의 무덤에 꽃을 올려놓는 것을 어리석게 여겼고, 생쥐와 친구였다고 말하는 찰리를 미친 사람 취급했지만, 찰리의 행동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능이 낮은 사람이 보통 사람들과 친구가 되기 위해 부단히 애쓸 것이 아니라, 지능이 높은 사람들이 그들과 친구가 되기 위해 부단히 애써야 하는 것 아닌가. '지능'은 그렇게 쓰라고 신이 우리에게 허락한 능력이 아닐까. 지능이 높은 사람이 서로 소통하는 방법을 더 잘 찾을 수 있을 텐데도, 우리를 왜 그 노력을 지능이 낮은 사람의 몫으로 여기는가. 우리는 어째서 이처럼 엄청난 모순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것인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왜 <앨저넌에게 꽃을>이라는 이 책을 '내 인생의 책'으로 꼽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사랑을 갈구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책입니다. 그 사랑 없음으로 인해, 지능과 지식이 아무리 높아져도 우리는 사실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아프게 깨닫게 해주는 책입니다. 시합만 할 줄 알았지, 함께 노는 법을 잊어가는 인간은 점점 더 고독해지리라는 것을 슬프게 보여주는, 애가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