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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오수진 옮김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18년 3월
평점 :
사랑에 빠진 자들이나 미치광이는 머릿속이 들끓어
온갖 모양을 만들어내는 상상력으로 냉철한 이성으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해내오.
미치광이나, 사랑에 빠진 자나, 시인은 하나같이
상상으로 가득 차 있는 자들이오.
(테세우스, 145).
깨어보니 꿈이었지만 한바탕 꿈같은 사랑에 빠져본 적이 있다면, <로미오와 줄리엣>만큼이나 셰익스피어의 이 희곡을 사랑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 여름밤의 꿈>이라는 제목은 많이 들어봤지만, "여름이면 세계 곳곳에서 상연될 정도로 인기가 많다"는 이 작품을 한 번도 제대로 감상한 적이 없습니다. 몇 해 전, <무한도전>에서 도전 달력모델을 위해 연기했던 <한 여름밤의 꿈>을 보며 줄거리라도 제대로 알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드디어 <한 여름밤의 꿈>과 만났습니다.
<한 여름밤의 꿈>은 1) 아테네의 공작 테세우스와 전쟁 포로가 된 아마존 족의 여왕 히폴리타의 결혼, 2) 라이샌더를 사랑하는 허미아, 허미아를 사랑하는 드미트리어스, 그런 드미트리어스를 사랑하는 헬레나의 엇갈린 사랑, 3) 숲의 요정 오베론 왕과 티타니아 여왕의 갈등, 4) 그리고 아테네 공작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연극을 준비하는 직공들의 이야기가 서로 맞물려 공존하는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사랑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법,
그래서 날개달린 큐피드를 장님으로 그리지.
사랑하는 마음은 판단력이 눈곱만큼도 없어
날개만 있고 눈이 없어서 무턱대고 서두르기만 해.
(헬레나, 38).
가장 극적인 장면은 아버지의 결혼 반대로 사랑하는 이와 야반도주를 감행하는 라이샌더와 허미아와, 이들을 좇아온 드미트리어스와 헬레나가 장난꾸러기 요정 퍽의 실수로 한바탕 소동을 겪는 장면일 것입니다. 허미아를 놓고 사랑을 다투던 라이샌더와 드미트리어스는 갑자기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처럼, 허미아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헬레나에게 열정적으로 사랑을 맹세하기 시작합니다. 헬레나는 갑작스러운 이 사랑의 맹세를 모욕으로 느낍니다. 또 숲의 요정 오베론 왕의 마법에 걸린 티타니아 여왕은 당나귀 머리로 변해버린 인간 '보틈'(직조공)에게 홀딱 반해버리고 맙니다. 그들은 사랑의 마법에서 풀려난 후, 이렇게 고백하지요.
이 자들이 잠에서 깨면, 이 모든 소동이
한낱 꿈이요 무익한 환상으로 보일 거야.
(오베론, 116-117).
한때 겉잡을 수 없었던 사랑의 열기가 결국 "한낱 꿈이요 무익한 환상"임을 깨달을 때만큼 쓸쓸한 순간도 없을 텐데, 그것이 요정의 실수로 잘못된 사랑임을 알고 있었던 독자들은 오히려 사랑의 마법에서 풀려난 연인들을 보며 안도하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진실한 사랑이 잘못 되고, 잘못된 사랑이 제대로 된 꼴이구나"(97-98)라는 걸 알아채는 건 늘 당사자가 아니라, 제삼자라는 것이 사랑의 함정이지요.
나의 오베론! 별 희한한 꿈을 다 꾸었어요!
내가 당나귀와 사랑에 빠져 있었나 봐요.
(티타니아, 130).
그러나 이 보다 더 씁쓸한 순간은, 꿈에서 깨고 보니 내가 사랑했던 이가 사실은 '당나귀'에 지나지 않았다는 황당한 사실일 겁니다. 얼마 전, 어느 드라마에서 "너 같은 놈을 좋아했다는 게 너무 쪽팔려"라는 대사가 나오던데, 누군가를 사랑했던 기억이 부끄러워지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의 배신이 있을까 싶습니다. 이 작품을 쓴 연도가 1595년경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그때 벌써 사랑의 이런 감정까지 담아낸 셰익스피어가 새삼 진정한 대문호로 느껴집니다.
여러분, 이 보잘 것 없는 허황된 연극이
한낱 꿈으로 보인다 해도
나무라지 말아주세요.
(퍽, 173-174).
어찌 보면, 정말 허왕되기 그지 없는 한바탕 소동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미치광이나, 사랑에 빠진 자나, 시인은 하나 같이 상상으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이 아름답게 와닿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5)는 <한 여름밤의 꿈>은 '낭만 희극' 또는 '축제 희극'으로 불린다고 합니다. 이성과 감정, 현실과 꿈의 세계가 공존하는 <한 여름밤의 꿈>은 상상력이 가진 힘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더불어 이 작품을 연극이 아니라, 희곡으로 만난다면 독자 스스로도 행복한 상상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깨어있는 거야?
아직도 잠에 빠져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아.
(드미트리어스, 138).
"최대한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려고 노력"했다는 이 책(한국외국어대학교 지식출판원)은 셰익스피어에게로 최대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번역본으로 느껴집니다. "독서의 방해를 막기 위해 주석을 초최대한 자제하고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분만 각주로 처리하였다"(6)고 하는데, 각주가 있어 작가(원작)의 본래 의도를 알 수 있어 좋았습니다. 한 편의 연극과 함께 좋은 강좌를 듣고 난 기분이 듭니다. <한 여름밤의 꿈> 공연을 찾아, 오랫만에 연극 나들이를 나가고 싶은 기분입니다. 더불어, 이를 계기로 셰익스피어 전집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