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 가족
그레구아르 들라쿠르 지음, 이선민 옮김 / 문학테라피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가족보다 우리 자신을 더 꿈꾼 첫 세대, 개인주의 가족.


"가족보다 우리 자신을 더 꿈꾼 첫 세대"의 가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제목만 보고 제가 그린 <개인주의 가족>의 그림은 이랬습니다. 가족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가족보다 자기 자신을 꿈꾸느라 바쁜, 콩가루는 아니더라도 모래알 같은 가족들. 적당한 무관심과 적당한 메마름을 원하는. 그런데 완전히 헛짚었습니다. 가족에게서 '도망치고', 가족을 '극복하려는' 사람에게도 결국 가족이 필요하다는 것, 지긋지긋하고, 원망스럽고, 아프고, 짐스럽고, 고통스러워도, 사랑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가족이라는 것, 지겹다면서도, 힘들다면서도 그 어려운 걸 자꾸 해내려 하는 것이 우리라는 걸 이 책은 너무도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인주의 가족도 결국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가족은 왜 그리 힘이 쎈 것일까요? 



타인이 바라는 꿈들이 늘 우리를 몹시 고통스럽게 하는 법이다(38).

주인공 에두아르는 가족들의 한마디에서 평생을 놓여나지 못합니다. 일곱 살에 쓴 네 줄의 시로 그는 "우리 가문의 작가님"이 되었고, 그 한마디가 에두아르의 인생을 결정지어버렸습니다. 홉 살에는 "난생 처음 '반짝 천재'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더 이상 아무것도 쓸 수 없었을 때도, 무엇인가를 써보려 했을 때도, "격렬히 소용돌이치는 스무 살에 침을 뱉으며" 소설을 버렸을 때도, 카피라이터로 많은 돈을 벌었을 때도 그를 불행하게 했던 것은 "우리 가문의 작가님"이라는 한마디입니다. 가족의 기대와 실망 사이에서 살아가는 우리, 가족의 기대따위, 가족의 실망따위 무시하면 그만이라고 아무리 뻗대보아도, 할 수가 없어서 그렇지 할 수만 있다면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지 않은 '개인'이 있을까요? 가족의 기대가 독이 되는 건, 내게 기대를 품은 그들 때문이 아니라 그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는 나의 지나친 열망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가족이 나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실망도 한다는 건, 나 때문에 기뻐하고 나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고, 그 기쁨과 슬픔이 내 인생의 큰 의미가 되기에 가족은 힘이 쎈가 봅니다.



"우리와 아빠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있으며 행복해하는 엄마의 모습이, 마치 우리에게 무엇인가 호소하고 있는 듯했다. 엄마는 너희 없이도 살 수 있다고, 그러니까 우리도 그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고, 언젠가는 우리가 더 이상 지금처럼 지낼 수 없는 날이 올 거라고. 엄마의 그 웃음소리가 지금은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어도 언제든 해체될 수 있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금이 갈라지는 소리를 우린 끝내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족은 영원할 수 없다고"(20).

그런데 이렇게 힘이 쎈 가족이 왜, 어떻게 해체되는 것일까요? 개인주의 가족에서 발견한 가장 큰 원인은 잘못된 결혼입니다. 서로에게 애정이 없는 아빠와 엄마가 가정 해체의 가장 직접적인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가 서로 다른 꿈을 꿀 때, (개인주의) 가족은 불안해집니다. 그리고 상처받은 개인이 길러지지요. 이 상처는 힘이 쎕니다. "부모가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면, 자식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26).



"어째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가족을 이루지 못하는 거예요? 아빠랑 작은 오빠는 왜 떠난 거예요? 두 사람은 떠난 게 아니라, 그들 스스로 자기 안에 숨은 거란다. 숨을 거면, 차라리 우리 집에 숨으면 좋잖아요, 클레르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두 사람 찾으러 가요, 데리러 가자고요"(57).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가족은 쉽게 해체되지 않는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기숙학교로 보내진 뒤 홀로 생활하는 에두아르, 정신병원에 맡겨진 남동생, 행복한 결혼을 꿈꾸었지만 공주님이 되지 못한 여동생, 자신을 구원할 사랑을 기다리는 엄마, 가족을 떠난 아빠까지, 그들은 '각자의' 행복을 찾지 못합니다. 그리고 함께했던 가족을 그리워하지요. 사랑에 대한 갈망은 결국 가족으로 구현되기 때문에 가족은 힘이 쎕니다. "엄마가 식탁에 앉으러 가면서 아빠의 목을 꼭 한 번 껴안는 모습을 보는 것, 그게 바로 행복 아니겠는가"(81).


"엄마는 에두아르 네가 언젠가 글을 쓸 거란 걸 알아, 우리가 겪은 균열과 두려움, 그 모든 것을 다 얘기하겠지,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는 말을 네가 꼭 찾아내렴"(39).

에두아르처럼 프랑스의 유명한 카피라이터 출신인 작가는 에두아르가 찾으려 했던 그 말을 찾았을까요? 개인주의 가족이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는 말말입니다. 그 말이 이 책 안에 있었던가, 작가가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인용되어 있던 리오넬 뒤루아의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책이 지닌 파괴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내 주변에 있는 가장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는 방법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나(ME)를 뒤집으면 우리(WE)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가족이라는 짐'을 집니다. 사랑은 나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기에, 가족은 짐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뒤집어 우리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짐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져야 할 짐이 아니라 나를 위해 그들이 존재하기를 바랄 때, 가족은 해체되는 것입니다. 가족 안의 상처를 치유하고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는 말, 이 책에서 찾은 나의 대답은 "미안해, 내가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어"입니다.



그레구아르 들라쿠르, 이 작가의 작품이라면 망설이지 말고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번역서인데도 글의 흡입력이라는 것이 이토록 강렬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제대로 맛보게 해주는 작가입니다. 아름다운 글에 치유하는 힘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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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진 2017-02-16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요약글 잘 보고 갑니다!

백범 2017-08-06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금 당장은 아니되 한세대쯤 지나면 한국도 그와 같은 모습을 볼 것 같습니다.

프랑스나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이탈리아 같은 사회들이 아직까지는 꽤 낮설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