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때문에 힘들 때 제가 당신을 바라보게 하시고,
저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고통이 드러낼 때
하나님이 제 전부이심도 깨닫게 하옵소서.
주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십니다.
무엇이 찾아오든 주님에게서 옵니다.
무슨 일이 다가와도 제가 주께로 가게 하소서.
<한밤을 걷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한판 씨름이기도 합니다. 코로나19로 갑작스럽게 가족을 잃은 신앙인이라면, 죽음 그 자체에 직면하는 일보다,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이 더 고통스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상황을 허락하시고, 이 상황을 지켜보시는 전능자의 '뜻'을 이해하려는 몸부림이 더 고통스러울테니까요. 코로나19 이후, 카페를 경영하며 한 달, 한 달이 고통스러운 동생도, 망해가는 가게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한밤을 걷는 기도>에서 역병으로 죽어가는 한 사제가 절규하듯 소리치는 것도 그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입니까?"(20)
"나는 태어날 때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매일 그 이유를 알게 된다"(29).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무엇보다 우리 모두가 죽을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삶의 유희를 즐기기에 바빴던 현대인들에게, 코로나19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고통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실존적 현실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주님은 이 병상을 제단으로 만드셨습니다"(61). <한밤을 걷는 기도>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가장 큰 질문, 가장 핵심적인 질문,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마도 "우리는 무엇에 소망을 두고 사는가?"일 것입니다. 결국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운명에 처한 우리들이 질병 가운데서도, 고통 가운데서도, 홀로 죽어가면서도, 낙담하지 않고, 위안을 얻고, 소망을 붙잡을 수 있는 길이 있는가?
"제게 회개를 허락하셔서 후회할 것이 없게 하신 것처럼 제가 두려워하지 않도록 제게 두려움을 주소서"(88). <한밤을 걷는 기도>는 죽을 준비, 즉 신자로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 임종에 어떻게 임할 것인가를 깊이 묵상하도록 이끕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은 질문이기도 합니다. <한밤을 걷는 기도>가 신앙인들에게 던지는 가장 큰 충격은, 죽음에 대한 새로운 시각입니다.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면서 던에게 전환점이 찾아왔다. 그는 죽음을, 삶을 영원히 망치는 질병으로가 아니라 삶이라는 질병을 다스리는 유일한 치료제,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려다주는 인생 여정의 마지막 단계로 보기 시작했다"(242). <한밤을 걷는 기도>는, 그것이 무엇이든, 역병이든, 죽음이든, 고통이든,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한다면, 그것은 선한 것이라는 사실에 눈 뜨게 해줍니다.
필립 얀시는, 선조들이 지옥을 두려워한 것처럼, 우리는 천국을 두려워한다고 말합니다(245). 언제부터인가 신앙인들에게조차 천국은 가상 세계가 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한밤을 걷는 기도>는 병상에 누워 죽어가는 한 신앙인을 따라, 우리도 마지막 날을 준비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소망 가운데로,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첫 발걸음이기도 합니다. 하루에 한 편씩 읽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해주신 영생을 묵상해볼 수 있기를 권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을 말씀하실 수 있으며, '영원'을 약속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진리 앞에 다시 전율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영광, 주님의 기쁨이 있는 곳에서
주님을 바라보며 영원히 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