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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평점 :
"아빠가 나를 여기 두고 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지만 내가 아는 세상으로 다시 데려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든다. 이제 나는 평소의 나로 있을 수도 없고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다"(17).
<맡겨진 소녀>는 여름 동안 친척 집에 맡겨지는 한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일요일, 차에 소녀를 태우고 왔던 아빠는 친절한 설명도 없이,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없이, 언제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도 없이, 낯선 곳에 아이를 맡기고는 떠나버립니다. 아이를 맡기며 아빠가 (아마도 아내의 먼 친척) 아저씨에게 한 말은, 애들 먹이는 게 골치라고, 이 아이도 먹을 건 엄청나게 축 낼 거라고, 그러니 일을 시키라는 것뿐이었습니다.
갑작스럽게 낯선 세상 안에 던져져 마땅히 설 자리가 없어 보이는 아이와 함께, 제 유년 시절의 기억도 소환되었습니다. 우리 집은 한창 공사 중이었고, 제법 가까운 곳에 살며 왕래가 잦었던 친척 아주머니는 번잡한 엄마를 위해 우리 4남매 중 한 아이를 데려가 며칠 맡아주겠다고 나섰습니다. 순간 가슴이 덜컥했던 건, 엄마가 (고민도 없이) 둘째인 저를 보내리라는 걸 예감했기 때문입니다. 몇 날이나 그곳에 있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그곳에 있는 동안 말 없이 지냈고, 친구도 없이 지냈고, 학교가 끝나고 오면, 바깥으로 난 그 집 담벼락에 기대어 언제 집으로 갈 수 있는지가 궁금했던 기억만 또렷합니다.
부모에게 따뜻한 돌봄을 받던, 그렇지 못하던 상관 없이, 아이가 낯선 집, 낯선 이에게 맡겨진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공포라는 사실을 새삼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공포의 순간이, 우리 안에 소리 없이 새겨져 있다는 것도 말입니다.
"아주머니의 손은 엄마 손 같은데 거기엔 또 다른 것, 내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것도 있다. 나는 정말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지만 여기는 새로운 곳이라서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25).
그런데 <맡겨진 소녀>는 이 낯선 곳에서 처음으로 애정 어린 보살핌을 경험합니다. 자기 집과는 다르게 여유가 있는 곳, 생각할 시간이 있는 곳, 어쩌면 여윳돈도 있을지 모르는 그곳에서, 아이는 겪어본 적이 없는 이 기분과 감정을 표현할,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합니다. 아이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이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둡니다. 그리고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하는 것처럼, <맡겨진 소녀>는 새로운 말로 그것을 표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첫날 밤 침대에 오줌을 싸도, 잘못이라고 야단하지 않고 모른 척 실수를 덮어주는 아주머니와, 매일 우편함까지 달리기를 시키며 기록을 확인해주는 아저씨와 있을 때면, 살가운 표현이나 다정한 말 없이도 편안했으니까요. 그리고 검은 바다가 요란하게 파도를 출렁이는 바닷가를 따라 걷던 밤, 깊은 곳에 발을 들여놓았나 싶었을 때, 아이는 아저씨의 목말을 타며 평안을 느끼고, 차가운 우물에 삼켜졌을 때, 아이는 아주머니가 정리해준 침대에 누워 아주머니가 가져다주는 레몬과 정향과 꿀을 넣은 따뜻한 음료와 아스피린을 통해 온기를 느꼈을 것입니다. (어쩌면 <맡겨진 소녀>의 평생에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물에서 건져준 사람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상상을 해봅니다.)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73).
<맡겨진 소녀>가 서늘하면서도 따뜻하고, 다정하면서도 냉정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떤 상처를 애써 위로하려 들기 않기 때문인 것같습니다. 이 책에서는 위로의 말들이 오히려 가시가 됩니다.
"불쌍하기도 하지." 아주머니가 속삭인다. "네가 내 딸이라면 절대 모르는 사람 집에 맡기지 않을 텐데"(34).
"그게 두 사람이 널 만나기 위해서 굴려야 했던 바윗돌이었나 보지"(64).
그래서일까요, 아이가 "아빠"라고 짧게 내뱉으며 이야기가 끝날 때, 아무도 쉽게 책을 덮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맡겨진 소녀>는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 예의'에 대해 가르쳐줍니다. 옮긴이는 이것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의 중요성"(102)이라고 정리합니다. 그동안 너무나 성급하게, 그리고 함부러 남의 아픔을 위로하려 했던 나를 반성합니다. 위로의 말이라 착각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쉽게 입에 올렸던 나를 반성합니다.
이 책을 추천할 적당할 말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이 책의 예리하고 독특한 느낌을 전할 말도 찾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클레어 키건'의 다른 작품들도 모두 읽어보고 싶다는 것과, 앞으로 그녀의 작품을 발견할 때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 같다는 말로 추천의 말을 대신하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이 작가는 24년간 활동하면서 단 4권의 책만을 냈고, 이 책이 초역이라고 하니, 일단은 이 책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