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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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나를 여기 두고 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지만 내가 아는 세상으로 다시 데려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든다. 이제 나는 평소의 나로 있을 수도 없고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다"(17).

<맡겨진 소녀>는 여름 동안 친척 집에 맡겨지는 한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일요일, 차에 소녀를 태우고 왔던 아빠는 친절한 설명도 없이,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없이, 언제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도 없이, 낯선 곳에 아이를 맡기고는 떠나버립니다. 아이를 맡기며 아빠가 (아마도 아내의 먼 친척) 아저씨에게 한 말은, 애들 먹이는 게 골치라고, 이 아이도 먹을 건 엄청나게 축 낼 거라고, 그러니 일을 시키라는 것뿐이었습니다.

갑작스럽게 낯선 세상 안에 던져져 마땅히 설 자리가 없어 보이는 아이와 함께, 제 유년 시절의 기억도 소환되었습니다. 우리 집은 한창 공사 중이었고, 제법 가까운 곳에 살며 왕래가 잦었던 친척 아주머니는 번잡한 엄마를 위해 우리 4남매 중 한 아이를 데려가 며칠 맡아주겠다고 나섰습니다. 순간 가슴이 덜컥했던 건, 엄마가 (고민도 없이) 둘째인 저를 보내리라는 걸 예감했기 때문입니다. 몇 날이나 그곳에 있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그곳에 있는 동안 말 없이 지냈고, 친구도 없이 지냈고, 학교가 끝나고 오면, 바깥으로 난 그 집 담벼락에 기대어 언제 집으로 갈 수 있는지가 궁금했던 기억만 또렷합니다.

부모에게 따뜻한 돌봄을 받던, 그렇지 못하던 상관 없이, 아이가 낯선 집, 낯선 이에게 맡겨진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공포라는 사실을 새삼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공포의 순간이, 우리 안에 소리 없이 새겨져 있다는 것도 말입니다.

"아주머니의 손은 엄마 손 같은데 거기엔 또 다른 것, 내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것도 있다. 나는 정말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지만 여기는 새로운 곳이라서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25).

그런데 <맡겨진 소녀>는 이 낯선 곳에서 처음으로 애정 어린 보살핌을 경험합니다. 자기 집과는 다르게 여유가 있는 곳, 생각할 시간이 있는 곳, 어쩌면 여윳돈도 있을지 모르는 그곳에서, 아이는 겪어본 적이 없는 이 기분과 감정을 표현할,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합니다. 아이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이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둡니다. 그리고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하는 것처럼, <맡겨진 소녀>는 새로운 말로 그것을 표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첫날 밤 침대에 오줌을 싸도, 잘못이라고 야단하지 않고 모른 척 실수를 덮어주는 아주머니와, 매일 우편함까지 달리기를 시키며 기록을 확인해주는 아저씨와 있을 때면, 살가운 표현이나 다정한 말 없이도 편안했으니까요. 그리고 검은 바다가 요란하게 파도를 출렁이는 바닷가를 따라 걷던 밤, 깊은 곳에 발을 들여놓았나 싶었을 때, 아이는 아저씨의 목말을 타며 평안을 느끼고, 차가운 우물에 삼켜졌을 때, 아이는 아주머니가 정리해준 침대에 누워 아주머니가 가져다주는 레몬과 정향과 꿀을 넣은 따뜻한 음료와 아스피린을 통해 온기를 느꼈을 것입니다. (어쩌면 <맡겨진 소녀>의 평생에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물에서 건져준 사람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상상을 해봅니다.)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73).

<맡겨진 소녀>가 서늘하면서도 따뜻하고, 다정하면서도 냉정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떤 상처를 애써 위로하려 들기 않기 때문인 것같습니다. 이 책에서는 위로의 말들이 오히려 가시가 됩니다.

"불쌍하기도 하지." 아주머니가 속삭인다. "네가 내 딸이라면 절대 모르는 사람 집에 맡기지 않을 텐데"(34).

"그게 두 사람이 널 만나기 위해서 굴려야 했던 바윗돌이었나 보지"(64).

그래서일까요, 아이가 "아빠"라고 짧게 내뱉으며 이야기가 끝날 때, 아무도 쉽게 책을 덮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맡겨진 소녀>는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 예의'에 대해 가르쳐줍니다. 옮긴이는 이것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의 중요성"(102)이라고 정리합니다. 그동안 너무나 성급하게, 그리고 함부러 남의 아픔을 위로하려 했던 나를 반성합니다. 위로의 말이라 착각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쉽게 입에 올렸던 나를 반성합니다.

이 책을 추천할 적당할 말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이 책의 예리하고 독특한 느낌을 전할 말도 찾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클레어 키건'의 다른 작품들도 모두 읽어보고 싶다는 것과, 앞으로 그녀의 작품을 발견할 때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 같다는 말로 추천의 말을 대신하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이 작가는 24년간 활동하면서 단 4권의 책만을 냈고, 이 책이 초역이라고 하니, 일단은 이 책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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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만난 흙 - 주기도문 흙 시리즈
오성택 지음, 정양권 그림 / 선한북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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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제게는 동화책으로 말을 배우는 29개월 되는 조카가 있습니다. 동화책을 반복해서 읽어주면 곧잘 따라 '말'하며, 책의 표지만 보고도 제목을 알아맞추고,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 아는 조카를 보며, 고슴도치 가족들처럼 조카가 언어 천재가 아닌가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동화책 덕분에 나날이 어휘도 풍성해지는 조카를 위해, 성경 동화를 찾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신앙교육을 하는 유대인들처럼, 우리 조카에게도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들려주고, 마음에 새기도록 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만난 흙>은 일단 조카가 즐겨보는 다른 동화책들과 크기와 분량이 비슷해서 어린 조카에게 이질감이 없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그림이 어른들의 눈길도 사로잡을 만큼 예쁘고, 색감도 뛰어납니다. (부모님들이 내용을 충분히 숙지한다면,) 그림으로 이야기를 설명해도 아이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스토리가 그림 안에 잘 담겨 있습니다.

이 모든 장점 위에, 이 동화책의 가장 탁월한 점은 바로 '내용'입니다. 어떤 성경 동화들은 성경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옮기느라 어린 아이들이 소화하기에는 자칫 어렵고 지루한 감도 있는데, <하늘을 만난 흙>은 성경을 그대로 옮기지 않으면서도, 성경의 진리를 더욱 풍성하게 이해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산 속에서 호랑이가 어흥어흥

물 위에서 흰고래가 찰랑찰랑

빙산에서 북극곰이 씰룩씰룩

모든 생명이 온 몸으로

하늘을 향해 찬양을 부르네요.

하나님의 천지창조 장면을 아이들에게 이보다 더 잘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요? <하늘을 만난 흙>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드신 '흙'이라는 피조물이, 주기도문의 위대한 선언을 따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흙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안내자는 '농부'입니다. '흙'은 농부의 안내에 따라 사막을 통과하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아시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인도해 주시는 분임을 배워갑니다. 그 길에서 "만나"를 만나 새 힘을 얻기도 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 앞이 캄캄해지기도 하고, 땡볕 아래 쓰러져 있는 '주다'를 구해주었지만 배신을 당하기도 하지요. 또 혼자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하늘에 계신 분을 찾아갈 수 있다는 "해라"의 꾐에 빠져 농부를 떠나는 바람에 큰 위기에 빠지기도 하지만, 흙은 농부의 사랑 안에서 이 모든 위기를 이겨내고, 용서와 화해를 배워가며, 흙은 비로소 깨닫습니다. 눙부와 함께 했던 모든 곳에 하늘 아버지도 함께 하셨음을 말입니다. 이 여정은 하늘을 만난 흙의 찬양으로 끝이 납니다. "위대하고 거룩하신 우리 아버지여!"

<하늘을 만난 흙>은 새롭게 쓰여진 <천로역정>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아이들에게 (믿음으로 떠나는) 모험심을 심어주기에도 좋고, 용서를 가르쳐주기에도 좋은 내용이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을 참된 예배자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점이 좋았습니다. 때로 부모님의 신앙적 열심이 아이들에게는 지루한 '잔소리'가 될 때도 많고,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이 딱딱하고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하늘을 만난 흙>은 그것을 가슴 뛰는 이야기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조카에게 이 책을 선물할 생각을 하니 벌써 기쁨이 넘칩니다. 이 책의 글과 그림을 맡은 작가님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이 세대의 아이들이 영상보다 책을 가까이할 수 있도록 양질의 신앙 동화를 많이 만들어주시기를 더불어 부탁드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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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사람들 - 신과 인간의 서사를 만든 첫째성경 인물 열전 EBS CLASS ⓔ
주원준 지음 / EBS BOOKS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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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인들은 독특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체험했고, 그 체험을 고대근동의 언어와 문화로 해석했고 전승했다. 첫째성경은 고대근동 세계의 문학이었다"(7).

성경이 진리라고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인류의 기원이나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한 지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올해 꼭 읽어야 할 책으로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습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고대근동학자가 들려주는 구약성경 속 인물들의 이야기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동시에 가장 거세게 공격도 받는 인류의 고전으로서, '구약성경'은 인류가 간직해온 신화와 역사가 만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고대근동학자는 고대근동의 저작물들과 구약성경을 비교하여, 구약성경만이 담고 있는 톡특한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춥니다. 인류가 간직한 보편적인 이야기의 얼개 속에 구약성경을 구별짓게 하는 매우 독특한 서사가 우리를 놀라게 하고, 성찰하게 하고, 새로운 길로 이끄는 힘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먼저, 저자는 구약성경을 '첫째성경'이라고 부르자는 제안을 합니다. '구약', 즉 "옛 약속"이라는 이름 때문에 이것이 "낡고 해진 약속의 책으로 다가온다면, 이 이름을 재고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5-6). 이 첫째성경의 사람들은 고대근동인들이었고, 고대근동인들은 신과 함께 살았습니다. 고대근동 세계는 신의 뜻과 지혜에 따라 살려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는데, 그런 세계에서 유독 독특함과 유일함으로 도드라져 보이는 부류가 바로 고대 이스라엘입니다.

고대 이스라엘만의 독특함과 유일함을 한마디로 하면, 첫째성경이 전하는 '전복의 서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첫째성경 속에는 다른 신화들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영웅이나 초인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괴수나 반신적인 존재도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첫째성경은 철저히 신과 인간에게만 초점을 맞춥니다. 무엇을 강조하는 것일까요? 바로 인간은 누구도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이며, 인간은 어느 누구도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과 인간의 격차는 절대적입니다. 첫째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우리 모두는 피조물일 뿐이며, 황제라 하더라도 신의 피가 흐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이야기에는 예외를 인정할 만한 사람이 없다. 최초의 남녀는 죄인이었고 모든 인간은 그들의 후손일 뿐이다. 남자든 여자든 왕족이든 영웅이든 사제든 평신도든 모두 이 점에서 다르지 않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 바로 그 점 때문에 인간은 신의 은총을 받아야 살 수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창세기의 가장 위대한 가르침이 아닐까 한다"(28).

그런데 문제는 인간과 신의 관계가 허물어졌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이 인류가 가진 문제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을 잃어버렸고, 이제 우리 앞에는 (신이 처음 목적한 것이 아닌)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곳은 에덴동산의 바깥입니다. 이제 (우리의 힘으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첫째성경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의 끝에는 인간과 동행하는 신이 남습니다. 새로운 세상에서 사는 일은 당연히 고통을 동반하지만, 그러나 그 길을 신이 동행해줍니다. 고통이 시작되었고 땀 흘리는 삶이 시작되었지만, "용서하는 신이 우리와 동반한다는 점이 큰 위로이고 희망이다. 이것이 이 이야기가 들려주는 가장 중요한 삶의 조건일 것이다. 그렇다면 신과 함께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할까. 그 답은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한다"(35).

고대근동신화와 '첫째성경'을 구별짓는 또다른 독특함은 '시선의 전복'입니다. 첫째성경에 등장하는 신은 그의 백성들에게 세상의 보편적인 시선들과 맞설 것을 요구합니다. 이 신은 백성들에게 위와 중앙이 아니라, 밖과 아래로 시선을 향하라고 말합니다. 야훼를 따르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조금씩 바꿔가는 개선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질서로 나아가는 것이었고, 그 일은 나를 넘어 밖을 향하고, 강함이 아니라 약자를 향하고,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자리를 향하는 발걸음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사람들>의 저자는 그 독특함과 유일함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대근동 큰 나라들의 건국신화를 보면 임금의 조상이 신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서 도시와 지역의 질서를 확립한 영웅적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런 조상을 두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은 대제국의 조상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그는 성읍을 건설하지도, 어느 도시를 쟁취하지도 못했습니다. 대규모 전쟁을 이끌어 승리한 일도 없고, 세계의 패권을 다투지도 않았고, 큰 신전을 짓지도 않았습니다. 큰 영토는커녕 어떤 성읍도 가지지 못했고, 스스로 임금이 되지도 못했습니다.

첫째성경의 신, 아브라함이 경험한 야훼 하나님의 중요한 특징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은 우르 사람이었지만, 그의 신은 우르의 성벽 밖에 있었습니다. 그의 신은 성 밖으로 나올 것을 요구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인류가 간직한 '금의환향'의 서사와 정반대의 길을 갔습니다. 그는 인생의 말년에 고향을 떠나, 온 가족을 데리고 평생을 떠돌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성 밖의 가정 공동체를 이끌었을 뿐입니다. "창세기를 전승한 백성들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일하고 아이를 낳아서 손수 먹이고 입히며 살아야 했던 성 밖의 가난하고 고단한 사람들이었다"(31).

이스라엘의 조상은 성 밖에 살던 작은 가정에서 출발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성 밖의 가난한 백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나라 없이 성 밖을 떠돌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을 믿는 사람들은 늘 어딘가로 나가야 했습니다. 성읍이 없던 무리는 왕궁도 신전도 없었고 당연히 그런 문물도 전해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신도 성 밖의 신이었다"(99). 야훼는 성읍도 없고 신전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야훼를 '나의 신'으로 고백하는 도시국가의 임금은 없었습니다. 야훼는 성 밖의 작은 무리가 섬기는 신, 변방의 작은 신이었을 뿐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은 가난한 가정과 함께 변방을 떠돌았습니다. 야훼는 스스로 성읍이나 신전에 거했던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정의 모든 사연과 일화에 개입하시는 분이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맨 처음 지상에 오신 자리는 거대한 궁궐도 높은 신전도 아니었고 작은 가정이었다(121).

"고대근동의 수많은 신들 가운데 성 밖의 작은 신이었던 야훼만이 현대로 전승되었고 다른 신들은 모두 잊혔다"(102-103).

저자는 이것이 고대근동 종교사의 역설이라고 강조합니다. 거대한 신전에 정주하여 큰 백성을 거느리던 신들은 전부 잊혔지만, 작고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여 그들과 함께 변방을 떠돌던 신만이 후대에 크게 확산되었다는 것입니다. 대제국을 세운 신들은 결국에는 모두 잊혔지만, 작은 가정에 오셨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온 인류의 이야기로 퍼졌습니다. 인류의 역사에 엄연히 존재하는 이 역설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사회에서 주류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 써내려가는 역사가 있다. 지금은 보잘것없고 초라해 보이지만 신은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실 것이다. 그건 인간이 아니라 신이 허락하는 것이다"(142).

분명 첫째성경은 고대근동의 신화와 문학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고대근동학자는 역설과 전복의 시선으로 '첫째성경'을 읽을 것을 권합니다. 첫째성경에는 많은 것이 뒤집혀 있기 때문입니다. 역자를 소중하게 여기고 소외된 변방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전복의 시선을 갖지 않으면, 낮은 자리에 임하시는 첫째성경의 신을 만날 수가 없끼 때문입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성경의 빈구석을 채워주는 책입니다. 저자는 주의 깊은 학자로서의 상상력과 신앙인으로서 성찰을 통해 (감추어진) 의미를 찾아줍니다. 지금까지 들었던 그 어떤 설교보다, 더 강렬하게 마음에 새겨질 것 같습니다. 구약성경을 진리로 믿는 자들에게, 그들이 믿는 바의 독특함과 유일함이 무엇인지, 성경을 통해 우리 인생을 해석할 때, 내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잘 가르쳐주는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계속 해서 밑줄을 그어가며 페이지마다 별표를 남발할 만큼 배울 것이 많았던 강의이며, 마치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성경을 풀어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던 것과 같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설교가들이 먼저 이 책을 읽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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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발자취를 따라서 CHRISTIAN FOUNDATION 4
피터 워커 지음, 박세혁 옮김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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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전하기 위해 선택받은 그분의 도구(그릇)임을 알게 된다(행 9:15, 48).

우리는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과 바른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가운데 가장 많은 기록물을 남긴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라 불린 사나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성경>을 제대로 읽고 깨닫기 원한다면, '사도 바울'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서>는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을 길잡이 삼아, 바울의 행적을 따라가며 그의 삶과 메시지를 재구성해보는 책입니다. 그리고 성경 속 그 장소가 '현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찾아가는데, 이 여정은 성경 속 그때 그 시간, 그 장소에 서 있었던 사도 바울을 다시 소환해내는 시간 여행이기도 합니다.

저자인 피터 워커는 '사도 바울'이라 불리운 사나이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평가를 기억하게 합니다. "그를 위대한 영웅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악당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18)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을, 천재 신학자로서 전세계적인 복음의 확장을 가져왔던 하나님의 그릇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예수운동을 배타적인 교리로 종교화(기독교화)한 인물로 보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사도 바울은 살았을 때도, 그가 가는 곳마다 이 '양극화된 관점이 촉발'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 사이에 갈림길이 되었습니다. 그가 나타나는 곳마다, 사람들은 그를 따라 예수 앞에 굴복하거나, 아니면 적대심 가운데 돌을 들어 그를 치려는 반응으로 갈리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서>를 통해, 거침없이 행진하는 사도 바울의 승리와, 동시에 끊임없이 가로 막히며 고난을 당하는 사도 바울의 눈물을 확인하게 됩니다.

성경 속에서 사도 바울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초대 교회의 존경받는 집사였던 스데반이 순교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서>는 이 여정을 다메섹에서 시작합니다. 그 길 위에서의 한 경험이 사도 바울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이 여정은 그가 다메섹 체험 이후로, 그 이전의 삶을 전혀 참된 삶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기억하게 해줍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그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마땅할 것같습니다. 저자는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정이 다시 한번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정이 될 것이라고 안내합니다. 부활하신 예수가 그에게 나타나 그의 발걸음을 인도했고, 이후로 그는 예수만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그의 종교적인 "열심"이 잘못된 것이었고, 율법에 대한 그의 헌신이 그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었으며,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심각한 죄인이었고, 이제 예수를 따르는 것이 그에게 최고의 목표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깨어진 다음 개조되었다. 그는 겸손해진 다음 높이 들림을 받았다. 그는 받을 자격이 없으며 기대하지 않았던 '은총'에 관해 말했다"(49).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서>는 예루살렘에서 로마에 이르기까지 성경 속 바울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재구성해줍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이 장막(천막) 만드는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 관해서 이런 설명을 덧붙여 줍니다. "그가 새로운 메시지아 종파의 추종자로 고향에 돌아왔을 때 그의 부모가 그에게서 상속권을 빼앗았을 가능성이 있다"(84). 또 그의 고향인 '다소'에서 보낸 기다림의 시간을 반추하며, 사도 바울도 부활하신 예수와 만난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을 것이라는 설명하는데, 이러한 저자의 해석이 사도 바울의 삶을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를 제공해줍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부딪히며 가던 길을 멈춰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빛을 본 후, 세상에 대해 눈먼 사도 바울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편에 섭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예수와 함께 걸으며 온 세상 가운데 새로운 길을 낼 것입니다.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서>는 독자들에게 한 가지 사실을 더 강력하게 일깨워줍니다. 그의 길도, 막힐 때가 있었고, 꼬일 때가 있었고, 원래 계획했던 곳이 아닌 곳으로 방향을 틀기도 하며, 원하지 않던 장소로 향할 때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뜻한 길이 막힐 때마다 주님이 열어주시는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고 죽을 뻔한 경험을 하기도 했지만, 위험하고도 외로운 시간이었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그 길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바울이 그랬듯이) 홀로 걷는 길이 아니라, 팀을 이뤄 '서로 격려'하며 걸어야 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가던 길을 멈추어야만 새롭게 보이는 길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서>는 가던 길을 멈추게 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은, 열심과 열정만 있었기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내 삶의 방향을 다시 점검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줄 것입니다. 이야기는 강력한 힘이 있는데, 하나님의 이야기만큼, 하나님과 함께한 사람들의 이야기만큼 내 삶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이야기는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사도행전'을 공부하는 분들에게 이 책은 필독서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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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러시아어 원전 번역본) - 죽음 관련 톨스토이 명단편 3편 모음집 현대지성 클래식 4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윤우섭 옮김 / 현대지성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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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죽은 건 그 사람이지, 내가 아니야'(11).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대하여, 해제를 맡은 윤우섭은 이렇게 말한다. "죽음을 끔찍할 정도로 명확하게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최초의 작품 중 하나다"(195). 지난 월요일, 나의 지인 중 한 명은 암이 온 몸에 얼마나 전이되었나를 알기 위해 수술대 위에 올랐고, 또 다른 지인은 그날 둘째 아들을 출산했다. 그날,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사실 삶과 죽음이 한 몸이라는 (끔찍한) 진실을 다시 기억해야만 했다. 생각해보니, 생(生)만큼이나, 죽음은 우리 도처에 있었다. 그러나 나의 죽음이 보이지 않았을 때는, 매일 목격하게 되는 그 누군가의 죽음이 절대로 나의 오늘을 즐겁게 보내는 데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몸이 늙고 있다는 것이 실감되어지고, '늙는다'는 것은 곧 '병든다'는 것이며, 하룻밤 잘 자고 나면 개운해지는 그런 날은 더이상 오지 않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니, 그 누구의 죽음도 전처럼 예사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니 <이반 일리치의 죽음> 앞에 나의 몸과 마음이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의식 속에서 멀리 치워 버리고 은폐해버린 죽음에 관한 진실이, 속도를 줄이지 않고 눈앞으로 충돌해오는 기분이 들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평범한 인간의 평범한 죽음을 보여준다. 몸의 불편함을 느끼고, 병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질병과 건강이 그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고, 그래서 아픈 사람, 죽은 사람, 완쾌된 사람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을 때조차, 죽음은 그에게 온전한 현실이 되지 못했다. "죽음이 꽃 뒤편에서 분명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는데도"(60), 탁자를 옮기는 일로 가족과 말다툼을 벌이며 화가 날 때는 죽음을 떠올리지 않았고, 죽음이 보이지 않았다.

 

 

"그 방을 위해, 그 응접실 장식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고 생각하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자기 병이 그때 떨어지면서 입은 타박상에서 비롯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60).

 

병에 걸린 지 석 달 만에 고통이 그를 덮쳐오고, 아편과 모르핀이 주사되기 시작했을 때에야 이반 일리치는 자기가 죽어가고 있음을 알았다. 비로소 죽음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때, 그를 덮쳐온 또다른 고통은 "어쩌면 내가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살지 않은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그는 자기 삶을 되집어본다. 그리고 그가 맞딱뜨리게 된 삶의 진실은,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향해 성실하게 올라가고 중이라고 믿었건만, 그의 시간은 내리막길을 달려 끝나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린시절, 학창시절, 첫 직장, 사랑의 기억, "결혼…. 그것은 아주 우연히 찾아왔고 이어진 실망 그리고 아내의 입냄새, 그리고 관능, 가식. 그리고 이 쓸모없는 직무, 돈에 대한 집착, 그렇게 한 해, 두 해, 십 년, 이십 년, 그리고 똑같은 삶, 그리고 다음은 죽음. 산 위로 올라간다고 상상했지만, 사실은 완벽하게 일정한 속도로 내리막길을 간 거였다. 그랬다. 다들 내가 산을 오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확히 그만큼 삶은 내 밑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은 끝났고, 죽음의 시간이다!"(80)>

 

 

"그는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놓쳤음을 깨닫는다. 그 순간부터 죽음의 공포가 이반 일리치를 가득 채운다. 올바르게 살지 않았음을 알았지만, 이 모든 것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 몰라서, 그것이 주된 고통이 된다. 자신은 "살아온 것"이 아니었고, 그에게는 남은 시간이 없음을 깨닫는다"(198).

 

거짓과 위선이 우리의 마지막 날들을 망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톨스토이는 자기 삶을 고칠 방법을 기독교 신앙에서 찾았다. 나 역시 기독교 신앙에 눈 뜨고 나서야, 반드시 죽을 운명이라는 한계가 우리의 삶을 무의미하고 역겨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지를 분별할 수 없는 우리의 한계가 삶을 무의미하고 역겨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을 알았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올바르게 살고 있는가를 다시 질문해본다. 이 땅에서의 나의 끝 날, 지금 이 삶의 마지막 순간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 말이다. 내 자신에게 '옳은 것'이 무엇인가를 묻고 조용히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을 위해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그리고 그 옳음의 절대 기준을 찾고 싶다면, 톨스토이를 인도했던 <성경>을 일독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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