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 제자들은 원래 신명난 상태로 야심차게 소림사로 달려왔었다. 예측할 수 없는 방주의 가공할 무공에 의지해 무림의 맹주 자리를 차지한다면 개방은 이제 소림파를 누르고 중원 무림의 우두머리가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런데 장 방주가 처음엔 정춘추를 사부로 모시더니 나중에는 소봉에게 당해 두 다리가 부러져버리자 다들 흥미를 잃고 무안해하고 있었다. 여전히 전임 방주였던 교복을 추앙하고 있던 제자들만이 암암리에 쾌재를 부를 뿐이었다. - P182

"소형 부자가 재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만 하면 당장 재하의 목숨을 취해 부인을 위한 복수를 해도 재하는 저항하지 않겠소."
이 말을 하면서 찌익 하고 옷자락을 찢어 가슴팍 살갗을 드러냈다. - P220

그때 창문 밖 회랑에 한 청포를 입은 깡마른 승려 하나가 빗자루를 들고 구부정한 자세로 바닥을 쓸고 있었다.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그 승려는 듬성듬성 하얗게 센 긴 수염에 행동이 느릿느릿한 데다 기력이 없어 무공을 지닌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 P223

그는 두 손을 옷소매 안에 넣고 암암리에 무상겁지를 펼쳐내 쥐도새도 모르게 그 노승을 향해 튕겨냈다. 그러나 지력이 그 노승의 몸 앞에서 3척 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마치 부드럽지만 딱딱하기 이를데 없는 한 겹 보호벽에 부딪힌 것처럼 피육, 교육, 피육 몇 번의 소리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다시 튕겨나오지도 않았다. 구마지가 깜짝 놀라 생각했다.
‘저 노승이 과연 괴상한 수작을 부리는구나. 괜한 허풍을 떠는 게 아니었어.‘ - P232

노승이 두 손으로 합장을 하고 말했다.
"아미타불, 불문의 성지이니 두 분 시주께서는 경솔한 행동을 삼가주시기 바라겠소."
그는 두 손을 들어 합장을 했을 뿐이지만 마치 한줄기 기운이 무형의 높은 담장을 쌓아놓은 듯 소봉과 모용복 사이를 가로막아버렸다. 소봉이 산을 밀어치우고 바다를 뒤집어엎을 듯한 엄청난 기세로 펼쳐낸 장력은 이 담장에 부딪히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 P239

사람들은 그제야 알아챌 수 있었다. 그 노승이 조금 전 장경각에서 두 사람을 후려친 것은 잠시 기식을 멈추고 심장이 뛰지 않게 만들었을 뿐이며 이는 중한 내상을 치료하기 위한 요결이었던 것이다. - P250

허죽은 또 정춘추를 소림사 계율원에서 관장하도록 했다는 말도 했다. 매년 단오와 중양 두 명절에 소림사 승려들이 그에게 영취궁의 알약을 먹여 생사부가 발작하는 고통을 해소시켜줄 것이며 그의 생사가 남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에 감히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를 수 없을 것이란 내용이었다. 소봉은 박장대소를 했다. - P296

"맞습니다. 여래께서 과거 왕사성 영취산에서 설법을 하셨으니 영취라는 두 글자는 원래 불법과 인연이 있는 것 아닙니까? 언젠가는 제가 영취궁을 영취사로 바꾸고 영취궁 내의 파파와 수수, 낭자들을 모두 비구니로 만들어야겠습니다." - P298

"어? 그 추팔괴는 어디 갔지?"
사람들은 조금 전 허죽이 사람을 구하는 데만 온정신이 팔려 있다 그제야 유탄지와 아자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단예가 물었다.
"큰형님, 둘이 떠났나요?"
소봉이 말했다.
"벌써 떠났네. 자네가 응낙을 해서 나도 더 이상 막을 수 없었어."
이 말을 하면서 망연자실한 표정을 금치 못했다. 아자가 유탄지를 따라간 후 장차 어찌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 P346

"그… 그분이 서하의 부마가 되러 가신대요. 공야 둘째 오라버니가 오더니 대연 재건을 위해선 아녀자와의 사사로운 정을 돌볼 수 없다면서 절 설득했어요."
그녀는 이 몇 마디 말을 내뱉고 몸을 돌려 단예의 어깨에 안겨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단예는 그녀의 과분한 표현에 깜짝 놀라 감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문득 깨닫는 바가 있어 자기도 모르게 멍한 상태로 기뻐해야 할지 힘들어해야 할지 몰랐다. 이제 보니 왕어언이 상심한 이유는 바로 모용복이 서하 부마가 되러 간다는 말에 있었다. 그가 서하 공주를 맞아들이면 자연히 왕어언을 돌보지 않을 것이 확실할 테니 말이다. - P352

그는 가슴을 쭉 내밀며 말했다.
"염려 마시오. 내가 앞장서서 서하 부마가 될 것이오. 낭자 사촌오라버니는 부마가 되지 못할 것이니 낭자와 혼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
왕어언은 놀랍고도 기쁜 마음이 들었다.
"네?"
단예가 말했다.
"내가 부마도위駙馬都尉" 자리를 빼앗을 것이오." - P357

"내 호의를 믿지 못한다면 그건 당신 마음이오. 어찌 됐건 난 당신이 서하 공주를 맞아들이지 못하게 할 것이오. 왕 낭자가 당신 때문에 상심해하며 자결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소."
"공주를 맞아들이지 못하게 하겠다고? 하하, 정말 그럴 능력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오? 내가 맞아들이겠다면 어찌할 것이오?"
"물론 그렇게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저지할 것이오. 나 혼자로는 그럴 힘이 없으니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할 것이오."
모용복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는 소봉과 허죽 두 사람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익히 알고 있었다. 심지어 단예 본인도 육맥신검을 펼쳐낼 때는 자신이 도저히 당해내지 못하지 않았던가? - P373

단예가 연이어 몇 번의 재채기를 하자 왕어언이 말했다.
"왜… 왜 그래요? 어디 불편하세요?"
단예가 말했다.
"아… 아니오… 에취! 에취! 불편한 데는 없소. 에취… 풍한에 든 게 아니라 기쁨에 겨워 그러는 것이오. 왕 낭자… 에취! 너무 좋아서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소."
‘사촌 오라버니한테 시집가고 싶지 않아요. 공자가 저한테 너무 잘해주셔서요‘라고 한 그녀의 말이 단예 귀로 뚫고 들어가자 그 소리는 마치 신선들의 풍악 소리처럼 들렸다. - P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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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탄지가 다급하게 답했다.
"알았소, 그 말에 따르겠소! 백 가지 아니라 천 가지라도 할 것이오!"
그가 이렇게 나오자 정춘추는 기쁜 나머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다! 첫째, 당장 날 사부로 모시고 지금부터 성수파 제자가 되도록 해라!"
유탄지는 잠시의 지체도 없이 당장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렸다.
"하늘 같은 사부님께 제자... 제자 장취현이 절을 올리겠습니다!" - P43

"거란인 소봉은 이미 개방에서 축출당해 개방과 아무 연고도 없건만 여러분께선 어찌 옛 칭호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오? 형제들, 그간 별고 없으셨소?"
마지막 그 말 속에는 옛정이 간절하게 담겨 있어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 P57

그는 고개를 돌려 단예에게 말했다.
"현제,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으니 우리 형제간의 얘기는 잠시 덮어둬야겠네. 자넨 잠시 물러서게. 우리 두 사람의 우의가 영원한 이상 훗날 또 만날 것이네."
그는 단예를 한쪽에 피해 있도록 만들고 자신이 활로를 찾아 하산할 때 그에게 해를 입히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단예는 수천이 넘는 각 로의 영웅들이 자기 의형을 죽이려 하자 의협심이 발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님, 이 아우가 형님과 결의형제를 맺을 때 뭐라 했습니까? 우리 두 사람은 복을 함께 누리고 고난도 함께 이겨내며 동년 동월 동일에 태어나진 못했지만 동년 동월 동일 죽자고 했습니다. 오늘 형님께 고난이 닥쳤는데 이 아우가 어찌 구차한 삶을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 - P65

그는 고개를 돌려 소봉을 향해 다시 말했다.
"소 시주, 오늘 우리가 하는 이 말들은 소 시주에게 환심을 사려는 의도가 아니오. 여기 계신 신산 사형 등 여러 고승들께 우리 소림 제자들이 함부로 무고한 살인을 하거나 우리 소림파가 계율을 무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해명하려는 것이오."
소봉이 몸을 굽혀 말했다.
"네, 제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신 방장 대사께 감사드립니다."
현자는 자비롭고 온화한 표정으로 천천히 말했다.
"소 시주, 내가 솔직히 고백하겠소. 시주가 줄곧 찾아헤매던 선봉장대형은 바로.… 노납인 현자요!" - P73

현자가 합장을 하고 말했다.
"원수를 갚고자 한다면 언제든 내 목숨을 취해도 좋소. 다만 오늘은 산 밑에 수천 명의 호걸이 시주를 죽이려 하니 시주가 아무리 용감무쌍하다 해도 중과부적일 뿐이오. 잠시 예봉을 피해 뒷산으로 나가는 것이 어떠하겠소? 군웅은 우리 소림사에서 감당하도록 하겠소." - P75

"현제, 우리 두 사람이 생사를 함께한다면 우리의 결의가 헛되지 않을 것이네. 지금 당장 죽든 살든 우리 통쾌하게 한 잔 마셔보세."
단예는 그의 호기에 자극받아 가죽 주머니를 받아들고 소리쳤다.
"좋습니다! 형님과 한바탕 마시고 싶습니다!"
소림 군승 중에서 갑자기 한 회색 옷을 입은 승려가 걸어나와 큰 소리로 외쳤다.
"큰형님, 아우! 둘이 마시면서 어찌 전 부르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는 다름 아닌 허죽이었다. - P80

소봉이 빙긋 웃으며 생각했다.
‘현제는 일을 행함에 있어 좀 엉뚱한 데가 있군. 남과 결의형제를 맺으면서 나까지 포함해 결의를 하다니 말이야. 내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상황인데 이 친구는 위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무쌍하게 나서다니 의리를 중시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대장부이자 호한이로구나. 나 소봉이 이런 사람과 결의형제를 맺는 건 헛되지 않을 것이다.’ - P81

단예는 모용복이 부친의 혈도를 찍었을 때 큰 소리로 갈채를 보내는 왕어언의 목소리를 듣고 부친의 안위에 대한 염려와 함께 왕어언의 무정함에 화가 치밀어올랐다.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가슴까지 쓰려오자 내력이 끊임없이 용솟음쳤던 것이다. 순간 소상, 상양, 중충, 관충, 소충, 소택 육맥검법을 종횡으로 춤추듯 휘날리며 마치 신이 돕는 듯 마음먹은 대로 펼쳐낼 수 있게 되었다. - P94

단연경과 구마지 두 사람은 단예가 펼쳐내는 신묘하기 이를 데 없는 육맥신검을 보고 지금은 완벽하지 않지만 고인의 가르침을 받고 약간의 수련을 더한다면 천하제일 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여겨 긴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구마지의 탄식 소리는 부러움이 전부였지만 단연경의 배 속에서 터져 나오는 가벼운 탄식 속에는 애처롭고도 낙심한 느낌이 가득했다. - P104

소봉이 냉랭한 미소를 지었다.
"나소모 이름이 너같은 놈과 함께 거명됐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구나." - P109

한참 후에 흑의인과 회의승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당..…."
하지만 ‘당‘이란 첫마디를 내뱉자마자 두 사람 모두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다시 한참 지난 후에 회의승이 말했다.
"당신은 누구요?"
흑의인이 말했다.
"당신은 또 누구요?" - P117

그는 오른손을 휘둘러 끊임없이 정춘추를 향해 공격해 들어가면서 왼 손바닥에는 암암리에 내공을 돋우어 북명진기를 끌어올렸다. 머지않아 손바닥에 있던 술은 일고여덟 조각의 얼음으로 변했다. 그는 오른손을 연이어 세 번 후려쳤다.
정춘추는 차가운 바람이 몸에 엄습하자 깜짝 놀랐다.
‘저 땡추중의 양강한 내력이 어찌 갑자기 변한 거지?‘
그는 재빨리 전력을 쏟아부어 막아냈지만 별안간 어깨의 결분혈이 마치 눈송이에 부딪힌 듯 미미하게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 P138

사람들 숲에서 갑자기 담청색 장포를 입고 양쪽 뺨에 각각 세 줄의 혈흔이 있는 한 중년 여자가 튀어나왔다. 그는 바로 사대악인 중 하나인 무악부작 섭이랑이었다. 그녀는 앞으로 질풍같이 달려나와 두 손으로 소림사 계율원의 두 집법을 밀어붙이고 다시 손을 뻗어 허죽의 바지를 잡아당겨 그의 바지를 벗기려고 했다.
허죽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면서 뒤쪽으로 수척 물러섰다.
"무... 무슨 짓입니까?"
섭이랑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아... 아들아!" - P147

군웅은 그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각진 얼굴에 큰 귀, 덥수룩한 구레나룻이 있는 매우 위풍당당한 모습의 약 60세 전후의 노인이었다.
소봉은 순간 놀라움과 기쁨이 교차된 나머지 앞으로 달려나가 바닥에 엎드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 당신께서 제 아버지시군요."
흑의인이 껄껄대고 큰 소리로 웃었다.
"그래, 아들아! 내가 바로 네 아비다. 우리 부자 두 사람은 비슷한 체격과 외모만으로도 내가 네 아비라는 걸 누구든 알 수 있을 게다." - P156

갑자기 현자 방장이 입을 열었다.
"선재로다, 선재로다! 업인을 만들어내면 필히 업과를 받는법. 허죽, 이리 오너라."
허죽은 방장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현자는 그를 한참동안 살펴보다가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그의 얼굴은 온화하고 자애로운 모습으로 가득했다.
"네가 소림사에서 24년을 머물렀지만 시종 내 아들이란걸 몰랐구나."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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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모가 깔깔대고 웃었다.
"몽랑, 초초해할 것 없다. 곧 있으면 네 몽고와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그녀도 널 미친 듯이 그리워하고 있다.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좌불안석으로 너만 생각하며 그리워하고 있어. 솔직히 말해봐라. 그녀가 보고 싶지 않으냐?"
허죽은 그 소녀에게 깊이 빠져 있어 며칠 동안 생사부를 쏘아내고 제거하는 무공 연마에 몰두하는 와중에도 줄곧 그녀 생각으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그런데 동모가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자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보고 싶습니다!" - P93

동모가 말했다.
"넌 소요파 장문인이다. 또한 내가 이미 생사부와 천산절매수, 천산육양장 등 일련의 무공을 모두 전수했으니 오늘부터 넌 표묘봉 영취궁의 주인이야. 영취궁 구천구부 노비들의 생사를 모두 너에게 일임할 것이다."
허죽이 깜짝 놀라다급하게 거절했다.
"사백, 사백! 그건 절대 안 됩니다." - P123

허죽이 그림을 가져오자동모는 그림을 받아들고 햇빛 아래 살펴봤다. 순간 동모는 깜짝 놀라더니 얼굴에 놀라움과 기쁨의 기색을 동시에 드러냈다. 그녀는 다시 한참을 유심히 살펴보고는 돌연 하하거리며 큰 소리로 웃다 소리쳤다. 그녀의 손가락이 부분
"저년이 아니구나. 저년이 아니야. 저년이 아니야! 하하, 하하, 하하!" - P124

"사숙, 예전에 대리 무량산에 살았던 적이 있었나요?"
이추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들어 저 멀리 바라봤다. 마치 과거를 회상하며 넋을 잃은 채 그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과거 나와 네 사부는 대리 무량산 검호 기슭에 있는 석동 안에서 살았다. 신선을 능가할 정도로 아주 자유롭고 즐겁게 말이야. 난 그 사람한테 아주 귀여운 딸아이를 낳아줬어. 우리 두 사람은 천하 각 문파의 무공 비급을 널리 모아 각 문파들의 무공을 망라한 특별한 무공을 창안할 생각이었다. 하루는 그 사람이 산중에서 거대한 미옥을 찾아냈는데 그것으로 내 모습과 똑같이 생긴 인물상을 조각했다. - P129

매검이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주인님께서 너희의 생사부를 제거해주겠다고 응낙하신 건 어르신의 자비심 때문이다. 하지만 너희는 대담하기 짝이 없이 난을 일으켰다. 더구나 동모를 궁에서 끌고 간 탓에 동모가 외부에서 선화를 하시게 됐다. 그럼에도 너희는 또다시 표묘봉을 공격해 우리 균천부의 수많은 자매를 죽였으니 이 빚은 다 어찌 갚을 것이냐?"
군호는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의기소침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195

"단 공자, 만일 공자가 날 무시하지만 않는다면 우리 둘이 먼저 결의형제를 맺도록 합시다. 그리고 훗날 교 대형을 찾아 다시 한번 결의를 맺으면 될 것 아니겠습니까?"
단예가 크게 기뻐했다.
"좋은 생각입니다.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우리 둘이 먼저 교 대형을 포함시켜 결의형제를 맺으면 될 것이오. 형씨는 나이가 어찌 되시오?"
두 사람이 나이를 따져보니 허죽이 단예보다 세 살 더 많았다. 단예가 소리쳤다.
"둘째 형님, 소제의 절을 받으십시오!" - P212

군호가 과거 동모에게 신하의 예를 다하게 된 것은 강제로 굴복당하고 몸에 생사부가 심어지면서 통제를 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새롭게 바뀐 영취궁 주인인 허죽이 자신들을 진심으로 대하고 예로써 존중해주는 데다 각자의 몸에 심어져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기던 생사부마저 제거해주자 오만하고 길들여지지 않은 군호도 그 은덕에 깊이 탄복해 죽음으로 충성을 맹세하며 하나같이 감사의 절을 올리고 각자의 근거지로 돌아갔다. - P228

현생이 큰 소리로 물었다.
"국사 말씀에 따르면 폐파의 72절기 모두를 통달한 누군가가 있다는 겁니까?"
구마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럼 대답해보십시오. 그 대영웅이 누굽니까?"
구마지가 말했다.
"대영웅이란 칭호를 듣기에는 많이 부끄럽다 할 수 있지요."
현생은 안색을 바꿔 물었다.
"국사 본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구마지가 고개를 끄덕이고 합장을 한 채 엄숙하고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그렇소이다." - P264

소림 군승은 하나같이 고개를 숙인 채 의기소침해 했다. 방장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게 만들었다는 것은 소림파의 무공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줄곧 최고라 자부하던 소림 72 절기가 그저 그런 것으로 평가절하되고 자체적으로 정한 규율마저 합리적인 것이 못 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 P268

과거 허죽이 단연경의 가르침을 받고 무애자가 포진해 놓은 진롱 기국을 풀 때 구마지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군중 틈에서 나타나 손가락을 연이어 돌려 허공을 격하며 현도의 혈도를 막는데 그 기묘한 수법과 심후한 공력은 자신도 평생 본 적이 없던 터라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P274

난검이 말했다.
"그 연근이란 화상이 주인님께 무례하게 대하기에 저희 자매들이 가서 혼쭐을 내줬습니다. 그랬더니 그제야 옳고 그름을 이해하더군요. 에이, 근데 그 서역승이 또 주인님을 해칠지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허죽은 문득 깨달았다. 거만했던 연근이 갑자기 공손한 모습으로 바뀐 것은 알고 보니 이들 네 자매가 협박을 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 P310

허죽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정했다.
"방장 그리고 사백조, 사숙조 여러분! 부처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자비를 베풀어주시어 제자가 개과천선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십시오 이 제자는 그 어떤 징벌도 감수할 것입니다. 부디 사문에서 축출하지만 말아주십시오!"
그는 흐느껴 우는 목소리로 매우 간절하게 사정했다.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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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모가 허죽에게 끊임없이 재촉했다.
"어서 날 업고 가라! 저 천한 년으로부터 멀리 떨어질수록 좋다. 이 할머니가 네 호의를 잊지 않고 필히 후사할 것이다."
저백삼인은 아주 차분하고 느긋하게 한쪽에 서 있었는데 가벼운 바람에 옷자락이 날려 마치 선녀처럼 보였다. 허죽은 저렇게 우아한 낭자를 동모가 어찌 그리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 P15

허죽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죽어도 육식을 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데 화가 난 동모가 어디서 소녀 하나를 잡아다 음계를 어기도록 유혹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순간 회한과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벌떡 일으켜 딱딱한 얼음에 자신의 머리를 가져다 박았다. 퍽 소리와 함께 허죽은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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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죽이 생각했다.
‘이제 보니 이 소상공은 여자에다 성수파 제자였어. 성수파 제자 중에서도 대사저라니. 아이고, 이런! 나한테 닭곰탕을 마시게 하고 비곗살을 먹이면서 독을 넣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 젊은이는 다름 아닌 남장을 하고 있던 아자였다. - P141

정춘추는 남들로부터 아첨의 말을 듣는 것이 평생 최고의 취미였던 터라 남들이 오글거리는 말을 하면 할수록 기분 좋게 들렸다. 그는 이들 제자로부터 수십 년 동안 칭송의 말을 들어왔기에 이제는 공덕을 찬양하는 제자들의 말 하나하나를 모두 진실처럼 믿고 있었고 누구든 그를 치켜세우는 정도가 부족하기라도 하면 그 제자가 충성심이 모자란다 생각했다. - P145

정춘추는 속으로 화가 치밀어오르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조금 전 아자에게 말을 할 때 그는 소맷자락을 살짝 떨치며 암암리에 운용한 내력으로 삼소소요산 독 가루를 모용복에게 뿌렸었다. 그 독 가루는 무색무취의 미세하기 이를 데 없는 극약인 데다 이미 해가 져 객당 안은 어두컴컴한 상태였던 터라 아무리 고강한 무공을 지닌 모용복도 절대 알아채지 못하리라 여겼다.
그런데 그가 어떤 수법을 펼쳤는지 모르지만 삼소소요산이 뜻밖에도 자신의 제자에게 전이됐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 P156

고소모용가에서 자랑하는 최상의 절기는 바로 두전성이라 불리는 차력타력 기술이었다. 남들은 속사정도 모르고 모용씨가 그저 ‘상대가 쓴 방법을 상대에게 펼친다‘는 신묘한 무공으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며 상대방이 명성을 떨친 절기를 그 사람에게 가한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마치 고소모용씨가 천하 각 문파의 절기를 모두 구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아주 정묘하게 구사할 것이라 여긴 것이다. - P161

정춘추는 모용복을 어찌 처리할지 몰라 노심초사하고 있던 와중에 아자가 자신을 성수노선이라 칭하자 그 칭호가 틀린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웃음 속에 조소의 의미가 있다고 느껴 돌연 광분하기 시작했다. 그는 당장 왼손 소맷자락을 휘둘러 탁자 위에 있던 젓가락 한 벌을 허공에 들어올리고는 아자의 두 눈을 향해 쏘아갔다.
아자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 P165

"낭자 누・・・ 눈은 좀 어떻소?"
아자는 두 눈에 극심한 통증만 느껴질 뿐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떠 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온 천지가 칠흑 같은 어둠으로 변해 있었다. 그제야 자신의 두 눈이 정춘추의 독약에 못쓰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대성통곡을 하며 부르짖었다.
"내… 내 눈이 못쓰게 돼버렸어!" - P167

"결코 그대를 속이는 것이 아니오. 내가 그대를 떠난다면 난 고이 죽지 못할 것이오."
초조해하는 듯한 그의 말투에서 진정성이 느껴졌다.
아자가 말했다.
"그럼 당신은 누구예요?"
"난 취현장..… 아니, 아니, 내 성은 장이고 이름은 취현이오." "
아자를 구한 자는 다름 아닌 취현장의 소장주 유탄지였다.
"장 선배님이셨군요. 구해줘서 고마워요." - P169

난데없이 산중턱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 되오! 왕 낭자는 절대 해치지 마시오. 내가 투항을 하겠소!"
잿빛 그림자 하나가 바람처럼 날아오는데 그 발놀림이 민첩하기를 데 없었다. 바깥쪽을 에워싸고 서 있던 몇 명이 일제히 호통을 치며 막으려 했지만 그는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며 그 무리들을 피해 앞쪽으로 달려들었다. 왕어언이 불빛 아래에서 살펴보니 그는 다름 아닌 단예였다.
단예가 다시 소리쳤다.
"투항하는 게 뭐 어렵다 그러시오? 왕 낭자를 위해서라면 나더러 천 번 아니라 만 번을 투항하라 해도 할 것이오." - P212

오노대가 이를 꽉 깨물고 뭔가 결심을 한 듯 모용복 앞으로 걸어가 깊이 읍을 하고 말문을 열었다.
"모용 공자, 삼십육동과 칠십이도 형제들은 수십 년 동안 모진 고통을 받으면서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살아왔소. 이번에 우리 모두 목숨을 내걸고 그 노마두를 제거하고자 하니 부디 공자가 의협심을 발동해 곤경에 처한 우리를 구해주시기 바라오. 그렇게만 해준다면 그 크나큰 은덕에 대해선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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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나큰 은덕에 대해선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 이 삼십육동과 칠십이도 중에는 고수들이 꽤 있지 않은가? 내가 훗날 대업을 도모하려면 적보다는 아군이 많아야만 한다. 오늘날 내가 저들에게 도움을 준다면 나한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저들을 청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여기 있는 수많은 고수가 나에게는 실로 정예 병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P237

우리 삼십육동동주와 칠십이도 도주는 외지고 황량한 산에 기거하는 이도 있고, 섬주변을 장악한 이도 있기 때문에 마치 유유자적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개개인이 모두 천산동모의 속박을 받으며 살고 있소. 솔직히 우리 모두 그녀의 노예요. 매년 한두 번씩 사람을 보내와 우리를 질책하고 심하게 욕을 퍼부어대니 정말 사람으로서 견딜 수가 없소. - P254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우리가 영취궁 안에 가서 살펴볼 때는 누구도 감히 마음 놓고 탐문하지 못했소. 다들 최대한 은폐를 하며 누구라도 부딪힐까 두려워했던 것이오. 다만 재하가 궁 뒤편의 화원 안에서 어린 계집아이 하나와 마주쳤소. 그 계집아이는 시녀인 듯했지만 갑자기 고개를 드는 바람에 피할 새도 없이 내 얼굴과 마주치고 말았고 재하는 비밀이 누설될까 두려워 그 아이한테 달려들어 당장 잡아가야겠다 생각했소. - P280

"넌 표묘봉과는 어떤 연원이 있더냐? 어찌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무모하게 그 아이를 구한 것이냐?"
습허죽이 빠른 걸음으로 산봉우리로 달려가며 말했다.
"표묘봉이고 영취궁이고 소승은 오늘 처음 듣습니다. 소승은 소림제자로서 명을 받들어 하산했을 뿐 강호의 어떤 문파와도 관련이 없습니다. - P293

"오늘 정말 소화상 네 녀석은 거저먹은 줄 알아라. 이 할머니의 그 신공은 본래 부전지비란 걸 알아야 한다. 허나 네가 진실성이 있고 이 할머니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려 한 것이 확실해 내가 무공을 전수하는 규칙에 부합된 거야. 더구나 위급한 상황이라 이 할머니도 너한테 도움을 청해 출수를 하도록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게다."
오노대는 벙어리 여자아이가 돌연 입을 열어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놀라서 말이 안 나온다는 표정을 지었다. - P331

"흐흐, 눈썰미는 좋구나. 내가 두세 살 더 자란 걸 알아보다니 말이야. 멍청이 화상아, 천산동모의 몸은 영원한 여동이라 결코 자라지 않는다."
허죽과 오노대가 모두 깜짝 놀라 일제히 소리쳤다.
"천산동모? 당신이 천산동모란 말입니까?"
여자아이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럼 내가 누구인 줄 알았더냐? 이 할머니는 여자아이의 몸을 지녔다. 너희는 눈이 삐었단 말이냐? 그걸 못 알아봐?"
오노대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한참을 바라보다 입을 부르르 떨며 뭔가 말하려다 시종 말을 하지 못했다. - P346

그녀는 허죽이 채 대답도 하기 전에 말했다.
"넌 대부호의 자제에 비유할 수 있다. 조상님들께 거액의 재물을 전수받아 자본이 풍부하기 때문에 더 이상 재화를 저축할 필요 없이 그저 돈 쓰는 요령만 배우면 되는 것이다. 돈을 쓰기는 쉽지만 모으는 건 어렵다. 넌 한 달을 연마하면 어느 정도 익힐 수 있고 두 달을 연마한 후에는 가까스로 내 대적수와 겨룰 수 있을 것이다."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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