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탄지가 다급하게 답했다.
"알았소, 그 말에 따르겠소! 백 가지 아니라 천 가지라도 할 것이오!"
그가 이렇게 나오자 정춘추는 기쁜 나머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다! 첫째, 당장 날 사부로 모시고 지금부터 성수파 제자가 되도록 해라!"
유탄지는 잠시의 지체도 없이 당장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렸다.
"하늘 같은 사부님께 제자... 제자 장취현이 절을 올리겠습니다!" - P43

"거란인 소봉은 이미 개방에서 축출당해 개방과 아무 연고도 없건만 여러분께선 어찌 옛 칭호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오? 형제들, 그간 별고 없으셨소?"
마지막 그 말 속에는 옛정이 간절하게 담겨 있어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 P57

그는 고개를 돌려 단예에게 말했다.
"현제,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으니 우리 형제간의 얘기는 잠시 덮어둬야겠네. 자넨 잠시 물러서게. 우리 두 사람의 우의가 영원한 이상 훗날 또 만날 것이네."
그는 단예를 한쪽에 피해 있도록 만들고 자신이 활로를 찾아 하산할 때 그에게 해를 입히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단예는 수천이 넘는 각 로의 영웅들이 자기 의형을 죽이려 하자 의협심이 발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님, 이 아우가 형님과 결의형제를 맺을 때 뭐라 했습니까? 우리 두 사람은 복을 함께 누리고 고난도 함께 이겨내며 동년 동월 동일에 태어나진 못했지만 동년 동월 동일 죽자고 했습니다. 오늘 형님께 고난이 닥쳤는데 이 아우가 어찌 구차한 삶을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 - P65

그는 고개를 돌려 소봉을 향해 다시 말했다.
"소 시주, 오늘 우리가 하는 이 말들은 소 시주에게 환심을 사려는 의도가 아니오. 여기 계신 신산 사형 등 여러 고승들께 우리 소림 제자들이 함부로 무고한 살인을 하거나 우리 소림파가 계율을 무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해명하려는 것이오."
소봉이 몸을 굽혀 말했다.
"네, 제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신 방장 대사께 감사드립니다."
현자는 자비롭고 온화한 표정으로 천천히 말했다.
"소 시주, 내가 솔직히 고백하겠소. 시주가 줄곧 찾아헤매던 선봉장대형은 바로.… 노납인 현자요!" - P73

현자가 합장을 하고 말했다.
"원수를 갚고자 한다면 언제든 내 목숨을 취해도 좋소. 다만 오늘은 산 밑에 수천 명의 호걸이 시주를 죽이려 하니 시주가 아무리 용감무쌍하다 해도 중과부적일 뿐이오. 잠시 예봉을 피해 뒷산으로 나가는 것이 어떠하겠소? 군웅은 우리 소림사에서 감당하도록 하겠소." - P75

"현제, 우리 두 사람이 생사를 함께한다면 우리의 결의가 헛되지 않을 것이네. 지금 당장 죽든 살든 우리 통쾌하게 한 잔 마셔보세."
단예는 그의 호기에 자극받아 가죽 주머니를 받아들고 소리쳤다.
"좋습니다! 형님과 한바탕 마시고 싶습니다!"
소림 군승 중에서 갑자기 한 회색 옷을 입은 승려가 걸어나와 큰 소리로 외쳤다.
"큰형님, 아우! 둘이 마시면서 어찌 전 부르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는 다름 아닌 허죽이었다. - P80

소봉이 빙긋 웃으며 생각했다.
‘현제는 일을 행함에 있어 좀 엉뚱한 데가 있군. 남과 결의형제를 맺으면서 나까지 포함해 결의를 하다니 말이야. 내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상황인데 이 친구는 위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무쌍하게 나서다니 의리를 중시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대장부이자 호한이로구나. 나 소봉이 이런 사람과 결의형제를 맺는 건 헛되지 않을 것이다.’ - P81

단예는 모용복이 부친의 혈도를 찍었을 때 큰 소리로 갈채를 보내는 왕어언의 목소리를 듣고 부친의 안위에 대한 염려와 함께 왕어언의 무정함에 화가 치밀어올랐다.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가슴까지 쓰려오자 내력이 끊임없이 용솟음쳤던 것이다. 순간 소상, 상양, 중충, 관충, 소충, 소택 육맥검법을 종횡으로 춤추듯 휘날리며 마치 신이 돕는 듯 마음먹은 대로 펼쳐낼 수 있게 되었다. - P94

단연경과 구마지 두 사람은 단예가 펼쳐내는 신묘하기 이를 데 없는 육맥신검을 보고 지금은 완벽하지 않지만 고인의 가르침을 받고 약간의 수련을 더한다면 천하제일 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여겨 긴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구마지의 탄식 소리는 부러움이 전부였지만 단연경의 배 속에서 터져 나오는 가벼운 탄식 속에는 애처롭고도 낙심한 느낌이 가득했다. - P104

소봉이 냉랭한 미소를 지었다.
"나소모 이름이 너같은 놈과 함께 거명됐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구나." - P109

한참 후에 흑의인과 회의승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당..…."
하지만 ‘당‘이란 첫마디를 내뱉자마자 두 사람 모두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다시 한참 지난 후에 회의승이 말했다.
"당신은 누구요?"
흑의인이 말했다.
"당신은 또 누구요?" - P117

그는 오른손을 휘둘러 끊임없이 정춘추를 향해 공격해 들어가면서 왼 손바닥에는 암암리에 내공을 돋우어 북명진기를 끌어올렸다. 머지않아 손바닥에 있던 술은 일고여덟 조각의 얼음으로 변했다. 그는 오른손을 연이어 세 번 후려쳤다.
정춘추는 차가운 바람이 몸에 엄습하자 깜짝 놀랐다.
‘저 땡추중의 양강한 내력이 어찌 갑자기 변한 거지?‘
그는 재빨리 전력을 쏟아부어 막아냈지만 별안간 어깨의 결분혈이 마치 눈송이에 부딪힌 듯 미미하게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 P138

사람들 숲에서 갑자기 담청색 장포를 입고 양쪽 뺨에 각각 세 줄의 혈흔이 있는 한 중년 여자가 튀어나왔다. 그는 바로 사대악인 중 하나인 무악부작 섭이랑이었다. 그녀는 앞으로 질풍같이 달려나와 두 손으로 소림사 계율원의 두 집법을 밀어붙이고 다시 손을 뻗어 허죽의 바지를 잡아당겨 그의 바지를 벗기려고 했다.
허죽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면서 뒤쪽으로 수척 물러섰다.
"무... 무슨 짓입니까?"
섭이랑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아... 아들아!" - P147

군웅은 그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각진 얼굴에 큰 귀, 덥수룩한 구레나룻이 있는 매우 위풍당당한 모습의 약 60세 전후의 노인이었다.
소봉은 순간 놀라움과 기쁨이 교차된 나머지 앞으로 달려나가 바닥에 엎드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 당신께서 제 아버지시군요."
흑의인이 껄껄대고 큰 소리로 웃었다.
"그래, 아들아! 내가 바로 네 아비다. 우리 부자 두 사람은 비슷한 체격과 외모만으로도 내가 네 아비라는 걸 누구든 알 수 있을 게다." - P156

갑자기 현자 방장이 입을 열었다.
"선재로다, 선재로다! 업인을 만들어내면 필히 업과를 받는법. 허죽, 이리 오너라."
허죽은 방장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현자는 그를 한참동안 살펴보다가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그의 얼굴은 온화하고 자애로운 모습으로 가득했다.
"네가 소림사에서 24년을 머물렀지만 시종 내 아들이란걸 몰랐구나."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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