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죽이 생각했다.
‘이제 보니 이 소상공은 여자에다 성수파 제자였어. 성수파 제자 중에서도 대사저라니. 아이고, 이런! 나한테 닭곰탕을 마시게 하고 비곗살을 먹이면서 독을 넣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 젊은이는 다름 아닌 남장을 하고 있던 아자였다. - P141

정춘추는 남들로부터 아첨의 말을 듣는 것이 평생 최고의 취미였던 터라 남들이 오글거리는 말을 하면 할수록 기분 좋게 들렸다. 그는 이들 제자로부터 수십 년 동안 칭송의 말을 들어왔기에 이제는 공덕을 찬양하는 제자들의 말 하나하나를 모두 진실처럼 믿고 있었고 누구든 그를 치켜세우는 정도가 부족하기라도 하면 그 제자가 충성심이 모자란다 생각했다. - P145

정춘추는 속으로 화가 치밀어오르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조금 전 아자에게 말을 할 때 그는 소맷자락을 살짝 떨치며 암암리에 운용한 내력으로 삼소소요산 독 가루를 모용복에게 뿌렸었다. 그 독 가루는 무색무취의 미세하기 이를 데 없는 극약인 데다 이미 해가 져 객당 안은 어두컴컴한 상태였던 터라 아무리 고강한 무공을 지닌 모용복도 절대 알아채지 못하리라 여겼다.
그런데 그가 어떤 수법을 펼쳤는지 모르지만 삼소소요산이 뜻밖에도 자신의 제자에게 전이됐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 P156

고소모용가에서 자랑하는 최상의 절기는 바로 두전성이라 불리는 차력타력 기술이었다. 남들은 속사정도 모르고 모용씨가 그저 ‘상대가 쓴 방법을 상대에게 펼친다‘는 신묘한 무공으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며 상대방이 명성을 떨친 절기를 그 사람에게 가한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마치 고소모용씨가 천하 각 문파의 절기를 모두 구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아주 정묘하게 구사할 것이라 여긴 것이다. - P161

정춘추는 모용복을 어찌 처리할지 몰라 노심초사하고 있던 와중에 아자가 자신을 성수노선이라 칭하자 그 칭호가 틀린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웃음 속에 조소의 의미가 있다고 느껴 돌연 광분하기 시작했다. 그는 당장 왼손 소맷자락을 휘둘러 탁자 위에 있던 젓가락 한 벌을 허공에 들어올리고는 아자의 두 눈을 향해 쏘아갔다.
아자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 P165

"낭자 누・・・ 눈은 좀 어떻소?"
아자는 두 눈에 극심한 통증만 느껴질 뿐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떠 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온 천지가 칠흑 같은 어둠으로 변해 있었다. 그제야 자신의 두 눈이 정춘추의 독약에 못쓰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대성통곡을 하며 부르짖었다.
"내… 내 눈이 못쓰게 돼버렸어!" - P167

"결코 그대를 속이는 것이 아니오. 내가 그대를 떠난다면 난 고이 죽지 못할 것이오."
초조해하는 듯한 그의 말투에서 진정성이 느껴졌다.
아자가 말했다.
"그럼 당신은 누구예요?"
"난 취현장..… 아니, 아니, 내 성은 장이고 이름은 취현이오." "
아자를 구한 자는 다름 아닌 취현장의 소장주 유탄지였다.
"장 선배님이셨군요. 구해줘서 고마워요." - P169

난데없이 산중턱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 되오! 왕 낭자는 절대 해치지 마시오. 내가 투항을 하겠소!"
잿빛 그림자 하나가 바람처럼 날아오는데 그 발놀림이 민첩하기를 데 없었다. 바깥쪽을 에워싸고 서 있던 몇 명이 일제히 호통을 치며 막으려 했지만 그는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며 그 무리들을 피해 앞쪽으로 달려들었다. 왕어언이 불빛 아래에서 살펴보니 그는 다름 아닌 단예였다.
단예가 다시 소리쳤다.
"투항하는 게 뭐 어렵다 그러시오? 왕 낭자를 위해서라면 나더러 천 번 아니라 만 번을 투항하라 해도 할 것이오." - P212

오노대가 이를 꽉 깨물고 뭔가 결심을 한 듯 모용복 앞으로 걸어가 깊이 읍을 하고 말문을 열었다.
"모용 공자, 삼십육동과 칠십이도 형제들은 수십 년 동안 모진 고통을 받으면서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살아왔소. 이번에 우리 모두 목숨을 내걸고 그 노마두를 제거하고자 하니 부디 공자가 의협심을 발동해 곤경에 처한 우리를 구해주시기 바라오. 그렇게만 해준다면 그 크나큰 은덕에 대해선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오!"
.
.
.
‘크나큰 은덕에 대해선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 이 삼십육동과 칠십이도 중에는 고수들이 꽤 있지 않은가? 내가 훗날 대업을 도모하려면 적보다는 아군이 많아야만 한다. 오늘날 내가 저들에게 도움을 준다면 나한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저들을 청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여기 있는 수많은 고수가 나에게는 실로 정예 병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P237

우리 삼십육동동주와 칠십이도 도주는 외지고 황량한 산에 기거하는 이도 있고, 섬주변을 장악한 이도 있기 때문에 마치 유유자적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개개인이 모두 천산동모의 속박을 받으며 살고 있소. 솔직히 우리 모두 그녀의 노예요. 매년 한두 번씩 사람을 보내와 우리를 질책하고 심하게 욕을 퍼부어대니 정말 사람으로서 견딜 수가 없소. - P254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우리가 영취궁 안에 가서 살펴볼 때는 누구도 감히 마음 놓고 탐문하지 못했소. 다들 최대한 은폐를 하며 누구라도 부딪힐까 두려워했던 것이오. 다만 재하가 궁 뒤편의 화원 안에서 어린 계집아이 하나와 마주쳤소. 그 계집아이는 시녀인 듯했지만 갑자기 고개를 드는 바람에 피할 새도 없이 내 얼굴과 마주치고 말았고 재하는 비밀이 누설될까 두려워 그 아이한테 달려들어 당장 잡아가야겠다 생각했소. - P280

"넌 표묘봉과는 어떤 연원이 있더냐? 어찌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무모하게 그 아이를 구한 것이냐?"
습허죽이 빠른 걸음으로 산봉우리로 달려가며 말했다.
"표묘봉이고 영취궁이고 소승은 오늘 처음 듣습니다. 소승은 소림제자로서 명을 받들어 하산했을 뿐 강호의 어떤 문파와도 관련이 없습니다. - P293

"오늘 정말 소화상 네 녀석은 거저먹은 줄 알아라. 이 할머니의 그 신공은 본래 부전지비란 걸 알아야 한다. 허나 네가 진실성이 있고 이 할머니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려 한 것이 확실해 내가 무공을 전수하는 규칙에 부합된 거야. 더구나 위급한 상황이라 이 할머니도 너한테 도움을 청해 출수를 하도록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게다."
오노대는 벙어리 여자아이가 돌연 입을 열어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놀라서 말이 안 나온다는 표정을 지었다. - P331

"흐흐, 눈썰미는 좋구나. 내가 두세 살 더 자란 걸 알아보다니 말이야. 멍청이 화상아, 천산동모의 몸은 영원한 여동이라 결코 자라지 않는다."
허죽과 오노대가 모두 깜짝 놀라 일제히 소리쳤다.
"천산동모? 당신이 천산동모란 말입니까?"
여자아이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럼 내가 누구인 줄 알았더냐? 이 할머니는 여자아이의 몸을 지녔다. 너희는 눈이 삐었단 말이냐? 그걸 못 알아봐?"
오노대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한참을 바라보다 입을 부르르 떨며 뭔가 말하려다 시종 말을 하지 못했다. - P346

그녀는 허죽이 채 대답도 하기 전에 말했다.
"넌 대부호의 자제에 비유할 수 있다. 조상님들께 거액의 재물을 전수받아 자본이 풍부하기 때문에 더 이상 재화를 저축할 필요 없이 그저 돈 쓰는 요령만 배우면 되는 것이다. 돈을 쓰기는 쉽지만 모으는 건 어렵다. 넌 한 달을 연마하면 어느 정도 익힐 수 있고 두 달을 연마한 후에는 가까스로 내 대적수와 겨룰 수 있을 것이다."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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