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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온실 수리 보고서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4년 10월
평점 :
* 결말에 대해 스포일러가 다소 있습니다.
장면 하나. 1995년 8월 15일. 경복을 앞을 가리고 있던 구 조선총독부,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이 철거되기 시작했다. 역사적인 건물이기 때문에 유지해야 된다는 의견도 있었고,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의견도 있었다. 일본은 모든 비용을 대서라도 이 건물을 일본으로 옮겨가겠다고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싸가지없는 XX들'이라는 혼잣말을 날렸다는 떠도는 소문과 함께 시원스럽게 첨탑을 날려버리라고 지시했고, 그로부터 1년여간 철거작업이 진행됐다. 생각없는 오케스트라가 일제시대에 발표되어 친일가요라는 의혹이 짙은 '감격시대(1938)'를 연주한 건 섬세하지 못한 탓에 일어난 해프닝이라고 퉁치고 넘어가자. 기분좋은 날이었으니까. 드디어 조선의 궁을 가리고 있던 일제시대 잔재가 박살났다.
수필 하나. 고등학교인지 중학교인지. 가장 멋진 수필로 손에 꼽히고 교과서에 등장하는 작품이 있다. 피천득의 '인연'. 겨우 세 번 만났지만 마음 속에 깊은 자국을 남긴 아사코를 일제시대에서 해방 후까지 담담하게 추억한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라고 회술하며 젊은 시절 만남을 아름답고 아련하게 써내려 간다.
애니메이션 하나.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중학생 오빠와 학교도 가지 않은 동생은 마을이 공습을 당하자 부모님과 헤어진다. 오빠는 동생을 업고 피난하지만 전쟁은 어린 두 남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어른들 역시 마찬가지. 결국 동생은 영양실조로 죽고, 얼마 후 일본은 전쟁에 패배. 오빠 역시 길에서 죽는다. 전쟁이 얼마나 잔혹한지 죽어가는 남매를 통해 보여주는 명작이다. 스튜디오 지부리의 2인자라고 할 수 있는 타카하다 이사오의 대표작.
그리고...
영두는 원래 출판사에서 일했다. 글을 쓴다. 친구 은혜가 소개해 준 바위건축사사무소에서 보고서를 쓰는 일을 하는데 건축사무소는 일제시대에 지어진 창경궁 대온실을 보수하는 중이다. 보수를 위해 측량하던 중 대온실 및 지하에 보일러실 같기도 하고 배양실 같기도 한 빈 공간이 발견되고, 그 속에 동물의 뼈같기도 하고 사람의 뼈같기도 한 것이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발주한 일 외에 다른 일이 생기는 것이 싫은 담당 공무원. 영두와 사무소 사람들은 그 공간의 정체가 궁금하다.
영두는 중학교 시절, 창경궁 근처 낙원하숙에서 지낸 적이 있다. 강화도 촌에서 살다 서울로 유학온 셈이다. 하숙집 할머니 이름은 안문자. 일수놀이도 함께 하는 마음 좋은 할머니인데 원래 일본사람이다. 그리고 영두와 한 방을 쓰는 할머니의 손녀 리사. 영두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영두는 낙원하숙에서 지내는 동안 금성무를 닮은 순신이와 첫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같은 반 전교 1등인 유민에게 괴롭힘을 당하기도 한다.
영두를 건축사사무소에 소개한 은혜는 딸이 하나 있다. 산아는 엄마보다 영두와 더 친해서 서로 속깊은 얘기를 나누는 친구와 같다. 산아는 주로 경계선지능인 듯한 친구 스미의 일을 영두에게 상의하고, 영두는 대온실 공사와 지하공간 그리고 공사중에 알게된 일들에 대해 얘기해 준다. 한편 영두는 대온실 수리보고서를 작성하는 와중에 안문자 할머니가 대온실과 인연이 있다는 것과 해방 전후 시절에 할머니에게 닥친 비극을 알게 된다.
소설은 영두의 어린 시절, 영두의 현재, 산아 그리고 안문자 할머니, 네 가지 이야기를 따라 흘러간다. 그걸 또 두 개로 나눠보면 어린시절 영두를 괴롭혔던 동급생, 그리고 현재 문제가 있는 산아의 친구 스미를 하나로 묶을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영두의 첫사랑 순신이와 마찬가지로 전체 흐름에서 벗어난 곁다리 이야기이다.
이 소설의 주요 내용은 현재 영두가 대온실 수리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는 안문자의 슬픈 과거이다. 안문자는 원래 마리코라는 일본인이다. 일제시대 한국인과 재혼한 어머니, 동생과 함께 서울로 와서 살고 있었다. 일제가 전쟁에 패배한 후 어머니는 남매를 두고 일본으로 떠나고 양부인 박목주와 함께 해방된 한국에서 산다. 해방 얼마 후 일어난 6·25 전쟁으로 인해 서울은 아수라장이 되고, 1·4후퇴 때 상사의 명령으로 인천에 다녀와야 했던 양부는 남매를 대온실 아래 배양실에 숨겨두고 인천으로 향한다. 하루이틀만에 돌아온다던 양부는 돌아오지 않는다.
소설은 잔잔하게 진행된다. 첫 절반을 읽는 동안은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여러 갈래 이야기가 교차되어 진행되면서 흐름에 대한 집중력이 자주 흐뜨러진다. 각 이야기가 대단히 흥미롭거나 박진감 넘치는 것은 아니라서 지루한 감이 없지는 않다. 사실, 주된 흐름과 큰 상관이 없는 주변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길게 늘어뜨릴 일인가 싶은 생각도 든다. 소설은 계속 장면을 바꿔가면서 진행이 되는데, 결국 읽는 도중 내가 궁금한 건 안문자에 관한 것 뿐이었다.
소설은 안문자 할머니의 과거가 드러나면서 흥미진진해지고 가슴 아픈 사연이 공개된다. 나라는 패망하고, 어머니는 떠나고,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는 마리코와 남동생, 두 아이가 일제 만행에 대해서 원한을 품고 있었을 사람들 틈에서 사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창경원을 놀이터 삼아 본국 일본 잡지에 동화를 투고할 정도로 재능있고 천진난만하던 마리코는 동생과 함께 어려운 시간을 보낸다. 견디기 힘든 슬픈 시간은 전쟁과 함께 극대화하고, 그나마 둘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아버지는 총맞아 죽고, 동생은 숨어있는 동안 독감에 걸려 죽을 뻔 한다.
전쟁 격변기에 자신을 지킬 힘이 없는 아이들의 비극을 평화로운 시대에 사는 작가가 안타까움과 따뜻함, 그리음으로 써내려간 가슴아리는 소설이다. 문장은 차분하고 서술은 서정적이다. 작가는 두 남매의 비극을 가슴아프게 표현한다. 게다가 동생은 양부를 죽인 원수를 죽을 때까지 은인으로 여기는 처지가 된다. 전쟁은 참 잔혹하고 잔인하다. 불행했던 남매가 어찌 이 둘 뿐일까? 전쟁의 비참함을 온몸으로 얻어맞은 두 남매의 슬픈 이야기. 이렇게 감상을 쓰고 맺으면 좋겠는데 나는 이 소설에 대해서 할 말이 좀 남아 있다.
작가는 대온실의 역사적 가치와 지어진 연원을 찾기 위해 많은 취재를 했지만 대온실이 창경궁을 훼손시키기 위해 지은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어 보인다. 심지어 창경궁이 동식물원이 창경원이 되어 한 나라의 궁궐이 완전히 짓밟힌 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안타까움을 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동물을 소재로 천진한 동물동화를 쓴 어린 시절 안문자에게만 아련한 그리움을 갖는다. 경복궁을 가려 버린 조선총독부 건물처럼 창경궁을 모욕하고자 만든 건물에 대해서는 어떠한 감상도 남기지 않는다.
작가의 안타까움이 향하는 곳이 일제시대라는 점도 싫다. 첫사랑이 일어난 시대도 안타까움이 묻어 있긴 하지만 그것보다 할머니에 대한 안타까움이 훨씬 강하다. 창경원에서는 안문자 할머니가, 창경궁에서는 영두가 노는 모습을 그리면서 둘을 동일시한다. 아주 꼴 좋게 돌아간다. 할머니의 비극은 사실 해방에서 비롯된 것이다. 할머니가 불행해 지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해방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진 않았겠지만 소설이 흘러가는 흐름은 해방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피천득의 '인연'이 떠오른다.
이 소설에서 가장 경악할만한 것은 이 소설이 일본이 해방 이후 지금까지 염치없이 일관되게 유지해온 가해자와 피해자 바꿔치기를 노골적으로 차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딧불의 묘'는 명작 애니메이션의 반열에 올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인을 묘사할 때, 전쟁에서 피해입은 불쌍한 사람들이며, 전쟁의 비극을 오롯이 몸으로 뒤집어쓴 불행한 국민들로 그린다. 그들을 괴롭히는 사람은 시도 때도 없이 삶의 터전을 폭격하는 미군이다. 애니메이션을 보는 동안 일본은 피해자이고, 미국은 가해자라는 인식이 스며들 수밖에 없다. 일본인들이, 애니메이션 속 남매가 고통을 받은 것이 미국 때문인가? 아니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 때문이다.
안문자 남매가 당한 고통이 한국사람 때문인가? 아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노골적으로 일본인의 색안경을 쓰고 당시 상황을 묘사한다. 아이들을 괴롭히는 건 한국사람이다. 전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범죄 중 하나인 강간의 위험을 아이에게 끼치는 것도 한국 사람. 아이들의 양부를 죽이는 것도 일제에 부역하던 한국사람, 천진한 아이들은 불행해져만 간다. 반면에, 고통받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일본인 남매이다. 영광스럽게도 자신이 평생동안 갈고닦은 학문적 성과를 고맙게도 창경궁에 대온실을 떡하니 박아놓는데 모두 사용하여 주신 설계자님도 일본 분이시다. 창경궁에 대한 추억도, 할머니와 동일시되는 영두의 기억도 굉장히 따뜻하다. 반면에 창경궁에서 벌어진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기억을 하나 끄집어 내는데 그건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패륜사건이다.
전쟁, 강간, 살인, 폭력 등 부정적인 이미지는 온통 한국사람에게 덧씌워져 있고, 순진, 천진난만, 따뜻함, 그리움 등 긍정적인 이미지는 니혼진사마께서 가져 가신다. 우리 문화재에 대한 예의도 없고, 고려도 없다. 고통당했던 우리 민초들의 삶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일제시대를 그리워 하는데다 일본인은 피해자다. 작가는 도대체 어느나라 사람이며 이 소설을 쓴 의도가 무엇일까?
이 소설을 쓴 작가의 책은 처음 읽었다. 꽤 유명한 작가인 것 같다. 작가가 맘대로 쓰고 싶은대로 써재끼면 그걸 막을 권리도 능력도 없다. 하지만 최소한 인류애의 탈을 뒤집어 쓰고 역사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글을 쓴 작가의 책은 다시는 읽고 싶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지도 않다. 정말 참을 수 없는 건 재능이 뛰어난 작가가 교묘하게 일본의 시점을 투영한 글을 기술좋게 써냈다는 점이다. 책 한 권이 결정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작업이 하나씩 쌓이다 보면 우리 머릿속에 일본이 가해자라는 생각이 조금씩 희석될 것이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았는데도 이제는 일본을 용서하고 함께 가자는 주장이 강해질 것이다. 짜증이 솟구친다.
모든 소설이 역사의식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다. 모든 소설가가 민족주의자가 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아직도 반성하지 않는 가해자들에 대해 가지는 따뜻한 마음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전쟁의 비참함과 숙명적인 비극을 그 속에서 고통받는 아이들을 통해서 표현하고 싶었다면 다른 방법이 많았을 것이다. 구태여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꿔치기 해서 그 비극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
보편성은 중요하다. 하지만 역사의식없이 인간애를 구실 삼아 가해자의 입장을 옹호하는 이런 소설을 별로 추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