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결국 조낭자가 저지른 일이란 말인가? 어젯밤 일행이 먹는 음식에 독을 타서 모조리 실신시켜 이 황량한 무인도에 내버려두고 자기 혼자 페르시아인의 배에 올라 선원들을 협박해서 훌쩍 떠나버린 것은 아닐까? 왜 그랬을까?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나를 따돌려 이런 섬에 쫓아내놓고 무림지존 도룡도와 의천보검을 송두리째 가져다 마음 놓고 명교 세력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서….…?‘ - P25

거미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느덧 입술 언저리에 실낱같은 미소가 감돌았다. 장무기의 팔목을 잡았던 손이 슬며시 풀리더니 스르르 두 눈이 감겼다. 그러고는 마침내 숨이 멎었다. 장무기가 숨결과 심장박동을 더듬어보았으나 모두 잡히지 않았다. 거미 아리는 기어코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 P36

사랑하는 아내 거미 은리의 무덤

그런 뒤 그 아래에 또 글자를 새겼다.

삼가 장무기 세움 - P38

"지약, 그대는 나의 아내요. 지난날 내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방황했던 것은 사실이오. 그저 당신이 탓하지 않기만 바랄 따름이오. 이제 오늘부터 그대에 대한 내 마음은 결코 변함이 없을 거요. 그대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다 하더라도 단 한마디 심한 말로도 책망하지않을 것이오."
"무기 오라버니, 당신은 사내대장부예요. 오늘 저녁 제게 하신 말씀, 꼭 기억해두세요." - P50

심마니들패거리와 헤어지고 났을 때 주지약이 불쑥 물었다.
"양부님, 저 사람들마저 모조리 죽여 입막음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말을 듣고 장무기가 버럭 고함쳐 꾸짖었다.
"지약,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저 심마니들은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왜 죽여서 입을 봉한단 말이오? 설마 우리와 마주치는 사람마다 모조리 죽여 없앨 작정이오? 그래야 당신 마음이 놓이겠소?"
주지약은 군색한 나머지 얼굴빛이 온통 새빨개졌다. - P71

장무기는 그제야 확연히 깨달았다. 옳거니, 오늘 이곳에서 개방의회합이 열리게 된 모양이구나! 그러기에 술집 주인은 자기네 일행셋도 개방의 제자들인 줄 알고 돈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고개 - P74

사화룡이 가운데 놓인 부들방석에 좌정하자, 제자들도 질서정연하게 땅바닥에 자리 잡고 앉았다. 사화룡은 대뜸 장발용두를 돌아보고 분부를 내렸다.
"옹씨(翁氏) 아우님, 우선 자네가 금모사왕과 도룡도에 대한 일부터 여기 있는 모든 형제들에게 설명해줘야겠네."
장무기는 개방 방주의 입에서 금모사왕과 도룡도 라는 말이 나오자 가슴이 마구 요동쳤다. 오늘 개방의 모임은 역시 양부가 우려했던 대로 금모사왕 사손과 도룡도, 그리고 명교에 관한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온 신경을 두 귀에 집중시켰다. - P85

사화룡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참 좋은 일이군. 송청서를 우리 개방에 받아들여 임시로 육대 제자의 지위에 앉히겠다. 그대는 팔대 장로 진우량의 통솔 아래 들어가 그 지휘를 받도록 하라. 이제부터는 모름지기 개방의 규칙을 엄수하고 본방을 위해 힘써야 한다. 그대가 비록 육대 제자이긴 하나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전례를 깨고 대사를 의논하는 데 참여시키겠다."
송청서는 두 눈에 분함과 원망이 가득 서렸으나 울분을 억누른 채 사화룡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 P95

"그렇다네. 자, 그럼 이제 슬슬 얘기해보겠습니다. 우선 장발용두 형님은 오독실심산(五毒失心散)을 얼마쯤 조제해서 송씨 아우에게 넘겨주십시오. 송씨 아우는 그 약을 가지고 무당산으로 돌아가 은밀히 장진인과 무당 육협이 드실 음식에 섞어 넣으시게. 우리는 무당산 아래 잠복해 있다가 일이 성사되었다는 송씨 아우의 신호를 받는 즉시 올라가서 장삼봉 진인 이하 여러분을 일거에 사로잡는 겁니다.
그리고 이들을 인질로 삼아 협박한다면 효성이 유별나게 지극한 장무기란 놈이 우리 개방의 호령대로 따르지 않고 배겨나겠습니까?" - P128

"하극상이라, 그것이 우리 무림인들에게 가장 큰 금기인 줄은 자네가 구차스레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네. 그런데 막칠협은 송씨 아우님과 어떻게 되는 사이더라? 막칠협의 항렬이 높은지, 아니면 송씨 아우님의 항렬이 높은지 조금 아리송하구먼, 그것부터 분명히 말씀해주시지 않겠나?" - P131

"어디 내가 짐작으로 맞혀볼까요? 당신은 지금 내가 현명이로를이 객점에 보내 사대협과 당신 애지중지하는 주소저를 해치지 않았을까 겁이 나서 그러는 거죠? 어때요, 이래도 내 말을 안 믿으시겠어요?"
이 말로 조민은 장무기가 마음속으로 가장 두려워하고 있던 것을 건드린 셈이었다. 그는 두 번 생각해볼 것도 없이 발길질로 문짝을 걷어차기가 무섭게 안으로 뛰어들었다.
"당신……. 당신이 정말….."
어느새 이마에 힘줄이 시퍼렇게 돋아나고 다그쳐 묻는 목소리가 떨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 P154

장송계가 무거운 입으로 천천히 되물었다.
"큰형님은 지금 무기 녀석이 일곱째한테 독수를 쓰지 않았을까, 그걸 걱정하고 계시는 겁니까?"
송원교의 대꾸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장무기는 비록 대사백의 모습을 보지는 못했어도 그가 머리를 천천히 끄덕이고 있음을 짐작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 P165

동굴 어귀 쪽에서 꺾여 들어오는 흐릿한 빛살을 통해 그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 시체의 주인이 바로 일곱째 사숙 막성곡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두말없이 막내 사숙의 시체를 안아들고 뚜벅뚜벅 동굴 바깥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놀랍고 당황한 나머지 송원교 일행에게 발각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조차 잊어버린 것이다. 불빛이 점차 강해지면서 시체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일곱째 사숙 막성곡이 틀림없었다. - P167

느닷없는 변괴에 장무기는 그만 혼비백산을 하고 말았다. 방금 혈도를 찍은 손길이 그다지 무거운 것도 아니어서 경상조차 입힐 만한 것이 아니었는데 어째서 넷째 사백의 숨이 끊어질 수 있단 말인가? 혹시 자기가 모르는 고질병이 있어서 별안간 타격을 입고 발작한 것은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등줄기에 식은땀이 돋아났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길로 황급히 넷째 사백의 콧김부터 더듬었다. 그 순간, 돌연 장송계의 왼손이 슬그머니 뻗어오더니 장무기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복면을 홱 잡아채어 벗겨버렸다. 두 사람은 서로 빤히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장송계가 입을열었다.
"잘한다, 무기…….… 이제 봤더니…… 이제 봤더니 너였구나. 우리가 그토록 널 위해 주었는데, 이럴 수가….…!" - P183

이제 할 일은 땅에 떨어진 장검을 집어들고 자신의 목젖에 대고 쓰윽 그어버리는 일뿐이었다. 그리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서슬 푸른 칼날이 목덜미에 막 닿는 찰나 조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무기! 사내대장부가 한때 억울한 일을 좀 당했기로서니 그걸 참지 못하고 죽으려는 거야? 하늘 아래 진상이 밝혀지지 않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어. 당신은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더라도 막칠협을 죽인 진범을 찾아내 반드시 복수를 해야만 한다구. 그래야만 무당파 여러 협사 어른들이 당신에게 쏟은 극진한 사랑이 헛되지 않게 된단 말이에요!" - P184

그러자 조민의 입에서 차가운 반문이 연거푸 터져나왔다.
"막칠협을 당신이 죽였나요? 어째서 당신의 사백과 사숙 네 분이 당신을 범인으로 단정했죠? 은리 아가씨를 내가 죽였나요? 어째서 당신은 나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몰아세우죠? 설마 당신이 남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것은 괜찮아도, 남이 당신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것은 용납 못하겠다. 그런 얘기는 아니겠죠?"
앙칼지게 쏘아붙이는 몇 마디가 청천벽력과도 같이 장무기의 고막을 뚫고 들어갔다. 너무나 큰 충격에 그는 할 말을 잃은 채 퀭한 눈망울로 허공을 쳐다보았다. 지금 이 시각에 몸소 겪어보고 나서야 세상일이란 게 이따금은 헤아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제 그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조낭자 …… 혹시 이 여인도 나처럼 억울한 누명을 썼단 말인가? - P186

"그렇지요. 이 친구는 제 손으로 일곱째 사숙 되는 막성곡을 살해한 자인데, 무당파 본문제자들이 죽이지 않고 그냥 내버려둘 리 있겠습니까? 이런 불충불효하고 의리 없는 패륜아, 반역도의 더러운 피를, 우리같이 의협의 길을 걷는 사람의 칼날에 묻힐 수야 없는 노릇이지요."
바위더미 뒤편에서, 장무기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청천벽력과 같은 이 말에 대경실색했다.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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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무기는 대답 대신 그를 선실 한가운데 의자에 모셔 앉힌 다음, 조용히 무릎 꿇고 엎드려 큰절부터 올렸다. 인사말을 하려니 울음이 먼저 터져나왔다.
"큰아버님, 불초 무기가 문안인사 드립니다. 하루 한시라도 조속히 모셔왔어야 할 것을, 제가 불효하여 큰아버님께 너무나 많은 신산고초를 겪게 해드렸습니다!"
이 말을 듣고 사손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대…… 그대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큰아버님, 제가 바로 장무기, 아니 사무기(謝無忌)입니다!"
그러나 천만뜻밖의 말에 충격을 받은 사손이 좀처럼 믿어주려 하지 않았다.
"네가…… 네가 누구라고? 다시 말해봐라…" - P345

"명교 교주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호호, 어르신 앞에 이젠 말씀드려야겠군요. 당신의 보배 같은 수양아드님이 바로 천하에 당당하신 명교 교주님이랍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수양아드님의 부하가 되는 셈이죠."
그러나 사손은 믿지도 못하고 안 믿을 수도 없어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조민은 장무기가 어떻게 해서 명교 교주의 자리에 추대되었는지 간략하게나마 설명해주었다. - P404

"방금 사씨 어른께서 내건 두 번째 조건이 문제였어요. 저 사람들더러 ‘성녀 다이치스‘를 석방하라고 요구하셨지 않아요? 비록 호의적으로 하신 말씀이지만, 지혜 보수왕의 눈을 속이지는 못했죠. 만일 저들더러 금화파파를 석방하라고 요구하셨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겁니다. 어르신께선 물체를 보지 못하시니까 금화파파의 변장술이 얼마나 감쪽같았는지, 또 그래서 어느 누구도 속여넘길 수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실 수밖에 없었죠. 조낭자, 당신은 그 총명한 두뇌로 뻔히 알 수 있었고 똑똑히 볼 수 있었으면서도 왜 거기까지 생각을 못한 거예요?" - P420

"교주 오라버니, 제가 시중들 테니 옷 갈아입으세요."
장무기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콧매가 시큰해지면서 쓰라린 심사가 전신을 찌르르하니 훑고 내려갔다.
"너는 이미 총교 교주가 된 몸 아니냐. 나는 네 밑에 속한 사람인데 어쩌자고 이런 일을 또 하려는 거냐?"
"교주 오라버니, 이게 마지막이에요. 오늘 이후 우리 두 사람은 동서로 천리만리 아득한 곳에 떨어져 두 번 다시 만나볼 날이 없을 거예요. 제가 당신의 시중을 더 들어드리고 싶어도 할 수 없고요." - P459

"제가 여러분을 무사히 중원 땅에 돌려보내도록 여기 사람들에게 지시해놓았어요. 이제 우리 여기서 작별해야겠네요. 아소의 몸은 비록 페르시아에 가 있겠지만 날마다 장교주님께서 복체 강녕(福體康寧)하시고, 하시는 일마다 순조롭게 성사되기를 축원드릴 겁니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에 또다시 울음이 섞여 나왔다. - P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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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요구는 아주 쉬운 것이오. 사실 말이지, 아미파 장문인 멸절사태와 나는 옛날부터 깊은 정분을 나눈 사이였소. 그 주씨 성을 가진 젊은 처녀도 실상 나하고 멸절 비구니가 사사로이 관계를 맺어 낳은 딸이라오. 이쯤 되면 내 말을 이해하시겠소? 나는 십향연근산의 해독약이 필요하오. 녹선생께서 약을 주신다면 나는 그들 두 모녀를 해독시켜서 내보낼 생각이오. 소민군주에게는 내가 책임지고 잘 말씀드려 해결하리다. 만에 하나, 녹선생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 생긴다면, 이 고두타와 멸절 비구니 일가족 모두 세세대대로 남자는 도적놈이 될 것이요 계집은 갈보가 될 것이고, 제명에 죽지도 못할 것이며 죽어서도 지옥에 떨어져 영세토록 환생하지 못할 것이오!" - P105

조민은 챙이 널따란 바람막이 모자를 끌어당겨 고운 머리카락을 덮어씌우더니 비밀얘기라도 하듯이 소곤소곤 귀띔을 했다.
"고대사, 우리 함께 장무기란 놈을 보러 가요."
범요또 한 번 놀랐다. 곁눈질로 흘끗 보았더니, 그녀의 해맑은 눈동자에 꿈꾸듯 일렁거리는 물결이 감돌고 발그레하니 상기된 두뺨에는 애교와 수줍음, 그리고 뜻 모를 희열이 피어올라 있었다. 그표정은 결코 범요 자신의 가슴속을 들여다보고 일부러 던진 말이 아님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 P120

조민이 창밖의 둥그런 보름달에 눈길을 던지면서 불쑥 말을 꺼냈다.
"나한테 세 가지 일을 해주겠다고 약속한 말씀, 잊지 않으셨죠?"
"물론 잊지 않았소, 낭자가 요청하는 대로 내 힘껏 해내리다."
조민이 고개를 돌려 장무기를 지그시 쏘아보았다.
"지금 막 첫 번째 일이 생각났어요. 당신이 날 데리고 도룡도를 찾으러 가줬으면 좋겠어요."
장무기는 그녀가 자기한테 요구하는 세 가지 일이란 게 극도로 해내기 어려운 것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첫 번째 요구사항부터 이처럼 하기 힘든 문제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 P133

"지약아…… 오늘부터 네가 우리 아미파의 장문인이다…… 내가 너한테 부탁한 일들을…… 다 해낼 수 있겠지?"
멸절사태는 모든 제자들이 알아들으라고, 마지막 남은 힘까지 다 끌어내어 당부 말을 남겼다. 주지약이 울먹이며 대답했다.
"예, 사부님…… 불초 제자 감히 잊지 않겠습니다!"
다짐을 받아낸 멸절사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그럼 내가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겠구나……" - P184

"중원 육대 문파는 어제까지만 해도 명교를 적대시해왔소. 그러나 장교주께서 지난날의 원혐을 개의치 않고 덕으로 갚아 오히려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주셨소. 오늘 이후로 쌍방 간의 원한은 말끔히 청산해 버립시다. 그리고 이제부터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오랑캐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로 합시다!" - P189

"소민군주 마마, 고두타가 사죄드립니다."
조민은 답례하지 않고 차갑게 쏘아붙였다.
"고대사가 정말 이 사람을 기막히게 속였더군요. 당신이 군주라고 부른 내가 얼마나 골탕을 먹었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예요?" - P202

주지약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항변했다.
"저는 사부님의 명으로 본파 장문인의 직분을 이어받았으므로, 이 철 반지는 절대로 넘겨드릴 수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사실 장문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부님 앞에 거듭 맹세한 몸이라, 절대로…… 절대로 그 어르신의 당부를 저버리지 못하겠습니다!" - P213

"금화파파더러 방금 뭐라고 했소? 도룡도라니….…?"
"폐원에서 저 노파가 하는 말 듣지 못했어요? 멸절사태의 의천검과 겨루기 위해 온 세상을 다 뒤져 어느 옛 친구한테서 보도를 빌렸노라고요. ‘의천검이 세상에 나오지 않으면 누가 감히 예봉을 다투랴?‘ 는 말처럼 의천보검과 예봉을 다툴 수 있는 칼이라면 당연히 도룡도밖에 없죠. - P234

배가 정박하기도 전에 난데없이 그리 높지 않은 산마루턱에서 대갈일성 호통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력과 기운이 철철 흐르는 목소리에 사나우면서도 위엄 있는 기풍이 가득 서렸다. 바로 양부 금모사왕 사손의 목소리였다. 장무기는 놀랍고도 반가웠다. 헤어진 지 벌써 10여 년, 양부의 위풍당당함은 옛날이나 다름없었다. 그 우렁찬 음성을 다시 듣게 되었는데 어찌 기쁘지 않으랴? 그는 사손이 어떻게 아득히 머나먼 북극 빙화도에서 이 남쪽 바다 섬까지 오게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또 금화파파에게 자신의 정체가 간파당할 위험성마저 돌아보지 않고 즉시 급한 걸음걸이로 사다리를 타고 돛대 위로 올라가 방금 목소리가 들려온 산마루턱을 바라보았다. - P246

금화파파의 목소리가 들렸다.
셋져 오라버니, 나는 당신이 남의 도움받는 것을 싫어하시는 걸 알기 때문에 나서지 않았어요. 이런 나를 원망하지는 않겠지요?"
장무기는 의아스러움에 못 이겨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금화파파는 방금 자신의 양부더러 ‘셋째 오라버니‘ 라고 불렀다. 금모사왕 사손의 항렬이 셋째 라니, 금화파파는 양아버지보다 더 나이가 많지 않은가? - P258

사손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소! 한부인, 나는 고아가 된 무기 녀석이 얼마나 외롭게 고생하고 있을까 걱정스러워 그대의 말만 믿고 아득히 머나먼 북극 빙화도를 떠나 중원 땅에 돌아왔소. 그대는 분명히 내게 무기 녀석을 찾아 데려오겠노라고 약속했소.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거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장무기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제야 양부가 온 천하에 원수들이 깔려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위험을 무릅써가며 이 중원 땅에 돌아온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오로지 ‘외톨박이 고아’가 되어버린 수양아들 한 사람만을 위해서 돌아왔던 것이다. - P262

"진우량을 경계하라니? 그 사람은 의리를 중히 여기는 훌륭한 사람이 아니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날 속이려고 하는 말은 아니죠?"
장무기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뜨악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무엇 때문에 당신을 속인단 말이오? 진우량이야말로 정장로를 대신해서 기꺼운 마음으로 죽으려고까지 했으니 보기 드물게 의리깊은 사나이 아니오?"
조민의 까만 눈동자가 또렷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리쉬었다.
"장공자님,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한심하군요. 그 흉악하고 난폭하고 고집스런 영웅호걸들을 거느리고 명교 안팎의 대소사를 도모하시는 교주란 분이 그렇듯 쉽사리 남의 속임수에 넘어가다니, 도대체 어쩌려고 그러는 거예요?"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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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장무기는 조민의 속셈을 꿰뚫어 보았다. 그녀는 납치해온 육대 문파 고수들을 이곳에 가둬놓고 약물로 저들의 공력을 억제시킨 다음, 조정에 귀순하도록 핍박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포로들이 굴복하지 않을 것은 보나마나 뻔한 일이다. 그럼 조민은 부하들을 시켜 그들과 차례차례 싸우게 하고 곁에서 지켜보면서, 육대 문파의 정교하고도 오묘한 무공 초식을 훔쳐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지독한 심보, 악랄하기 짝이 없는 그 계략이야말로 기상천외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 P28

고두타가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즉시 두 손을 둥그렇게 모아 활활 타오르는 불꽃 형상을 지어 가슴 앞에 놓더니 공손히 몸을 굽혀 장무기에게 큰절을 올렸다.
"광명우사 범요, 삼가 교주님을 뵙습니다. 불초한 저를 죽이지 않고 살려주신 은혜 깊이 감사드립니다. 무례하게 하극상을 범한 죄,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고두타의 입에서 떠듬떠듬 첫 마디가 흘러나왔다. 10여 년 동안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았던 탓으로 억양이 무척 부자연스러웠다. - P60

장교주는 무공 실력도 뛰어날 뿐더러 사람 됨됨이마저 아주 인자하고의로워 뭇 사람들을 진심으로 굴복시키고도 남을 만한 사람이다. 단지 마음씨와 수단이 모질지 못하고 어수룩한 면을 보여 아녀자들처럼 쓸데없는 일에 이러쿵저러쿵 딴소리를 늘어놓는 점이 옥에 티라고나 할까, 그 나머지는 자신이 떠받들고 모셔야 할 교주로서 흠잡을 데가 없는 인재였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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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무기가 등장한 주부터 주기약의 관심은 줄곧 그에게 쏠려 있었다. 그녀는 아미 문하에서 멸걸사테의 환심을 적지 않게 얻은 덕분으로 스승에게 직겁 역학(易學) 원리의 진수를 건해 받고 있던 터였다. 장무기에게 관심을 쏟고 있는 만큼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짐짓 낭랑한 목소리로 스승과의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 P122

꺽다리 영감이 장무기를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으나 땅딸보 영감은 다시 싸워봤자 추태만 부릴 게 빤한 터라 일찌감치 패배를 인정했다.
"귀하의 신공은 과연 세상을 덮을 만하오. 이 늙은 것이 평생 처음 보았소. 우리 화산파가 졌소이다."
상대방이 정중하게 포권의 예의를 갖추니, 장무기도 얼른 두 손을 맞잡아 답례했다.
"죄송합니다! 이 후배가 운이 좋았지요. 방금 네 분께서 손속에 사정을 두셨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던들 이 후배는 정반양의도검 아래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 - P135

하태충 부부는 속으로 걱정이 태산 같았다. 선우통이 비록 간악한 인물이라고는 해도 역시 명색이 화산파의 장문인이 아닌가? 자기네 부부가 실수를 저질렀다고는 하나, 일개 문파의 대표 격인 사람을 죽였으니 그것만으로도 강호 무림계에 보기 드문 대혼란을 일으킨 셈이다. - P141

장무기는 그녀가 자신에게 칼부림을 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칼끝을 피하거나 가로막겠다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의천검의 예리한 칼끝이 가슴에 와 닿자, 그제야 대경실색을 하고 피하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 P161

송원교가 사문의 아우들과 다른 제자들을 향해 자신의 뜻을 전했다.
"오늘 거사에서 우리 무당파는 이미 최선을 다했다고 보네. 생각하건대 마교의 운수가 다하지 않아 하늘이 저런 해괴한 젊은이를 태어나게 하셨는지도 모르겠네. 만약 이대로 싸움을 계속한다면, 우리 명문정파가 마교와 또 다를 것이 뭐 있겠는가?" - P176

은리정이 살기를 띠는 순간, 장무기는 또 한차례 선지피를 토해내더니 두 눈을 스르르 내리감고 앉은 채로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출혈이 너무 심했던가, 핏기 잃은 얼굴빛이 허옇게 질린 채 점차 혼수상태에 빠져들면서도 격탕하는 심정을 이기지 못하고 흐리멍덩한 의식 속에 잠꼬대하듯 한마디 중얼거렸다.
"작은 아저씨……… 날 죽여줘요!"" - P177

"네가…… 네가 무기란 말이냐?"
이제 장무기의 전신에 기력이라고는 반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머지않아 죽어가리라는 사실을 아는 만큼 더는 감출 필요도 없었다.
"작은 아저씨…… 난… 난 정말 아저씨가 보고 싶었어요.... 시시때때로…… 그리웠어요!"
은리정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손에 들고 있던 장검을 소리나게 던져버리고 몸을 굽혀 장무기를 안아들었다.
"네가 무기로구나! 네가 무기였어…… 아하하………! 네가 내 다섯째 형님의 아들 장무기였다니……!" - P178

이제 육대 문파 모든 사람들은 광명정에서 떠나갔다.
저들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자 결국 명교와 천응교 신도들만 남게 되었다. 광명좌사자 양소와 백미응왕 은천정이 서로 마주보고 눈짓을 교환하더니 가지런히 목청을 드높여 큰 소리로 외쳤다.
"저희의 교를 보호해주시고 신도들의 목숨을 구해주신 장대협의 크신 은혜에, 명교와 천응교 전체 신도들은 삼가 머리 조아려 사례하오!" - P189

"내가 소개해드리지! 이분으로 말씀드리자면 천하에 간 덩어리 크기로 짝이 없는 기남아요 명교 좌우 광명사자, 사대 호교법왕, 오산인, 오행기, 그리고 또 천지풍뢰 사문을 통솔하시는 장교주님으로서, 아미파를 광명정 산 밑으로 쫓아내시고 멸절사태의 수중에서 의천보검을 거뜬히 탈취하신 분이지. 이런 인물이라면 사태의 법호쯤 물어보신다고 해서 자격이 없다거나 실례가 되지는 않으렷다?" - P239

먼저 소림을 토벌하고, 다음은 무당 차례, 先誅少林, 再減武當,
오로지 우리 명교, 무림의 왕자라 일컫도다! 惟我明敎, 武林稱王!

은천정, 철관도인, 설부득을 비롯한 사람들의 입에서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제히 외마디 소리가 터져나왔다.
"이화강동(移過江東)의 계략이다!"
나한불상의 휘황찬란한 금박에 깊숙이 새겨진 열여섯 글자. 그것은 마치 사나운 악룡이 어금니를 드러내고 발톱 춤을 추듯 공포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누군가 소림파를 궤멸시킨 다음, 그 책임을 명교 측에 뒤집어씌우려고 꾸며놓은 계략이 분명했다. - P330

장무기는 속에서 울화통이 불끈 치밀었다. 저런 불여우 같은 것, 명교 교주의 신분을 사칭하는 건 그렇다 치고, 아예 내 이름 석 자까지 팔아 태사부님을 속이려 들다니! 세상에 저런 발칙한 계집이 어디 또 있단 말인가?
한편에서, 장삼봉은 ‘장무기‘ 란 이름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어떻게 해서 이 젊고 곱상한 처녀가 마교 교주가 되었단 말인가? 더구나 무기 녀석과 이름자까지 똑같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구나. - P368

설부득이 그녀의 성난 표정을 귀엽게 보았는지 낄낄대고 웃으면서 약을 올리기 시작했다.
"히히히! 우리 장교주님은 청년 영웅이시고, 조낭자는 우리 교주님보다 몇 살 아래가 되시겠지? 어떻소, 우리 교주님한테 시집을 오시는게? 이 땡추 눈에 조낭자는 꽃처럼 보름달처럼 아리따운 규수이시니, 우리 어엿한 청년 교주님하고 아주 썩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되시겠어." - P388

"태사부님, 저 시주분께서 한사코 우리 무당파의 무공을 보고 싶은 모양이온데, 굳이 태사부님께서 번거롭게 나서실 것까지는 없지 않겠습니까? 불초 제자가 몇 수 보여드려도 넉넉할 듯 싶습니다."
얼굴이 온통 흙먼지로 땟국이 낀 도동은 바로 청풍으로 변장한 장무기였다. - P398

장삼봉은 도동의 얼굴을 뚫어져라 굽어보았다. 눈빛에 광화(光華)를 드러내지는 않았어도 형형하고 은은히 비쳐 나오는 이상야릇한 정기가 서려 있었다. 그것은 내공이 절정에 도달한 사람에게만이 나타나는 광채였다. 장삼봉은 이런 눈빛을 가진 인물을 평생 서너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밖에 만나보지 못했다. 하나는 장삼봉이 어린 장군보 시절에 모셨던 스승 각원대사였고, 또 한 사람은 곽정 대협, 그리고 신조대협 양과 등 고작 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이 세상을 떠난 지금에 와서 장삼봉 자신 말고도 이런 광채를 품을 만큼 등봉조극(登峯造極)의 경지에 이른 또다른 사람이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 P399

"내 선친 취산공(翠山公)이 태사부 어른의 다섯째 제자 분이셨으니, 내가 ‘태사부님‘ 이라 부르지 않으면 또 뭐라고 호칭해야 옳겠는가? 우리 부자관계가 이렇듯 떳떳할진대 무슨 부끄러움을 느낀단 말인가!"
그러고는 곧 돌아서서 장삼봉 앞에 무릎 꿇고 이마를 조아렸다.
"철없는 아이 장무기, 삼가 태사부 어르신과 셋째 사백님께 문안 여쭙니다. 일이 창졸간에 벌어져 미처 아뢰지 못한 죄, 용서하여주십시오." - P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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