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결국 조낭자가 저지른 일이란 말인가? 어젯밤 일행이 먹는 음식에 독을 타서 모조리 실신시켜 이 황량한 무인도에 내버려두고 자기 혼자 페르시아인의 배에 올라 선원들을 협박해서 훌쩍 떠나버린 것은 아닐까? 왜 그랬을까?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나를 따돌려 이런 섬에 쫓아내놓고 무림지존 도룡도와 의천보검을 송두리째 가져다 마음 놓고 명교 세력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서….…?‘ - P25

거미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느덧 입술 언저리에 실낱같은 미소가 감돌았다. 장무기의 팔목을 잡았던 손이 슬며시 풀리더니 스르르 두 눈이 감겼다. 그러고는 마침내 숨이 멎었다. 장무기가 숨결과 심장박동을 더듬어보았으나 모두 잡히지 않았다. 거미 아리는 기어코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 P36

사랑하는 아내 거미 은리의 무덤

그런 뒤 그 아래에 또 글자를 새겼다.

삼가 장무기 세움 - P38

"지약, 그대는 나의 아내요. 지난날 내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방황했던 것은 사실이오. 그저 당신이 탓하지 않기만 바랄 따름이오. 이제 오늘부터 그대에 대한 내 마음은 결코 변함이 없을 거요. 그대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다 하더라도 단 한마디 심한 말로도 책망하지않을 것이오."
"무기 오라버니, 당신은 사내대장부예요. 오늘 저녁 제게 하신 말씀, 꼭 기억해두세요." - P50

심마니들패거리와 헤어지고 났을 때 주지약이 불쑥 물었다.
"양부님, 저 사람들마저 모조리 죽여 입막음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말을 듣고 장무기가 버럭 고함쳐 꾸짖었다.
"지약,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저 심마니들은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왜 죽여서 입을 봉한단 말이오? 설마 우리와 마주치는 사람마다 모조리 죽여 없앨 작정이오? 그래야 당신 마음이 놓이겠소?"
주지약은 군색한 나머지 얼굴빛이 온통 새빨개졌다. - P71

장무기는 그제야 확연히 깨달았다. 옳거니, 오늘 이곳에서 개방의회합이 열리게 된 모양이구나! 그러기에 술집 주인은 자기네 일행셋도 개방의 제자들인 줄 알고 돈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고개 - P74

사화룡이 가운데 놓인 부들방석에 좌정하자, 제자들도 질서정연하게 땅바닥에 자리 잡고 앉았다. 사화룡은 대뜸 장발용두를 돌아보고 분부를 내렸다.
"옹씨(翁氏) 아우님, 우선 자네가 금모사왕과 도룡도에 대한 일부터 여기 있는 모든 형제들에게 설명해줘야겠네."
장무기는 개방 방주의 입에서 금모사왕과 도룡도 라는 말이 나오자 가슴이 마구 요동쳤다. 오늘 개방의 모임은 역시 양부가 우려했던 대로 금모사왕 사손과 도룡도, 그리고 명교에 관한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온 신경을 두 귀에 집중시켰다. - P85

사화룡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참 좋은 일이군. 송청서를 우리 개방에 받아들여 임시로 육대 제자의 지위에 앉히겠다. 그대는 팔대 장로 진우량의 통솔 아래 들어가 그 지휘를 받도록 하라. 이제부터는 모름지기 개방의 규칙을 엄수하고 본방을 위해 힘써야 한다. 그대가 비록 육대 제자이긴 하나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전례를 깨고 대사를 의논하는 데 참여시키겠다."
송청서는 두 눈에 분함과 원망이 가득 서렸으나 울분을 억누른 채 사화룡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 P95

"그렇다네. 자, 그럼 이제 슬슬 얘기해보겠습니다. 우선 장발용두 형님은 오독실심산(五毒失心散)을 얼마쯤 조제해서 송씨 아우에게 넘겨주십시오. 송씨 아우는 그 약을 가지고 무당산으로 돌아가 은밀히 장진인과 무당 육협이 드실 음식에 섞어 넣으시게. 우리는 무당산 아래 잠복해 있다가 일이 성사되었다는 송씨 아우의 신호를 받는 즉시 올라가서 장삼봉 진인 이하 여러분을 일거에 사로잡는 겁니다.
그리고 이들을 인질로 삼아 협박한다면 효성이 유별나게 지극한 장무기란 놈이 우리 개방의 호령대로 따르지 않고 배겨나겠습니까?" - P128

"하극상이라, 그것이 우리 무림인들에게 가장 큰 금기인 줄은 자네가 구차스레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네. 그런데 막칠협은 송씨 아우님과 어떻게 되는 사이더라? 막칠협의 항렬이 높은지, 아니면 송씨 아우님의 항렬이 높은지 조금 아리송하구먼, 그것부터 분명히 말씀해주시지 않겠나?" - P131

"어디 내가 짐작으로 맞혀볼까요? 당신은 지금 내가 현명이로를이 객점에 보내 사대협과 당신 애지중지하는 주소저를 해치지 않았을까 겁이 나서 그러는 거죠? 어때요, 이래도 내 말을 안 믿으시겠어요?"
이 말로 조민은 장무기가 마음속으로 가장 두려워하고 있던 것을 건드린 셈이었다. 그는 두 번 생각해볼 것도 없이 발길질로 문짝을 걷어차기가 무섭게 안으로 뛰어들었다.
"당신……. 당신이 정말….."
어느새 이마에 힘줄이 시퍼렇게 돋아나고 다그쳐 묻는 목소리가 떨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 P154

장송계가 무거운 입으로 천천히 되물었다.
"큰형님은 지금 무기 녀석이 일곱째한테 독수를 쓰지 않았을까, 그걸 걱정하고 계시는 겁니까?"
송원교의 대꾸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장무기는 비록 대사백의 모습을 보지는 못했어도 그가 머리를 천천히 끄덕이고 있음을 짐작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 P165

동굴 어귀 쪽에서 꺾여 들어오는 흐릿한 빛살을 통해 그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 시체의 주인이 바로 일곱째 사숙 막성곡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두말없이 막내 사숙의 시체를 안아들고 뚜벅뚜벅 동굴 바깥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놀랍고 당황한 나머지 송원교 일행에게 발각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조차 잊어버린 것이다. 불빛이 점차 강해지면서 시체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일곱째 사숙 막성곡이 틀림없었다. - P167

느닷없는 변괴에 장무기는 그만 혼비백산을 하고 말았다. 방금 혈도를 찍은 손길이 그다지 무거운 것도 아니어서 경상조차 입힐 만한 것이 아니었는데 어째서 넷째 사백의 숨이 끊어질 수 있단 말인가? 혹시 자기가 모르는 고질병이 있어서 별안간 타격을 입고 발작한 것은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등줄기에 식은땀이 돋아났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길로 황급히 넷째 사백의 콧김부터 더듬었다. 그 순간, 돌연 장송계의 왼손이 슬그머니 뻗어오더니 장무기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복면을 홱 잡아채어 벗겨버렸다. 두 사람은 서로 빤히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장송계가 입을열었다.
"잘한다, 무기…….… 이제 봤더니…… 이제 봤더니 너였구나. 우리가 그토록 널 위해 주었는데, 이럴 수가….…!" - P183

이제 할 일은 땅에 떨어진 장검을 집어들고 자신의 목젖에 대고 쓰윽 그어버리는 일뿐이었다. 그리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서슬 푸른 칼날이 목덜미에 막 닿는 찰나 조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무기! 사내대장부가 한때 억울한 일을 좀 당했기로서니 그걸 참지 못하고 죽으려는 거야? 하늘 아래 진상이 밝혀지지 않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어. 당신은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더라도 막칠협을 죽인 진범을 찾아내 반드시 복수를 해야만 한다구. 그래야만 무당파 여러 협사 어른들이 당신에게 쏟은 극진한 사랑이 헛되지 않게 된단 말이에요!" - P184

그러자 조민의 입에서 차가운 반문이 연거푸 터져나왔다.
"막칠협을 당신이 죽였나요? 어째서 당신의 사백과 사숙 네 분이 당신을 범인으로 단정했죠? 은리 아가씨를 내가 죽였나요? 어째서 당신은 나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몰아세우죠? 설마 당신이 남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것은 괜찮아도, 남이 당신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것은 용납 못하겠다. 그런 얘기는 아니겠죠?"
앙칼지게 쏘아붙이는 몇 마디가 청천벽력과도 같이 장무기의 고막을 뚫고 들어갔다. 너무나 큰 충격에 그는 할 말을 잃은 채 퀭한 눈망울로 허공을 쳐다보았다. 지금 이 시각에 몸소 겪어보고 나서야 세상일이란 게 이따금은 헤아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제 그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조낭자 …… 혹시 이 여인도 나처럼 억울한 누명을 썼단 말인가? - P186

"그렇지요. 이 친구는 제 손으로 일곱째 사숙 되는 막성곡을 살해한 자인데, 무당파 본문제자들이 죽이지 않고 그냥 내버려둘 리 있겠습니까? 이런 불충불효하고 의리 없는 패륜아, 반역도의 더러운 피를, 우리같이 의협의 길을 걷는 사람의 칼날에 묻힐 수야 없는 노릇이지요."
바위더미 뒤편에서, 장무기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청천벽력과 같은 이 말에 대경실색했다.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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