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요구는 아주 쉬운 것이오. 사실 말이지, 아미파 장문인 멸절사태와 나는 옛날부터 깊은 정분을 나눈 사이였소. 그 주씨 성을 가진 젊은 처녀도 실상 나하고 멸절 비구니가 사사로이 관계를 맺어 낳은 딸이라오. 이쯤 되면 내 말을 이해하시겠소? 나는 십향연근산의 해독약이 필요하오. 녹선생께서 약을 주신다면 나는 그들 두 모녀를 해독시켜서 내보낼 생각이오. 소민군주에게는 내가 책임지고 잘 말씀드려 해결하리다. 만에 하나, 녹선생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 생긴다면, 이 고두타와 멸절 비구니 일가족 모두 세세대대로 남자는 도적놈이 될 것이요 계집은 갈보가 될 것이고, 제명에 죽지도 못할 것이며 죽어서도 지옥에 떨어져 영세토록 환생하지 못할 것이오!" - P105
조민은 챙이 널따란 바람막이 모자를 끌어당겨 고운 머리카락을 덮어씌우더니 비밀얘기라도 하듯이 소곤소곤 귀띔을 했다. "고대사, 우리 함께 장무기란 놈을 보러 가요." 범요또 한 번 놀랐다. 곁눈질로 흘끗 보았더니, 그녀의 해맑은 눈동자에 꿈꾸듯 일렁거리는 물결이 감돌고 발그레하니 상기된 두뺨에는 애교와 수줍음, 그리고 뜻 모를 희열이 피어올라 있었다. 그표정은 결코 범요 자신의 가슴속을 들여다보고 일부러 던진 말이 아님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 P120
조민이 창밖의 둥그런 보름달에 눈길을 던지면서 불쑥 말을 꺼냈다. "나한테 세 가지 일을 해주겠다고 약속한 말씀, 잊지 않으셨죠?" "물론 잊지 않았소, 낭자가 요청하는 대로 내 힘껏 해내리다." 조민이 고개를 돌려 장무기를 지그시 쏘아보았다. "지금 막 첫 번째 일이 생각났어요. 당신이 날 데리고 도룡도를 찾으러 가줬으면 좋겠어요." 장무기는 그녀가 자기한테 요구하는 세 가지 일이란 게 극도로 해내기 어려운 것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첫 번째 요구사항부터 이처럼 하기 힘든 문제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 P133
"지약아…… 오늘부터 네가 우리 아미파의 장문인이다…… 내가 너한테 부탁한 일들을…… 다 해낼 수 있겠지?" 멸절사태는 모든 제자들이 알아들으라고, 마지막 남은 힘까지 다 끌어내어 당부 말을 남겼다. 주지약이 울먹이며 대답했다. "예, 사부님…… 불초 제자 감히 잊지 않겠습니다!" 다짐을 받아낸 멸절사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그럼 내가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겠구나……" - P184
"중원 육대 문파는 어제까지만 해도 명교를 적대시해왔소. 그러나 장교주께서 지난날의 원혐을 개의치 않고 덕으로 갚아 오히려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주셨소. 오늘 이후로 쌍방 간의 원한은 말끔히 청산해 버립시다. 그리고 이제부터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오랑캐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로 합시다!" - P189
"소민군주 마마, 고두타가 사죄드립니다." 조민은 답례하지 않고 차갑게 쏘아붙였다. "고대사가 정말 이 사람을 기막히게 속였더군요. 당신이 군주라고 부른 내가 얼마나 골탕을 먹었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예요?" - P202
주지약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항변했다. "저는 사부님의 명으로 본파 장문인의 직분을 이어받았으므로, 이 철 반지는 절대로 넘겨드릴 수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사실 장문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부님 앞에 거듭 맹세한 몸이라, 절대로…… 절대로 그 어르신의 당부를 저버리지 못하겠습니다!" - P213
"금화파파더러 방금 뭐라고 했소? 도룡도라니….…?" "폐원에서 저 노파가 하는 말 듣지 못했어요? 멸절사태의 의천검과 겨루기 위해 온 세상을 다 뒤져 어느 옛 친구한테서 보도를 빌렸노라고요. ‘의천검이 세상에 나오지 않으면 누가 감히 예봉을 다투랴?‘ 는 말처럼 의천보검과 예봉을 다툴 수 있는 칼이라면 당연히 도룡도밖에 없죠. - P234
배가 정박하기도 전에 난데없이 그리 높지 않은 산마루턱에서 대갈일성 호통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력과 기운이 철철 흐르는 목소리에 사나우면서도 위엄 있는 기풍이 가득 서렸다. 바로 양부 금모사왕 사손의 목소리였다. 장무기는 놀랍고도 반가웠다. 헤어진 지 벌써 10여 년, 양부의 위풍당당함은 옛날이나 다름없었다. 그 우렁찬 음성을 다시 듣게 되었는데 어찌 기쁘지 않으랴? 그는 사손이 어떻게 아득히 머나먼 북극 빙화도에서 이 남쪽 바다 섬까지 오게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또 금화파파에게 자신의 정체가 간파당할 위험성마저 돌아보지 않고 즉시 급한 걸음걸이로 사다리를 타고 돛대 위로 올라가 방금 목소리가 들려온 산마루턱을 바라보았다. - P246
금화파파의 목소리가 들렸다. 셋져 오라버니, 나는 당신이 남의 도움받는 것을 싫어하시는 걸 알기 때문에 나서지 않았어요. 이런 나를 원망하지는 않겠지요?" 장무기는 의아스러움에 못 이겨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금화파파는 방금 자신의 양부더러 ‘셋째 오라버니‘ 라고 불렀다. 금모사왕 사손의 항렬이 셋째 라니, 금화파파는 양아버지보다 더 나이가 많지 않은가? - P258
사손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소! 한부인, 나는 고아가 된 무기 녀석이 얼마나 외롭게 고생하고 있을까 걱정스러워 그대의 말만 믿고 아득히 머나먼 북극 빙화도를 떠나 중원 땅에 돌아왔소. 그대는 분명히 내게 무기 녀석을 찾아 데려오겠노라고 약속했소.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거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장무기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제야 양부가 온 천하에 원수들이 깔려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위험을 무릅써가며 이 중원 땅에 돌아온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오로지 ‘외톨박이 고아’가 되어버린 수양아들 한 사람만을 위해서 돌아왔던 것이다. - P262
"진우량을 경계하라니? 그 사람은 의리를 중히 여기는 훌륭한 사람이 아니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날 속이려고 하는 말은 아니죠?" 장무기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뜨악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무엇 때문에 당신을 속인단 말이오? 진우량이야말로 정장로를 대신해서 기꺼운 마음으로 죽으려고까지 했으니 보기 드물게 의리깊은 사나이 아니오?" 조민의 까만 눈동자가 또렷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리쉬었다. "장공자님,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한심하군요. 그 흉악하고 난폭하고 고집스런 영웅호걸들을 거느리고 명교 안팎의 대소사를 도모하시는 교주란 분이 그렇듯 쉽사리 남의 속임수에 넘어가다니, 도대체 어쩌려고 그러는 거예요?"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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