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신화여행 - 신화, 아주 오래된 이야기
김헌선 외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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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신화

나에게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익숙한 신화는 그리스 신화이다. 로마신화는 그리스신화에 부속품처럼 딸려서 약간의 변용이 이루어 졌을 뿐, 단독으로 출판이 되는 경우도 드물다. 거의 독보적인 인지도를 가진 그리스 신화의 뒤를 잇는 건,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북구 유럽의 신화이다. 특히, 너무 흔해서 흥미가 떨어지는 그리스 신화에 비해 조금은 생경하면서도 서사구조가 탄탄한 유럽의 신화는 최근 많은 서브컬쳐 장르의 소재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리스와 북구 유럽의 신화가 1,2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세상에는 나라의 수보다 더 많은, 민족의 수만큼 많은 신화가 존재한다. 우리나라도 신화가 있지만 안타깝게도 단편적으로 흩어져서 통일된 서사구조가 부족하기 때문에 myth라고는 해도 mythology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그리스·로마신화를 가장 먼저 읽어 보고 이후 북구 유럽 신화, 한국의 신화도 꽤 읽어 봤다. 그외에도 중국, 인도, 남미, 아프리카 신화 등으로 차츰 읽는 범위를 넓혀 갔는데, 신화 중에서도 가장 흥미진진한 신화는 수메르신화로부터 시작하는 고대 중동의 신화였다. 특히 어릴 때 교회를 열심히 다녔는데, 처음 수메르 신화를 읽으면서 받은 충격은 이루 말을 할 수가 없다. 창세기에 나오는 홍수신화의 원형도 그 전에 이미 있었던 것이었고, 이사야가 물리쳤던 바알과 아세라 신들이 사실은 중동에서는 굉장히 긍정적인 신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중동신화여행》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경에 큰 영향을 끼쳤던 고대 중동의 신화에 대해서 설명하는 책이다.

원통형의 인장을 굴려서 점토판에 찍은 엔키(오른쪽에서 두번째)의 모습. 엔키는 수메르 신화의 최고신인 안의 둘째 아들로 실제적인 최고신인 엔릴의 동생이다. 대홍수에서 인류가 생존할 수 있도록 도와준 신으로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의 포지션과 비슷하다.


강연을 옮겨놓은 책

《중동신화여행》은 2017년 10월에서 12월 사이에 경기문화재단 문예진흥원에서 주관한 '신화와 예술 맥놀이 - 중동신화여행'에서 강연한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그래서 저자가 일곱 명이고 책의 내용도 강의체로 되어 있다. 중간에 간혹 현장에 없었던 사람은 느끼지 못할 내용이 나오기도 하는데 크게 신경쓰일 정도는 아니다. 나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 형식의 책을 좋아하는 편인데, 주제의 핵심을 짚어내면서도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최대한 쉽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이 책도 그렇다.

 

길가메시 부조. 길가메시는 수메르 신화에서 처음 나타나 바빌론 신화에까지 등장한다. 친구인 엔키두가 죽은 후 불사가 되기 위해 여행을 해서 거의 성공했지만 마지막에 잠깐의 실수로 불사의 기회를 놓쳤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최초의 영웅이다.


중동신화의 핵심에 대한 자세한 설명

일곱 명의 강연자는 처음에 기조 강연을 통해 신화를 보는 방법에 대해 설명을 한 후 각자가 전문적으로 연구했던 중동신화에 대해서 강연한다. 그러니까 책은 모두 8장으로 되어 있고, 각 장은 하나의 독립적인 강연 내용이다. 각 강연은 이집트의 오시리스 신화, 수메르의 엔키 신화, 메소포타미아의 이난나 신화, 길가메시 이야기, 에누마 엘리쉬와 쿠쉬나메까지 제목을 봐도 알 수 있듯이 한 신화 전체를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각 신화의 중요한 신(또는 인물)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길어야 2~3시간 정도 되었을 시간에 신화 전체를 다룰 수는 없었을 테니 집중적으로 한 명의 신을 다루는 것은 당연하다.


각 장은 신화의 내용을 간단히 설명한 후에 집중적으로 개별 신에 대해서 안내하는데 해당 신화에서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신화를 설명하기 때문에 신화의 대체적인 흐름을 이해하면서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특히 몇 번 읽어 봐서 익숙했던 수메르나 이집트의 신화보다는 익숙하지 않았던 쿠쉬나메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대한 6, 7장의 내용이 나에게는 관심이 더 많이 갔다.

 

이난나. 아카드어로는 이슈타르. 릴리스라고도 하고 금성을 상징한다. 판본에 따라 다른 여러가지 이유로 저승을 다녀 온 것으로 유명하다.


쉽게 접하기 힘든 중동신화, 이 책 한 권이면 충분할 수도..

고대중동신화는 접하기 쉽지 않다. 내가 처음 수메르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을 때는 적당한 책이 없어서 백과사전을 뒤적이면서 서사가 아닌 사전적으로 신들을 기억했었다. 지금은 그때와는 많이 달라져서 인기있는 그리스나 켈트 신화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꽤 많은 책들이 나와 있고, 원서를 바로 번역해 놓은 좋은 책들도 있다. 그리고 개별 신화를 넘어서 서사구조를 가진 신화는 내용이 꽤 많아서 기억하기도 쉽지 않다. 이 책 한권으로 중동신화를 모두 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 정도면 상식선에서 충분할 것 같다. 물론 이 책을 읽고 중동신화에 관심이 많이 생긴다면 더 많은 책을 찾아 보고 보충을 하면 될 것이다.

 

오시리스. 이집트 신화에 등장하는 죽은 자와 부활의 신이다. 아내는 이시스. 동생인 세트가 살해하여 몸을 산산조각을 냈으나 아내인 이시스가 조각을 찾아 몸을 다시 맞추어 부활했다. 단, 성기만은 찾지 못해서 진흙으로 빚어서 붙였다고 한다. 오시리스의 피부는 녹색이고 한 손에는 권력을 상징하는 홀을 들고 또 한 손에는 생산을 상징하는 도리깨를 들고 있다.


★★★★☆

꽤 많은 신화에 관한 책을 읽어 봤는데 《중동신화여행》은 그 중에서도 쉬우면서도 핵심을 잘 소개하는 책이다. 그리고 중동신화 전체를 조망해서 설명한 점에서 중동신화 입문용으로 굉장히 좋은 책이다. 이 책을 읽다가 혹시나 해서 찾아 보니 같은 시리즈로 되어 있는 신화에 관한 책들이 몇 권이 더 있다. 아마도 조만간 구매해서 읽어 보게 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책 속에 실려 있는 그림이 좀 컸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은 좀 남는다.

신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 볼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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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콘롤 2021-03-05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알과 아세라를 물리쳤던 유대 (정확히는 북 이스라엘) 선지자는 이사야가 아니고
엘리야입니다.

한담 2021-03-05 18:3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잘못 써 놓았네요. ^^

로콘롤 2021-07-16 0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마 전에 이 책을 사서 완독했습니다.

다만 수메르 신화가 성경 창세기의 원형처럼 보이는건
이스라엘 성경의 성문화가 수메르보다 늦었던거죠.

시장에 상품 하나가 출시되었다고 봅시다.

중국산 짝퉁이 재빠르게 시장을 장악합니다.

소비자들은 짝퉁이 오리지널인 줄 압니다.
 
지도에서 사라진 종교들 - 잊혀지는 신앙과 사라진 신들의 역사 지도에서 사라진 시리즈
도현신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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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신화와 종교

역사에 관심이 많다. 워낙 기억력이 나빠서 읽은 책들의 내용은 며칠 지나면 새까맣게 잊기 마련이고, 심지어는 바로 몇 페이지 전에 읽은 것도 기억 못할 때가 많다. 기억하고 싶은 것은 많고 기억력은 나쁘니 어떻게든 기억을 대체하기 위해서 최대한 읽은 것들을 정리해 놓으려고 애썼던 적도 있었고, 지금도 가장 좋은 방법을 찾고 있다.


역사에 대해서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신화 덕분이다. 신화를 읽다가 실제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고대사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겼다. 신화와 역사에 관심이 많으니 당연히 종교에도 흥미가 생기고 결국 점성술, 기호, 상징 등 관심 분야가 점점 넓어졌다. 이건 내 얘기다. 내 얘기를 처음에 자세히 쓰는 이유는 아마도 이 책의 저자가 나와 비슷한 단계를 거친 것 같기 때문이다.


《지도에서 사라진 종교들》은 내가 관심이 깊은 역사와 종교에 대해서 잘 정리해 놓은 책이다. 제목만 봐도 끌리지 않을 수 없다.

 


저승에서 죽은 아내인 에우리디케를 지옥에서 데리고 나오는 오르페우스. 천신만고 끝에 지옥에서 아내를 데리고 나가는 것을 허락받은 오르페우스는 뒤를 돌아 보면 안된다는 하데스의 명을 어기고 뒤를 돌아 봐서 결국 아내를 데리고 이승으로 나오는데는 실패한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단순한 등장인물 중에 한 명이지만 그를 경배하는 오르페우스 종교가 책 속에 소개되어 있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종교 이야기

책 제목부터 굉장히 흥미를 끈다. 뭔가 신비한 기운이 책을 감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와 불교가 그나마 익숙하고 이슬람만 해도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그것보다 더 익숙하지 않은 '사라진 종교들'에 대해서 다룬다고 하니 굉장히 기대가 많이 됐다.


책은 모두 3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장은 인류 초기의 종교들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첫 장에서 설명하는 종교는 대체로 고대 근동의 종교들로서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종교인 아브라함 계열의 종교인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와 연관성이 있는 것을 보여 준다. 조로아스터 교에서 갈라져 나온 미트라교에 관한 설명도 나오는데, 미트라는 알고 있었지만 미트라가 미륵불의 원형이라는 건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첫 장은 문명의 기원과 관련있는 종교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익숙한 종교가 꽤 많다. 반면에 한때 번성했지만 다른 종교와 세력 싸움에서 패배해서 사라진 종교들을 다룬 둘째 장과 다른 종교들과는 많이 다른 교리를 지녀서 독특한 느낌이 있는 종교들을 다룬 세번째 장에 나온 종교들은 좀 생경하다. 이 책을 집은 이유는 바로 2, 3장을 읽기 위해서였고,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미트라. 슬픈 얼굴을 하고 황소를 죽이는 모습이 대표적인 이미지이다. 황소는 고대 이란의 종교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조로아스터교에서는 땅에 '식물'과 '황소'와 '사람'을 만들어서 식물은 으깨고 황소와 사람은 죽이는데 식물에서는 모든 꽃과 농작물, 나무가 싹트고 사람에게서는 당연히 모든 사람이 나타나고, 황소에서는 모든 동물들이 튀어나왔다고 한다. 즉, 모든 동물의 대표가 황소이다. 미트라가 황소를 죽이는 것도 신의 명령을 받은 것인데 미트라교 신화에 의하면 황소가 죽은 후에 황소는 달로 변하고 미트라의 외투는 하늘로 변했으며 황소의 꼬리와 피에서는 곡물과 포도가, 황소의 생식기에서는 생명의 씨가 나타나 그것들이 섞여서 모든 생물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미트라가 미륵불의 원형이라고 설명한다.


지은이는 분명히 역덕이다.

지은이인 '도현신'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 그런데 앞표지 날개의 저자 소개에서 '어릴 때부터 역사책을 좋아해 역사를 바탕으로 한 책을 쓰겠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다가...'가 눈에 띈다. 졸업한 학교에 과가 명시되지 않은 걸 보니, 아마도 역사를 전공한 건 아닐 것 같다. 추정해 보면 흔히 생각하는 역사 덕후가 분명해 보인다. 더불어서 서브컬쳐에 굉장히 관심이 많은 것도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이 책은 서브컬쳐를 좋아하는 역덕이 좋아할 만한 책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다른 책(예를 들면, 판타지 소설 같은...)을 쓰기 위한 자료를 모으다가 내용이 쓸모있는 자료가 많아서 책을 낸 것이 아닌가 싶다.


《지도에서 사라진 종교들》은 이런 지은이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우선 굉장히 접하기 힘든 소재들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종교에 꽤 관심이 있는 나도 처음 들어 보는 종교, 신화에 대한 내용들이 상당히 흥미를 끌었다. 역사적인 배경을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적는 것도 특징인데, 특히 앵글로-색슨 족의 고대 신앙을 설명하는 장에서는 종교보다 역사에 대한 내용이 훨씬 많다. 종교를 설명하는데 역사가 따라오지 않을 수는 없지만 좀 과하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다. 무엇보다 책이 '재미있다'. 책의 제목과 소제목만 봐도 흥미가 생기고, 내용도 흔히 접하기 힘든 내용이라 읽으면서 책 속에 쭉 빨려 들어간다. 주변에서 책 좀 읽는 사람들 역시 책 제목만으로도 흥미있어 했다.


책이 좀 단정적이고 크로스체크가 제대로 되었을까 하는 의문은 좀 든다.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역사를 좋아하면서도 본격적으로 역사에 대한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읽은 몇 권의 책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책을 아무리 많이 읽었어도 지식을 쌓는 것과 그 지식 이면에 흐르는 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다른 문제인 경우를 많이 봤다. 꼭 저자가 그럴 것이라는 건 아닌데, 책 속에 자주 등장하는 단정적인 표현이 눈에 좀 거슬리고 좀 더 자료를 찾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망치를 이용해서 링을 제거하고 있는 드루이드교 사제.


★★★★

신화와 종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분명히 좋아할 책이다. 흥미진진한 소재를 풀어냈고, 풍부한 역사지식으로 주변 이야기도 쉽게 풀어냈다. 굉장히 지엽적인 종교를 많이 다루었기 때문에 다른 책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 많다. 두고두고 생각날 때마다 읽어 보려고 한다. 단지, 정리하면서 씌여진 이런 종류의 책이  가지는 한계 역시 뚜렷하다.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런 면에서 좀 아쉽다. 이 책의 안내를 받아 더 많은 내용을 알기 위한 길잡이 책으로서 훌륭하지만 워낙 특이한 소재를 책으로 썼기 때문에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불안하다. 책 마지막에 씌여 있는 참고도서를 관심있게 본 이유이다.


글이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서 이 책을 추천하는 부담감이 많이 줄어든다. 저자의 다른 책을 살펴 보니 《지도에서 사라진 사람들》이라는 사라진 민족에 대한 책이 있다. 역시 굉장히 흥미로와 보이는 책이다. 아마도 조만간 사서 볼 것 같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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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이 필요한 순간 - 인간은 얼마나 깊게 생각할 수 있는가
김민형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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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있다. 알수는 없다. 나에겐 그게 수학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연필을 들고 수학문제를 풀 기회는 전혀 없다. 간혹 간단한 계산을 할 때는 있지만, 그건 '산수'다. 한때는 공책 바닥을 채우며 수학문제 푸는 것을 꽤 좋아했지만 대학교에 다니면서는 인문계열 전공이기 때문에 그럴 기회가 전혀 없었다. 사회에 나와서는 더더군다나 그렇다. 근의 공식 정도는 여전히 외우고 있고, 피타고라스 정리는 증명할 수 있지만 그게 끝이다.


가끔 서점에서 수학에 관한 책을 들춰 보고 사기도 한다. 앤드류 와일즈가 증명했다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나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은 '골드바흐의 추측'같이 이해하기 쉽고 간단해 보이(지만 절대로 풀 수 없)는 문제는 '혹시 내가?'라는 상상을 해 보기도 한다. 밀레니엄 7대 난제같은 이해하기조차 불가능한 문제는 그냥 멍하니 쳐다볼 수 밖에 없다. (7문제 중 푸앵카레 추측은 페렐만이 증명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 와중에 놀랍게도 리만 가설이 증명됐다는 뉴스가 떴다.) 수식이 참 예쁘고 멋있어 보이지만 이해할 수는 없다. 수학 속에는 뭔가 있을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문제를 하나 핵결하면 거만하게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볼 만하다. 나에게는 그게 수학이다.

 


저자 김민형 1963 ~ . 옥스포드 대학교 교수. 굉장히 동안이다.


언제 우리에게 수학이 필요하지?

《수학이 필요한 순간》은 수학자가 쓴 책이다. 분명히 이 책은 수학에 관한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수학의 이론을 비전공자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수학교양서는 아니다. (사실 나는 그런 책을 기대했다.) 머릿말에서부터 '양자 역학'에 대한 얘기가 살짝 나와서 긴장과 함께 또다른 기대감을 갖게 하더니, 처음에는 이 책이 물리학 입문서인가 싶을 정도로 과학의 역사를 다룬다. 여기까지는 아직 이 책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이후 책은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간단한 확률에 대해 설명한 후에 윤리의 문제를 다루고, 인공지능의 선택에 대한 기준에 대해서 고민한다. 또 다음장에서는 투표를 할 때, 어떤 후보가 선출되는 것이 민의를 제대로 담아내는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한다. 당연히 정답을 내기 힘든 문제이다. 이때쯤 되서야 《수학이 필요한 순간》은 정체를 드러냈다. 이 책은 수학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수학적인 사고방식으로 틀을 만들어 해석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렇게 보면 39페이지에서 저자가 수학의 정의를 '추상적인 개념적 도구를 사용해 세상을 체계적으로 또, 정밀하게 설명하려는 의도가 바로 수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한 것이 이해된다. 저자는 수학을 통해서 세상을 체계적이고 정밀하게 설명하는 다양한 실례를 이 책에서 보여준다.

 


수학포기자. 줄여서 수포자라고 한다. 학문으로서 수학은 사회생활에서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학적 사고방식은 학업을 마친 후에도 필요하다.


추상성의 끝에서 현실과 관계를 맺는 수학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숫자와 증명, 그래프가 난무하는 수학에 대해서 다루고 있지 않다. 대신에 이전에 수학에 관한 책을 읽을 때 별도의 칸에 '읽을거리'로 올라와 있을 법한 짧은 수학상식을 전문적으로 설명해 놓은 느낌이다. 처음에는 일상이나 학문에서 생길 수 있는 의문점에서 출발해서 의문을 해결하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수학적인 사고를 하게 되고, 문제를 풀지는 못하더라도 풀 수 있는 방법은 생각하도록 안내를 한다. 이 과정에서 케네스 애로우의 '불가능성 정리', 트롤리 문제, 게일-섀플리 알고리즘처럼 일반인은 잘 모르지만 제법 유명한 문제들이 제시된다.


분야도 다양해서, 수학과 가장 가까운 학문인 물리학으로부터 윤리학, 우주론까지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저자가 생각하는 '수학이 필요한 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논리적인 사고방식이 필요한 모든 학문을 넘어서서 우리의 삶 전체에 수학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꼭 '수학'이 아니라 '수학적인 사고방식'이라면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천재 수학자의 뇌와 일반인은 뇌는 다를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다른 사람은 접근하지 못한 추상성의 끝을 연구하는 수학자들이 부럽다.


정말 쉽게 읽을 수 있을까?

띠지에 보면 '문과생들도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수학책'이라고 씌여 있다. 정말 그럴까? 만만치 않을 것 같다. 판형이 작고 글자도 많지 않고, 그림이나 도표도 중간중간 삽입되어 있어서 양은 많지 않다. 나이에 비해서 앳되 보이는 친절한 저자의 모습을 보면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수학적인 사고방식에 훈련이 되지 않은 사람은 내용을 따라가기 만만치 않을 것 같다. 특히 위상기하학을 설명한 6강(위상기하학을 다루는 이 장에서 푸앵카레 추측이 들어갔으면 좋았을 것 같다.)과 코딩과 암호를 다룬 특강(RSA 암호체계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이 아쉽다)은 뇌 속의 논리 근육이 발달하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까다로울 것 같다. 하지만 꼭 그 과정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내용을 전개해 가는 과정만 지켜보더라도 충분히 읽어 볼만한 책이다.


이 책은 수학에 관심이 있지만 계산하는 건 익숙하지 않은 문과생에게 추천할만한 책이다. 어려운 부분이 나오면 슥 넘기고 읽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계산해서 먹고 사람이 아니기도 하고 정말 어려운 수학문제들은 천재들도 모른다. 천재들이 이해못하는 건 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아는 건 천재들도 알고 있을테니까, 어차피 그게 그거지 뭐.

 


수학사상 최고의 천재로 유명한 가우스. Johann Carl Friedrich Gauß.


 

★★★★☆

너무 어려워지는 걸 경계해서 그랬는지 각 단원이 설명을 하다가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좀 아쉽다. 책의 의도가 그렇지 않았으니 내가 기대한 것을 채우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어차피 다른 책들을 읽으면서 보충을 해야 할 것이고, 그런 기대를 책 한 권에서 모두 채울 수는 없는 거니까. 내 기대와는 상관없이 이 책은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일반인이 읽어도 좋고 좀 모리좋은 중학생 이상 학생도 읽으면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비슷한 이 책과 비슷한 구상으로 훨씬 더 깊이 들어간 책이 후속으로 나왔으면 좋겠다. 물론 그러면 책 판매량은 훨씬 떨어지겠지만...


마지막으로.. 항상 책을 읽을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지만 대화식으로 쓴 책이라고 해서 쉬운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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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선언
윈턴 마설리스.제프리 C. 워드 지음, 황덕호 옮김 / 포노(PHONO)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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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그 누구도 재즈가 무엇인지 모른다. 정말이다. 우리는 재즈에 관해 뭔가를 아는 것에서 이미 멀어졌다. 여러 해 동안 재즈를 연주하고 그 음악에 대해 토론하면서 재즈란 실재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재즈를 가르칠 수 없다.
p. 191


원제 : Moving to Higher Ground. 2008년.


만만치 않은 재즈

어릴 때부터 음악이라면 거의 닥치는대로 들은 편이지만 재즈는 항상 내 관심 밖에 있었던 음악이었다. 재즈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지가 굉장히 좋지 않았다. 재즈라고 하면 담배 자욱한 카페에서 약에 취한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연주자가 위스키스트레이트 잔을 앞에 둔 관객 앞에서 트럼펫이나 색소폰 음악을 끈적끈적한 눈이 풀린채 연주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연주가 끝날 즈음 카페의 어느 곳에서 주먹질을 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있으면 금상첨화. 좋은 느낌을 가질 수 없었던 음악이다.


좀 뜬금없는 이유로 재즈를 듣기 시작한 것은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한참 후의 일이다. 처음 재즈를 듣기 시작할 때, 뭘 들어야 할지 몰라서 헤맸는데, 그때 읽고서 재즈 입문에 큰 도움을 받았던 책이 이 책을 번역한 황덕호 평론가가 쓴 《당신의 첫 번째 재즈음반 12장》과 《당신의 두 번째 재즈음반 12장》이다. 이후 좀 무리해서 재즈음반을 많이 사모으면서 듣기 시작했고, 지금은 꽤 많은 음반을 모아서 자주 듣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재즈를 잘 모른다.


내가 재즈를 들을 때 가장 어려운 점은...
1. 연주자도 너무 많고, 곡도 너무 많다. 꼭 들어 봐야 한다고 하는 명반이라고 하는 음반만 해도 수천 장은 될 것 같아서 목록을 만들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이건 어느 음악장르라고 해도 마찬가지이지만 재즈가 그렇게 범위가 넓을 줄은 몰랐다.
2. 도대체 몇 번을 들어도 곡을 구별할 수가 없다. 너무 많이, 마구잡이로 들어서 그런지 재즈를 들으면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주제 부분이 명확한 몇 곡은 기억을 하지만 거의 들을 때 뿐이다.
3. 재즈는 현장에서 듣는 것이 가장 좋은데, 막상 재즈 클럽에 가서 들을만한 시간적 여유가 너무 없다. 음반으로 듣는 재즈는 반쪽만 듣는 것 같아서 아쉬움이 느껴진다.
4. 가장 결정적으로 도대체 어디까지가 재즈인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스윙이 있어야 하는지, 도대체 정확한 스윙의 정체는 뭔지, 재즈에는 반드시 즉흥연주가 있어야 하는지, 난해한 곡들은 도대체 듣고 뭘 느끼라는 건지.. 정리가 안된다.


재즈는 여전히 나에게는 미지의 영역처럼 느껴진다.

 


윈턴 마설리스. 1961 ~ . 뉴올리언즈 출생. 트럼펫 연주자.

 


최전선의 연주자가 쓴 재즈에 관한 책

《재즈 선언》의 저자는 윈턴 마설리스이다. 재즈 연주자로서 마설리스의 경력은 정말 화려하다 못해 눈이 부실 지경이다. 1961년생인 마설리스는 재즈의 고향이라고 불리는 뉴올리언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재즈 연주에 심취했고, 19세 때부터는 아트 블래키 Art Blakey가 이끈 전설적인 재즈밴드인 재즈 메신저스에서 트럼펫을 연주했다. 일생동안 무려 8회의 그래미 상을 수상했고, 1984년에는 재즈 뿐만 아니라 클래식까지, 한 해에 서로 다른 두 장르에서 수상을 하기도 했다. 이후 링컨센터의 재즈 총괄 프로그래머직을 수행할 정도로 영향력 또한 막강했다. 실력·운·지위·영향력 할 것 없이 20세기 재즈의 마지막 20년과 21세기 초반의 재즈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그동안 많지는 않아도 몇 권의 재즈관련 책을 읽어 봤는데, 대부분 평론가가 쓴 책이었다. 평론가의 글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딱딱한 역사와 이론 중심의 책이 되게 마련이다. 《재즈 선언》은 그런 면에서 좀 다르다. 책 속에 자신의 연주 경험이 녹아 들어 있어서 생생함을 느낄 수 있다. 음반으로만 듣던 재즈 거장들의 일화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도 있다. 현장의 연주자가 쓴 책의 장점이다.

 


재즈는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어려운 음악이다.


재즈 이해의 어려움

재즈에 대한 책 또는 이론서를 여러 번 읽어 봐도 여전히 재즈는 어렵다. 나에게 재즈가 어려운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도대체 재즈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모르겠다는 거다. 초기 재즈부터 현대의 프리재즈까지 들어 봤지만 사실 공통점이 뭔지 잘 모르겠다. 초기 뉴올리언즈에서 연주하는 스타일의 곡들을 재즈라고 하고 이후에 나온 밥 스타일의 곡들은 재즈가 아닌 다른 장르라고 하는 극단적인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미국스타일과는 달리 유럽의 재즈 스타일은 또 달라서 곡들의 공통점을 알 수가 없다. 재즈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를 즉흥성과 스윙이라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즉흥성이 없는 재즈도 있고, 스윙도 또 모르겠다. 여기서 두번째 어려운 점이 생긴다.


대충 스윙이 어떤 느낌인지는 알겠는데, 정확하게 스윙이 느껴지는 이유 또한 모르겠다. '스윙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니 '네가 스윙이 뭐냐고 물어 보는 것 자체가 스윙이 뭔지 모르는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굉장히 선문답같은 얘기도 들어 본 적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초기에 재즈를 했던 사람들이 학력이 낮아서 자신들이 연주하는 음악의 본질에 대해서 느낄 수만 있을 뿐이지 정확한 설명을 할 능력이 없었다고 하기도 한다. 그래서 재즈에 대한 책을 읽어보면 대체로 재즈의 역사와 유명한 연주자들을 안내하는 것으로 내용을 채우는 경우가 많다.

 


루이 암스트롱 Rouis Armstrong. 1901 ~ 1971. 재즈의 아버지. 그의 별명 중 하나가 Pops. 즉 대중문화 그 자체였다.


이론과 실전을 겸비한 저자가 쓴 재즈 안내서

이런 면에서 현직 재즈 연주자이면서 클래식에도 조예가 깊은 윈턴 마설리스가 쓴 《재즈 선언》은 다른 재즈이론서와는 분명히 다른 위치를 차지하는 것 같다. 책의 2장에서는 솔로 solo, 콜 앤드 리스폰스 call and response, 스캣 싱잉 scat singing 등 재즈를 들을 때 알고 있으면 큰 도움이 되는 세부적인 형식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처음 재즈를 듣는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없지만 일부러 찾아 보지 않으면(사실, 2장에 나오는 용어들 대부분이 내가 처음 재즈를 들을 때는 있는지도 모르는 용어들이다) 알 수 없는 것들이다. 특히, 모든 용어를 설명할 때 음악을 예로 들었기 때문에 음악을 찾아 들으면서 함께 책을 읽으니 재즈의 형식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전에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들을 정리하는 의미도 있고...


2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설명한 '스윙'과 3장에서 설명한 '블루스' 형식에 대해서 설명한 부분은 재즈를 듣다 보면 굉장히 많이 접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잘 읽어 두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스윙에 대해서 박자표까지 그려가며 설명한 것도 흥미롭다. 스윙하면 그냥 느끼는대로 표현하는 것 정도로 퉁치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블루스에 대해서는... 윈턴 마설리스는 블루스 숭배자이다. 물론 스윙은 마설리스가 설명했듯이 딱 선을 그어서 설명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난 평론가가 아니니까 그냥 책 속에서 설명하는 정도만 이해를 하고 있어도 충분하다.

 


존 콜트레인. John Coltrane 1926 ~ 1967 재즈 색소폰 연주자.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재즈 연주자이다.


★★★★☆

마지막에는 <대가들이 주는 교훈>이라는 소제목으로 유명 연주자와 추천음반을 소개해 놓았다. 굉장히 매니악한 연주자는 별로 없고 정말로 대표적인 연주자들과 그들의 대표음반을 소개해 놓았으니 입문용으로 골라서 듣기에 적당해 보인다. 하지만 매니악한 앨범을 소개한 것도 아닌데 나에게 없는 앨범이 꽤 된다. 시간내서 천천히 또 모아서 들어 봐야겠다. 역시 존 콜트레인과 마일즈 데이비스에 대한 설명이 가장 길다. 책을 끝까지 읽으면, 대략 재즈의 역사와 형식, 대표적인 음반에다 윈턴 마설리스가 직접 경험했던 유명 연주자들과의 에피소드까지 덤으로 읽을 수 있다.


번역을 한 황덕호는 우리나라에서 1,2위를 다툴 정도로 활동이 활발한 재즈평론가이기 때문에 재즈에 대한 이해도가 깊고, 그동안 재즈관련 번역작업도 많이 해 왔다. 그래서 번역서이면서도 무리없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재즈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관심갖고 읽어 보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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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나케아의 어떤 밤 - 밤의 시작과 끝, 우주 속 나와 세상에 대한 사유
트린 주안 투안 지음, 이재형 옮김, 이영웅 감수 / 파우제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밤의 시작과 끝, 우주 속 나와 세상에 대한 사유

 

표지에 낚이다

 

어릴 때부터 별 보는 것을 좋아했다. 처음 별을 본 것은 그리스 신화 때문이었다. 그리스 신화를 읽다 보면 많은 영웅들과 동물들, 사물까지도 하늘의 별자리가 되었다. 가장 찾기도 쉽고 사연도 절절한 것은 큰곰자리와 작은곰자리, 큰 곰자리 반대편에 있는 카시오페이아, 오리온자리 등, 나에게 밤하늘의 별은 신화에서 읽은 주인공들을 상상할 수 있는 그림책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아무리 별을 바라보고 있어도 동물 모양도 보이지 않고, 사람 모양도 보이지 않아서 실망하기도 했다. 불빛이 없어서 별이 잘 보이는 시골에 갈 때면, 플래쉬에 빨간 셀로판 테이프를 붙여서 별자리 표와 하늘을 비교해 가면서 별을 기억하기도 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별자리에 대한 관심은 계속되었기 때문에 집에 여러가지 별과 천문에 관한 책들이 있다. 꽤 많이 산 편이다. 책이란게 그렇듯이 가지고 있는 책들도 아직 다 읽지 못했다. 그러니까 어지간해서는 이제 천문에 관한 책을 살 이유가 별로 없다. 그런데 《마우나케아의 어떤 밤》을 보고는 바로 낚였다. 지구상에서 천문을 관측하기 가장 좋은 곳이라고 알려져 있는 마우나케아 산,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떨리는데, 표지마저도 예쁘다. 《마우나케아의 어떤 밤》은 저자도, 내용도, 아무 것도 모른채 표지만 보고 구매해서 읽은 책이다.

 

트린 주안 투안. 1948 ~ 베트남 출신의 천문학자


하룻밤 동안 살펴본 하늘

밤하늘을 관찰하는 것은 만만하지 않다. 우선 내가 살고 있는 서울은 한밤중이라고 하더라도 불빛이 없을 때가 없기 때문에 별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기껏해야 유명하고 빛이 강한 1,2등성 정도만 볼 수 있다. 시골에 가도 마찬가지이다. 도시보다야 낫겠지만 습도가 높은 날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깨끗한 하늘을 보기가 참 힘들다. 하늘을 관찰하는 것이 직업인 천문학자들은 최대한 깨끗한 하늘을 관찰해야 한다. 그래서 관찰하기 좋은 곳에 큰 천문대를 만들어 놓고 별을 관찰한다. 아타카마 사막이 대표적으로 하늘을 관찰하기 좋은 곳이다. 예전에 여행한 적이 있는 몽골의 초원도 쏟아지는 별이 멋있었다. 물론 별을 관찰하기 제일 좋은 곳은 지구 밖이다. 허블망원경이 수십년간 지구궤도에서 그 역할을 하다가 거의 생명이 다해가고 있다.


마우나케아 Mauna Kea 산은 하와이에 가장 높은 산이다. 아마도 공기 중에 습도도 굉장히 적을 것이다. 그 정상에는 여러 나라에서 천문대를 만들어 놓았다. 저자인 트린 주안 투안은 6개월의 기다림 끝에 나사로부터 사흘동안 '청색 밀집 왜소은하'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을 허락받고 마우나케아 산을 찾았다. '청색 밀집 왜소은하'가 뭔지는 나도 모른다. 저자의 연구과제이지만 이 책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마우나케아의 어떤 밤》은 트린 주안 투안 교수가 하룻밤 동안 하늘을 관찰하며 느낀 감정과 천문학에 대한 이론을 설명한 책이다.

 

은하수. 어릴 때는 간혹 볼 수 있었고, 지금도 시골에 가면 볼 수 있지만 도시에서는 거의 보기 힘들다.


감성 넘치는 천문학 인문서


그동안 천문학 책을 꽤 많이 봤지만 이런 책은 처음이다. 우선 그림이 정말 예쁘다. 애초에 책표지에 낚여서 충동적으로 책을 구매했는데 책 속의 천문 사진들도 정말 멋지다. 천문학 책이 천문사진이 가득한 것이야 당연하니 이건 그렇게 특별할 것은 없다고 해도 표지 이상으로 멋진 사진들이 책 속에 가득한 것은 흐뭇하다. 좋은 사진을 위해서 종이질도 굉장히 두껍고 좋은 종이를 사용했다. 그래서 페이지 수에 비해서 책이 두껍고 무거운 편이긴 하다.


책은 마우나케아 산에 도착해서 하늘을 관찰할 준비를 하고, 밤새 하늘을 보는 시간순으로 적혀 있다. 시간이 갈수록 저자의  생각은  가장 가까운 천체로부터 우주로 내달린다. 지구와 달, 태양계를 보던 저자의 눈은 점점 멀리 눈을 돌려서 마지막에는 우주에 숨어 있는 암흑에너지와 우주의 기원까지 생각을 넓혀 나간다. 책 전체를 통틀어 시간의 흐름과 우주의 거리를 교차시키고 있다. 하룻밤의 시간과 우주라는 공간을 큰 줄기로 잡아 놓고는 책의 곳곳에 문학과 예술을 점점이 박아 놓았다. 여기에는 리히텐슈타인의 팝아트 그림을 실어 놓고 저기에는 릴케의 시를 박아 놓는다. 그렇다고 천문학 지식을 설명하는 것에 소홀하지도 않다.


그러니까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천문학이라는 주제를 잡아 놓고 그 안에 저자가 가지고 있는 온갖 인문학적 지식과 자신이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하룻밤 관찰하면서 느낀 감성을 모조리 잡아서 박아 놓았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이 책이 천문학에 관한 책이라는 느낌보다는 에세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동안 봐왔던 천문학 책은 그냥 과학책이었다. 있는 사실을 그대로 알려 주는 책이었다. 굉장히 딱딱했다. 하지만 이 책은 많이 다르다. 보고 익힐 것도 있지만 느낄 것도 가득 차 있다.

 

안드로메다 은하. 많은 지구인들이 개념을 날려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어릴 적 꿈을 되새김

 

내가 처음 별을 관심있게 보기 시작한 것이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릴 적 하늘을 더듬으며, 북두칠성을 찾고 오리온자리를 찾았던 기억을 되새긴다. 아기곰을 만나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어미곰을 생각한다. 정말 오랜만에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설레였다. 은하수를 보고 하늘을 보면서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지어내던 어릴 적 모습이 떠올랐다. 그림책에서 본 것처럼 실에 매달려 있는 별을 상상했던 어린 시절을 기억한다. 어른이 되면 당연히 우주여행을 하고 있을 거라고, 달에 가면 절대로 우주복을 벗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던 어린 시절의 꿈이 떠오른다. 책을 보면서 참 많은 감정이 떠올랐다.

 

눈쌓인 마우나케아 산 정상과 천문대. 가 볼일은 없겠지.


★★★★☆

 

어려운 책이 아니다. 사실 천문학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곳곳에 나오는 설명이 좀 어려울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걸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이 책을 읽으면 밤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이다. 서울의 불빛이 너무 환하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한 번쯤은 하와이행 비행기를 타고 마우나케아 산의 정상에 있는 천문대에서 별을 보고 있는 자신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정신없이 사느라 어릴 때 별을 보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기억을 잊은 사람에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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