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모가 깔깔대고 웃었다.
"몽랑, 초초해할 것 없다. 곧 있으면 네 몽고와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그녀도 널 미친 듯이 그리워하고 있다.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좌불안석으로 너만 생각하며 그리워하고 있어. 솔직히 말해봐라. 그녀가 보고 싶지 않으냐?"
허죽은 그 소녀에게 깊이 빠져 있어 며칠 동안 생사부를 쏘아내고 제거하는 무공 연마에 몰두하는 와중에도 줄곧 그녀 생각으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그런데 동모가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자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보고 싶습니다!" - P93

동모가 말했다.
"넌 소요파 장문인이다. 또한 내가 이미 생사부와 천산절매수, 천산육양장 등 일련의 무공을 모두 전수했으니 오늘부터 넌 표묘봉 영취궁의 주인이야. 영취궁 구천구부 노비들의 생사를 모두 너에게 일임할 것이다."
허죽이 깜짝 놀라다급하게 거절했다.
"사백, 사백! 그건 절대 안 됩니다." - P123

허죽이 그림을 가져오자동모는 그림을 받아들고 햇빛 아래 살펴봤다. 순간 동모는 깜짝 놀라더니 얼굴에 놀라움과 기쁨의 기색을 동시에 드러냈다. 그녀는 다시 한참을 유심히 살펴보고는 돌연 하하거리며 큰 소리로 웃다 소리쳤다. 그녀의 손가락이 부분
"저년이 아니구나. 저년이 아니야. 저년이 아니야! 하하, 하하, 하하!" - P124

"사숙, 예전에 대리 무량산에 살았던 적이 있었나요?"
이추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들어 저 멀리 바라봤다. 마치 과거를 회상하며 넋을 잃은 채 그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과거 나와 네 사부는 대리 무량산 검호 기슭에 있는 석동 안에서 살았다. 신선을 능가할 정도로 아주 자유롭고 즐겁게 말이야. 난 그 사람한테 아주 귀여운 딸아이를 낳아줬어. 우리 두 사람은 천하 각 문파의 무공 비급을 널리 모아 각 문파들의 무공을 망라한 특별한 무공을 창안할 생각이었다. 하루는 그 사람이 산중에서 거대한 미옥을 찾아냈는데 그것으로 내 모습과 똑같이 생긴 인물상을 조각했다. - P129

매검이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주인님께서 너희의 생사부를 제거해주겠다고 응낙하신 건 어르신의 자비심 때문이다. 하지만 너희는 대담하기 짝이 없이 난을 일으켰다. 더구나 동모를 궁에서 끌고 간 탓에 동모가 외부에서 선화를 하시게 됐다. 그럼에도 너희는 또다시 표묘봉을 공격해 우리 균천부의 수많은 자매를 죽였으니 이 빚은 다 어찌 갚을 것이냐?"
군호는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의기소침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195

"단 공자, 만일 공자가 날 무시하지만 않는다면 우리 둘이 먼저 결의형제를 맺도록 합시다. 그리고 훗날 교 대형을 찾아 다시 한번 결의를 맺으면 될 것 아니겠습니까?"
단예가 크게 기뻐했다.
"좋은 생각입니다.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우리 둘이 먼저 교 대형을 포함시켜 결의형제를 맺으면 될 것이오. 형씨는 나이가 어찌 되시오?"
두 사람이 나이를 따져보니 허죽이 단예보다 세 살 더 많았다. 단예가 소리쳤다.
"둘째 형님, 소제의 절을 받으십시오!" - P212

군호가 과거 동모에게 신하의 예를 다하게 된 것은 강제로 굴복당하고 몸에 생사부가 심어지면서 통제를 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새롭게 바뀐 영취궁 주인인 허죽이 자신들을 진심으로 대하고 예로써 존중해주는 데다 각자의 몸에 심어져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기던 생사부마저 제거해주자 오만하고 길들여지지 않은 군호도 그 은덕에 깊이 탄복해 죽음으로 충성을 맹세하며 하나같이 감사의 절을 올리고 각자의 근거지로 돌아갔다. - P228

현생이 큰 소리로 물었다.
"국사 말씀에 따르면 폐파의 72절기 모두를 통달한 누군가가 있다는 겁니까?"
구마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럼 대답해보십시오. 그 대영웅이 누굽니까?"
구마지가 말했다.
"대영웅이란 칭호를 듣기에는 많이 부끄럽다 할 수 있지요."
현생은 안색을 바꿔 물었다.
"국사 본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구마지가 고개를 끄덕이고 합장을 한 채 엄숙하고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그렇소이다." - P264

소림 군승은 하나같이 고개를 숙인 채 의기소침해 했다. 방장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게 만들었다는 것은 소림파의 무공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줄곧 최고라 자부하던 소림 72 절기가 그저 그런 것으로 평가절하되고 자체적으로 정한 규율마저 합리적인 것이 못 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 P268

과거 허죽이 단연경의 가르침을 받고 무애자가 포진해 놓은 진롱 기국을 풀 때 구마지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군중 틈에서 나타나 손가락을 연이어 돌려 허공을 격하며 현도의 혈도를 막는데 그 기묘한 수법과 심후한 공력은 자신도 평생 본 적이 없던 터라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P274

난검이 말했다.
"그 연근이란 화상이 주인님께 무례하게 대하기에 저희 자매들이 가서 혼쭐을 내줬습니다. 그랬더니 그제야 옳고 그름을 이해하더군요. 에이, 근데 그 서역승이 또 주인님을 해칠지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허죽은 문득 깨달았다. 거만했던 연근이 갑자기 공손한 모습으로 바뀐 것은 알고 보니 이들 네 자매가 협박을 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 P310

허죽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정했다.
"방장 그리고 사백조, 사숙조 여러분! 부처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자비를 베풀어주시어 제자가 개과천선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십시오 이 제자는 그 어떤 징벌도 감수할 것입니다. 부디 사문에서 축출하지만 말아주십시오!"
그는 흐느껴 우는 목소리로 매우 간절하게 사정했다.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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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모가 허죽에게 끊임없이 재촉했다.
"어서 날 업고 가라! 저 천한 년으로부터 멀리 떨어질수록 좋다. 이 할머니가 네 호의를 잊지 않고 필히 후사할 것이다."
저백삼인은 아주 차분하고 느긋하게 한쪽에 서 있었는데 가벼운 바람에 옷자락이 날려 마치 선녀처럼 보였다. 허죽은 저렇게 우아한 낭자를 동모가 어찌 그리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 P15

허죽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죽어도 육식을 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데 화가 난 동모가 어디서 소녀 하나를 잡아다 음계를 어기도록 유혹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순간 회한과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벌떡 일으켜 딱딱한 얼음에 자신의 머리를 가져다 박았다. 퍽 소리와 함께 허죽은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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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죽이 생각했다.
‘이제 보니 이 소상공은 여자에다 성수파 제자였어. 성수파 제자 중에서도 대사저라니. 아이고, 이런! 나한테 닭곰탕을 마시게 하고 비곗살을 먹이면서 독을 넣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 젊은이는 다름 아닌 남장을 하고 있던 아자였다. - P141

정춘추는 남들로부터 아첨의 말을 듣는 것이 평생 최고의 취미였던 터라 남들이 오글거리는 말을 하면 할수록 기분 좋게 들렸다. 그는 이들 제자로부터 수십 년 동안 칭송의 말을 들어왔기에 이제는 공덕을 찬양하는 제자들의 말 하나하나를 모두 진실처럼 믿고 있었고 누구든 그를 치켜세우는 정도가 부족하기라도 하면 그 제자가 충성심이 모자란다 생각했다. - P145

정춘추는 속으로 화가 치밀어오르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조금 전 아자에게 말을 할 때 그는 소맷자락을 살짝 떨치며 암암리에 운용한 내력으로 삼소소요산 독 가루를 모용복에게 뿌렸었다. 그 독 가루는 무색무취의 미세하기 이를 데 없는 극약인 데다 이미 해가 져 객당 안은 어두컴컴한 상태였던 터라 아무리 고강한 무공을 지닌 모용복도 절대 알아채지 못하리라 여겼다.
그런데 그가 어떤 수법을 펼쳤는지 모르지만 삼소소요산이 뜻밖에도 자신의 제자에게 전이됐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 P156

고소모용가에서 자랑하는 최상의 절기는 바로 두전성이라 불리는 차력타력 기술이었다. 남들은 속사정도 모르고 모용씨가 그저 ‘상대가 쓴 방법을 상대에게 펼친다‘는 신묘한 무공으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며 상대방이 명성을 떨친 절기를 그 사람에게 가한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마치 고소모용씨가 천하 각 문파의 절기를 모두 구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아주 정묘하게 구사할 것이라 여긴 것이다. - P161

정춘추는 모용복을 어찌 처리할지 몰라 노심초사하고 있던 와중에 아자가 자신을 성수노선이라 칭하자 그 칭호가 틀린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웃음 속에 조소의 의미가 있다고 느껴 돌연 광분하기 시작했다. 그는 당장 왼손 소맷자락을 휘둘러 탁자 위에 있던 젓가락 한 벌을 허공에 들어올리고는 아자의 두 눈을 향해 쏘아갔다.
아자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 P165

"낭자 누・・・ 눈은 좀 어떻소?"
아자는 두 눈에 극심한 통증만 느껴질 뿐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떠 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온 천지가 칠흑 같은 어둠으로 변해 있었다. 그제야 자신의 두 눈이 정춘추의 독약에 못쓰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대성통곡을 하며 부르짖었다.
"내… 내 눈이 못쓰게 돼버렸어!" - P167

"결코 그대를 속이는 것이 아니오. 내가 그대를 떠난다면 난 고이 죽지 못할 것이오."
초조해하는 듯한 그의 말투에서 진정성이 느껴졌다.
아자가 말했다.
"그럼 당신은 누구예요?"
"난 취현장..… 아니, 아니, 내 성은 장이고 이름은 취현이오." "
아자를 구한 자는 다름 아닌 취현장의 소장주 유탄지였다.
"장 선배님이셨군요. 구해줘서 고마워요." - P169

난데없이 산중턱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 되오! 왕 낭자는 절대 해치지 마시오. 내가 투항을 하겠소!"
잿빛 그림자 하나가 바람처럼 날아오는데 그 발놀림이 민첩하기를 데 없었다. 바깥쪽을 에워싸고 서 있던 몇 명이 일제히 호통을 치며 막으려 했지만 그는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며 그 무리들을 피해 앞쪽으로 달려들었다. 왕어언이 불빛 아래에서 살펴보니 그는 다름 아닌 단예였다.
단예가 다시 소리쳤다.
"투항하는 게 뭐 어렵다 그러시오? 왕 낭자를 위해서라면 나더러 천 번 아니라 만 번을 투항하라 해도 할 것이오." - P212

오노대가 이를 꽉 깨물고 뭔가 결심을 한 듯 모용복 앞으로 걸어가 깊이 읍을 하고 말문을 열었다.
"모용 공자, 삼십육동과 칠십이도 형제들은 수십 년 동안 모진 고통을 받으면서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살아왔소. 이번에 우리 모두 목숨을 내걸고 그 노마두를 제거하고자 하니 부디 공자가 의협심을 발동해 곤경에 처한 우리를 구해주시기 바라오. 그렇게만 해준다면 그 크나큰 은덕에 대해선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오!"
.
.
.
‘크나큰 은덕에 대해선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 이 삼십육동과 칠십이도 중에는 고수들이 꽤 있지 않은가? 내가 훗날 대업을 도모하려면 적보다는 아군이 많아야만 한다. 오늘날 내가 저들에게 도움을 준다면 나한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저들을 청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여기 있는 수많은 고수가 나에게는 실로 정예 병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P237

우리 삼십육동동주와 칠십이도 도주는 외지고 황량한 산에 기거하는 이도 있고, 섬주변을 장악한 이도 있기 때문에 마치 유유자적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개개인이 모두 천산동모의 속박을 받으며 살고 있소. 솔직히 우리 모두 그녀의 노예요. 매년 한두 번씩 사람을 보내와 우리를 질책하고 심하게 욕을 퍼부어대니 정말 사람으로서 견딜 수가 없소. - P254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우리가 영취궁 안에 가서 살펴볼 때는 누구도 감히 마음 놓고 탐문하지 못했소. 다들 최대한 은폐를 하며 누구라도 부딪힐까 두려워했던 것이오. 다만 재하가 궁 뒤편의 화원 안에서 어린 계집아이 하나와 마주쳤소. 그 계집아이는 시녀인 듯했지만 갑자기 고개를 드는 바람에 피할 새도 없이 내 얼굴과 마주치고 말았고 재하는 비밀이 누설될까 두려워 그 아이한테 달려들어 당장 잡아가야겠다 생각했소. - P280

"넌 표묘봉과는 어떤 연원이 있더냐? 어찌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무모하게 그 아이를 구한 것이냐?"
습허죽이 빠른 걸음으로 산봉우리로 달려가며 말했다.
"표묘봉이고 영취궁이고 소승은 오늘 처음 듣습니다. 소승은 소림제자로서 명을 받들어 하산했을 뿐 강호의 어떤 문파와도 관련이 없습니다. - P293

"오늘 정말 소화상 네 녀석은 거저먹은 줄 알아라. 이 할머니의 그 신공은 본래 부전지비란 걸 알아야 한다. 허나 네가 진실성이 있고 이 할머니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려 한 것이 확실해 내가 무공을 전수하는 규칙에 부합된 거야. 더구나 위급한 상황이라 이 할머니도 너한테 도움을 청해 출수를 하도록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게다."
오노대는 벙어리 여자아이가 돌연 입을 열어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놀라서 말이 안 나온다는 표정을 지었다. - P331

"흐흐, 눈썰미는 좋구나. 내가 두세 살 더 자란 걸 알아보다니 말이야. 멍청이 화상아, 천산동모의 몸은 영원한 여동이라 결코 자라지 않는다."
허죽과 오노대가 모두 깜짝 놀라 일제히 소리쳤다.
"천산동모? 당신이 천산동모란 말입니까?"
여자아이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럼 내가 누구인 줄 알았더냐? 이 할머니는 여자아이의 몸을 지녔다. 너희는 눈이 삐었단 말이냐? 그걸 못 알아봐?"
오노대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한참을 바라보다 입을 부르르 떨며 뭔가 말하려다 시종 말을 하지 못했다. - P346

그녀는 허죽이 채 대답도 하기 전에 말했다.
"넌 대부호의 자제에 비유할 수 있다. 조상님들께 거액의 재물을 전수받아 자본이 풍부하기 때문에 더 이상 재화를 저축할 필요 없이 그저 돈 쓰는 요령만 배우면 되는 것이다. 돈을 쓰기는 쉽지만 모으는 건 어렵다. 넌 한 달을 연마하면 어느 정도 익힐 수 있고 두 달을 연마한 후에는 가까스로 내 대적수와 겨룰 수 있을 것이다."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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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하가 말했다.
"이 진롱은 선사께서 만드신 것이오. 선사께서는 과거 3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이걸 만드시고 당대에 바둑의 도를 이해하는 인물이 깨주기를 기대하셨소. 재하가 30년 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연구를 했지만 아직까지 풀어내지 못했소." - P31

"모용 공자, 이제 모습을 드러내시오!"
청량한 웃음소리가 들리며 한 소나무 뒤에서 두 사람이 돌아나왔다. 단예는 곧 눈앞이 캄캄해지고 입안이 씁쓸해지면서 온몸에 열이오르기 시작했다. 그중 아주 빼어나게 아름다운 자태를 지닌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오는데 그건 바로 그가 밤낮으로 그리워하며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그녀, 왕어언이었다.
그녀는 사랑스러운 정이 가득한 얼굴로 옆에 있는 한 청년 공자를 넋을 잃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단예가 그녀의 눈빛을 따라가보니 스물여덟아홉 정도 나이의 간편한 담황색 복장을 하고 허리에 장검을 찬 공자 하나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의 얼굴은 맑고 준수했으며 품위가 넘쳐 보였다. - P35

단예의 패배는 사랑이 과하다 보니 돌을 포기하지 못하는 데 있었고, 모용복의 실패는 권세에 집착한 나머지 과감하게 돌을 포기해도 오히려 세를 잃지 않으려 한 데 있었다. 단연경의 경우 평생 한스럽게 생각하던 일이 바로 불구가된 이후 부득불 본문의 정종 무공을 포기하고 이단 문파의 사술을 습득하게 된 것이라 일단 정신을 집중했을 때 외마의 침입을 받자 뜻밖에도 심신이 일렁거려 자제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 P46

허죽은 자비심이 발동했다. 그는 단연경의 마장을 풀어내려면 기국에 손을 들여놔야 하지만 바둑 실력이 형편없었던 터라 이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기국 속의 난제를 푼다는 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단연경의 두 눈이 기국을 멍하니 응시하는 것을 보자 짧은 위기의 순간에 불현듯 영감이 떠올랐다.
‘저 기국을 풀지는 못해도 훼방을 놓는 건 간단하지 않은가? 저자의 심신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면 그를 구할 수 있다. 기국이 없다면 승부도 없을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마치자 대뜸 말했다.
"제가 기국을 풀어보겠습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가 바둑알 상자 안에서 백돌 하나를 꺼내 눈을 감은 채 손이 가는 대로 바둑판에 두었다. - P50

단연경은 변화한 기국을 보고 조금 전 자신이 사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 허죽의 도움 덕이란 것을 알게 되자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정춘추가 이에 원한을 품고 당장 허죽에게 보복을하기 위해 손을 쓸 것이라 생각했다.
‘소림 고승인 현난이 여기 있으니 성수괴도 그의 제자를 힘들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난 저 늙은이가 아둔해서 저 소화상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다면 내가 나서는 한이 있어도 그냥 죽게 놔둘 수는 없다.‘ - P52

허죽이 조금 전 눈을 감고 아무렇게나 둔 한 점이 대마가 있는 공활인 백돌들을 스스로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바둑의 이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 그 자리에 착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검을 들어 스스로 베어 자결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대량의 백돌을 상대에게 모두 내주고 난 뒤에 국면이 오히려 낙관적으로 변하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 P54

조금 전 단연경은 기국에 깊이 빠져 있다 정춘추가 펼쳐낸 사술에 하마터면 주화입마에 들어 자결을 할 뻔했지만 다행히 허죽의 훼방 덕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는 소성하가 허죽에게 엄한 질책을 하며 위협을 가하자 곧바로 암암리에 목소리를 전해 그에게 훈수를 두었던 것이다. - P57

그 노인이 말했다.
"의협심은 나무랄 데가 없구나. 기예가 뛰어나지 않고 무공 실력이 부족하다 해도 상관없다. 네가 여기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인연이니라. 다만 네 용모가 너무 추한 게 문제로다."
이 말을 하며 끊임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죽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겉모습이 아름답고 추한 것은 아주 머나먼 과거로부터 이어진 업보가 쌓인 것이라, 이는 스스로 어쩔 도리가 없을뿐더러 부모조차도 달리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소승의 용모가 추해 선배님을 불쾌하게 만들었다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 P67

노인이 허허하며 웃었다.
"아직까지도 날 사부라 칭하길 원치 않는 것이냐?"
허죽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소승은 소림과 제자입니다. 조종을 배신하고 다른 문파에 새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네 몸에는 이제 소림무공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데 무슨 소림제자라 말할 수 있느냐? 또한 네 체내에는 소요파의 70여 년 된 신공이 축적되어 있는데 어찌 본 파의 제자가 아니라 할 수 있단 말이냐?" - P76

‘육맥신검은 무슨, 깜짝 놀랐잖아? 이제 보니 저 녀석이 허풍을 떨며 속임수를 쓰는 거였구나. 예로부터 우리 단가에 육맥신검이란 기이한 무공이 전해내려온다는 말은 있었지만 그걸 연성한 사람이 어디있다고? - P90

"소요파 불초 제자인 소성하가 본 파의 신임 장문인께 인사올립니다."
허죽은 순간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이 사람이 정말 미쳤구나! 정말 미쳤어!"
그는 황급히 무릎 꿇고 절을 하며 답례했다.
"노선배님께서 이런 예를 행하다니 정말 황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소성하가 정색을 했다.
"사제, 자네는 우리 사부님의 마지막 제자이자 본 파의 장문인이네.
그 때문에 내가 사형이긴 하지만 자네한테 절을 해야만 하는 것이야!"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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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노선께서 중원에 친히 행차하셨으니 개방의 제자들은 속히 무릎을 꿇고 맞이하라!"
말이 끝나자마자 둥둥둥둥 하고 북소리가 울려퍼졌다. 북소리가 세차례에 걸쳐 울려퍼지고 지잉 하는 징소리가 들리자 북소리는 멈추고 수십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 P228

동안학발의 이 노인은 바로 중원 무림 인사들에게 있어 증오의 대상인 성수노괴 정춘추였다. 그는 성수파의 삼보 중 하나인 신목왕정을 여제자인 아자에게 도둑맞자 수차에 걸쳐 제자들을 보내 잡아오게 하고 심지어 대제자인 적성자까지 보냈었다. 그러나 번번이 비합전서를 통해 전해져오는 소식은 모두 실패했다는 내용들뿐이었다. - P230

원래 성수노괴는 살인을 밥 먹듯 하고 사람의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는 자라 유탄지가 개방 제자들의 생사를 확인토록 만들어 그 김에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던 그를 제거하려 했다. 뜻밖에도 유탄지는 몇달 동안 수련을 계속해온 터라 빙잠의 기독이 이미 그의 체질에 융합되어 정춘추가 개방 제자들 몸에 묻혀놓은 독질조차 그를 해칠 수 없었다. - P236

유탄지는 머리에 쓴 철가면이 마치 불에 달궈진 듯 얼굴 전체가 뜨거워지자 속으로 무섭기 짝이 없었다. 그는 아자에게 갖은 괴롭힘을 당한 이후 이미 어떤 고초도 참고 견딜 수 있었지만 시비와 선악의 구별이나 강직한 기개 같은 관념에 대해서는 깨끗이 잊은 지 오래였다.
그는 오로지 목숨만을 보전할 생각에 다급하게 답했다.
"사부님, 제자 유탄지가 사부님 문하에 들어가고자 하니 부디 사부님께서 거둬주십시오." - P240

바로 그때 맞은편 길에서 한 승려가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정자 밖에 이르러 두 손으로 합장을 하더니 공손하게 말했다.
"시주 여러분, 소승이 지나는 길에 목이 말라 정자에서 물 한잔하고 좀 쉬어가려 합니다."
흑의를 입은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스님께서는 예가 지나치시오. 다들 지나는 과객이고 이 정자는 우리가 지은 것도 아니지 않소? 그냥 들어와 마시도록 하시오."
"아미타불, 고맙습니다."
승려는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정자 안으로 들어왔다.
그 승려는 스물서넛 정도 되는 나이에 진한 눈썹과 큰 눈 그리고 커다란 코에 콧구멍이 하늘을 향해 있어 용모가 추하기 짝이 없었다. 승포 곳곳에는 기운 자리가 있었지만 오히려 아주 깔끔해 보였다. - P244

"소스님께서는 걸음걸이가 매우 씩씩하고 힘찬 것을 보니 무공을 할 줄 아는 것 같구려. 스님에 대한 호칭을 어찌해야 하며 어느 보찰에 출가하셨는지 가르침을 내려주시오."
승려는 물 사발을 항아리 뚜껑 위에 올려놓고 살짝 몸을 굽히며 답했다.
"소승은 허죽이라고 하며 소림사에 출가했습니다." - P247

‘소림사 주지 현자가 합장으로 천하영웅들을 정중히 청합니다. 12월초여드레 납팔절 숭산 소림사에 왕림해주시어 좋은 인연을에 폭넓게 맺으시고 고소모용씨의 ‘상대가 쓴 방법을 상대에게 펼친다‘는 고명한 풍모도 구경하시기 바랍니다. - P249

"재하는 정춘추라 합니다."
정춘추라는 세 글자가 입에서 떨어지자 현난과 현통, 등백천, 공야건, 포부동, 풍파악 등 여섯 사람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깜짝 놀라며 서서히 안색이 바뀌었다. 성수노과 정춘추의 악명은 천하에 널리 퍼져 있었던 터라 그가 이렇게 품위가 있고 근엄한 모습의 인물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고, 더구나 이런 곳에서 만나리라고는 더더욱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 P257

총변선생은 농아노인으로 선천적인 농아였지만 굳이 ‘총변선생’이라는 별호로 불리기를 원했으며 그 문하의 제자들이 하나같이 그에게 귀를 찢기고 혀를 잘렸다는 사실은 이미 강호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제자라는 이들은 모두 다 멀쩡히 들을 수 있고 또한 달변인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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