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성하가 말했다.
"이 진롱은 선사께서 만드신 것이오. 선사께서는 과거 3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이걸 만드시고 당대에 바둑의 도를 이해하는 인물이 깨주기를 기대하셨소. 재하가 30년 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연구를 했지만 아직까지 풀어내지 못했소." - P31

"모용 공자, 이제 모습을 드러내시오!"
청량한 웃음소리가 들리며 한 소나무 뒤에서 두 사람이 돌아나왔다. 단예는 곧 눈앞이 캄캄해지고 입안이 씁쓸해지면서 온몸에 열이오르기 시작했다. 그중 아주 빼어나게 아름다운 자태를 지닌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오는데 그건 바로 그가 밤낮으로 그리워하며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그녀, 왕어언이었다.
그녀는 사랑스러운 정이 가득한 얼굴로 옆에 있는 한 청년 공자를 넋을 잃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단예가 그녀의 눈빛을 따라가보니 스물여덟아홉 정도 나이의 간편한 담황색 복장을 하고 허리에 장검을 찬 공자 하나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의 얼굴은 맑고 준수했으며 품위가 넘쳐 보였다. - P35

단예의 패배는 사랑이 과하다 보니 돌을 포기하지 못하는 데 있었고, 모용복의 실패는 권세에 집착한 나머지 과감하게 돌을 포기해도 오히려 세를 잃지 않으려 한 데 있었다. 단연경의 경우 평생 한스럽게 생각하던 일이 바로 불구가된 이후 부득불 본문의 정종 무공을 포기하고 이단 문파의 사술을 습득하게 된 것이라 일단 정신을 집중했을 때 외마의 침입을 받자 뜻밖에도 심신이 일렁거려 자제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 P46

허죽은 자비심이 발동했다. 그는 단연경의 마장을 풀어내려면 기국에 손을 들여놔야 하지만 바둑 실력이 형편없었던 터라 이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기국 속의 난제를 푼다는 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단연경의 두 눈이 기국을 멍하니 응시하는 것을 보자 짧은 위기의 순간에 불현듯 영감이 떠올랐다.
‘저 기국을 풀지는 못해도 훼방을 놓는 건 간단하지 않은가? 저자의 심신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면 그를 구할 수 있다. 기국이 없다면 승부도 없을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마치자 대뜸 말했다.
"제가 기국을 풀어보겠습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가 바둑알 상자 안에서 백돌 하나를 꺼내 눈을 감은 채 손이 가는 대로 바둑판에 두었다. - P50

단연경은 변화한 기국을 보고 조금 전 자신이 사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 허죽의 도움 덕이란 것을 알게 되자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정춘추가 이에 원한을 품고 당장 허죽에게 보복을하기 위해 손을 쓸 것이라 생각했다.
‘소림 고승인 현난이 여기 있으니 성수괴도 그의 제자를 힘들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난 저 늙은이가 아둔해서 저 소화상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다면 내가 나서는 한이 있어도 그냥 죽게 놔둘 수는 없다.‘ - P52

허죽이 조금 전 눈을 감고 아무렇게나 둔 한 점이 대마가 있는 공활인 백돌들을 스스로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바둑의 이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 그 자리에 착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검을 들어 스스로 베어 자결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대량의 백돌을 상대에게 모두 내주고 난 뒤에 국면이 오히려 낙관적으로 변하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 P54

조금 전 단연경은 기국에 깊이 빠져 있다 정춘추가 펼쳐낸 사술에 하마터면 주화입마에 들어 자결을 할 뻔했지만 다행히 허죽의 훼방 덕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는 소성하가 허죽에게 엄한 질책을 하며 위협을 가하자 곧바로 암암리에 목소리를 전해 그에게 훈수를 두었던 것이다. - P57

그 노인이 말했다.
"의협심은 나무랄 데가 없구나. 기예가 뛰어나지 않고 무공 실력이 부족하다 해도 상관없다. 네가 여기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인연이니라. 다만 네 용모가 너무 추한 게 문제로다."
이 말을 하며 끊임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죽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겉모습이 아름답고 추한 것은 아주 머나먼 과거로부터 이어진 업보가 쌓인 것이라, 이는 스스로 어쩔 도리가 없을뿐더러 부모조차도 달리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소승의 용모가 추해 선배님을 불쾌하게 만들었다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 P67

노인이 허허하며 웃었다.
"아직까지도 날 사부라 칭하길 원치 않는 것이냐?"
허죽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소승은 소림과 제자입니다. 조종을 배신하고 다른 문파에 새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네 몸에는 이제 소림무공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데 무슨 소림제자라 말할 수 있느냐? 또한 네 체내에는 소요파의 70여 년 된 신공이 축적되어 있는데 어찌 본 파의 제자가 아니라 할 수 있단 말이냐?" - P76

‘육맥신검은 무슨, 깜짝 놀랐잖아? 이제 보니 저 녀석이 허풍을 떨며 속임수를 쓰는 거였구나. 예로부터 우리 단가에 육맥신검이란 기이한 무공이 전해내려온다는 말은 있었지만 그걸 연성한 사람이 어디있다고? - P90

"소요파 불초 제자인 소성하가 본 파의 신임 장문인께 인사올립니다."
허죽은 순간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이 사람이 정말 미쳤구나! 정말 미쳤어!"
그는 황급히 무릎 꿇고 절을 하며 답례했다.
"노선배님께서 이런 예를 행하다니 정말 황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소성하가 정색을 했다.
"사제, 자네는 우리 사부님의 마지막 제자이자 본 파의 장문인이네.
그 때문에 내가 사형이긴 하지만 자네한테 절을 해야만 하는 것이야!"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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