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왜 안 믿으세요?"
비토리아의 목소리에는 따지거나 평가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랭던은 웃음을 터뜨렸다.
"글쎄요, 쉬운 문제는 아니네요. 신앙을 가지려면 믿음이 깊어야 하고, ‘동정녀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나 ‘신성한 간섭‘과 같은 기적을 믿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교인이 되면 따라야 할 규칙도 있고요. 성경이나 코란, 불경에도 다 비슷한 요구 사항에 비슷한 벌이 나와 있죠. 특정한 계율에 따라 살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되어 있고. 하지만 신이 있다면 그런 식으로 세상을 다스릴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 P140

"랭던 씨, 저는 사람들이 신에 대해 하는 말들을 믿느냐고 물어본 게 아니에요. 신을 믿느냐고 물었죠. 둘 사이엔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야기일 뿐이죠. 인간이 스스로 의미를 추구해 나가는 과정을 역사와 전설로 기술한 거예요. 글로 쓰여진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물은 게 아니라 신을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 누웠을 때 신의 존재를 느끼세요? 하느님이 손수 만들어낸 작품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느냐고요." - P140

랭던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자신이 차고 다니는 손목시계에 대해 변명을 늘어 놓는 데 이골이 난 지 오래였다. 어릴 때 부모님께 선물로 받은 소장용 미키마우스 시계였다. 미키마우스가 두 팔을 심하게 뻗어 시간을 가리키고 있는 디자인이 우스꽝스러웠지만, 랭던이 차고 다니는 유일한 시계였다. 방수에 야광기능까지 있어 수영할 때나 밤에 어두운 캠퍼스를 다닐 때 편했다. 학생들이 패션 센스가 왜 그러느냐고 할 때마다 마음만은 젊게 살고 싶은 뜻에서 미키마우스를 차고 다니는 거라고 대답했다. - P147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큰 권력을 지닌 전 세계 추기경 1백65명이 바티칸에 모두 모여 새 교황을 선출하는 신성한 의식이 바로 콘클라베다.
‘지구상의 추기경이란 추기경은 지금 다 여기에 있겠군.
헬리콥터가 성 베드로 대성당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바티칸의 드넓은 경내가 바로 아래에 있었다.
‘그렇다면 로마가톨릭 교회의 권력 구조가 통째로 시한폭탄 위에 앉아 있는 셈이야. - P157

선택된 네 명.
콘클라베를 관장하는 역할을 맡은 모르타티는 이미 적절한 경로로 전갈을 보내 스위스 근위대에 그들의 불참을 알렸다. 아직 답신은 오지 않았다. 다른 추기경들도 이제 네 명의 후보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불안한 속삭임이 일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네 명은 제시간에 와야했다. 모르타티는 콘클라베가 길어질까 두려웠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 펼쳐질 일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 P161

르네상스 미술 역사상 가장 끔찍한 비극 중 하나였다. 1857년 피우스 9세 교황은 남성 성기의 정확한 묘사가 바티칸 내에서 풍기문란을 초래한다 하여 정과 망치를 동원해 바티칸 내 모든 남성 조각상의 성기를 잘라 버렸다. 그 과정에서 미켈란젤로, 브라만테, 베르니니의 작품들이 훼손되었다. 그훼손 부위를 가리느라 석고가 사용된 것이다. - P166

올리베티는 모니터 앞으로 다가가더니 화면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고는 랭던과 비토리아에게 돌아서며 말했다.
"이 영상은 바티칸 시국 내부 어딘가에 숨겨진 무선 카메라에서 송출한 것입니다.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모니터를 들여다본 랭던과 비토리아는 동시에 숨을 들이쉬었다. 영상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만큼 확실했다. 그것은 CERN의 반물질 트랩이었다. - P169

랭던은 자신의 기억이 맞기를 바라며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반복해 말했다. 그는 언젠가 교황 이후 바티칸 권력 설정의 기이한 단면에 대해 읽은 적이 있었다. 랭던이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면, 교황이 새로 선출되기 전까지 모든 자치권은일시적으로 영면한 교황의 개인 비서인 궁무처장에게 이양된다. 궁무처장은 낮은 직위의 비서일 뿐이지만, 추기경들이 새로운 교황을 뽑을 때까지 콘클라베를 감독하는 임무를 맡았다. - P174

랭던은 궁무처장의 모습에 최면이 걸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젊고 피로에 지친 모습이었지만 그에게는 신화 속 영웅과 같은 느낌이 있어, 온몸에서 카리스마와권위를 발산하고 있었다. - P186

"아직 근위대가 보고하지 않았나 보군. 이런 죄 많은 영혼이 있나. 하긴 그 자존심을 생각하면 놀랄 일도 아니지. 진실을 말하자니 치욕적이겠지. 자기가 지키겠다고 맹세한 추기경 네 명이 사라졌다는 진실 말이야." - P196

"맞아. 그래서 우리도 똑같이 할 거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살해당한 우리 형제들을 위한 보복의 의미라고 생각하시지. 당신네 추기경 넷은 여덟 시부터 시작해서 한 시간에 한 명씩 죽일 거야. 자정이 되면 전 세계의 눈이 집중될 거다." - P198

교회에는 불행한 일이지만, 모르타티는 궁무처장이 나이가 들어도 절대 교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교황이 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정치적야심이 있어야 하는데, 궁무처장에겐 그런 면이 없었다. - P205

테러의 목적은 공포를 유발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기존 사회의 믿음을 갉아먹죠. 적을 속부터 약화시키는 겁니다. 군중의 불안을 야기하는 거죠. 받아 적으십시오. ‘테러는 분노의 표출이 아니다. 테러는정치적인 무기다.’ 정부도 당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면 사람들의 믿음도 사라지는 겁니다. - P218

랭던은 궁무처장에게 말했다.
"처장님, 지난 삼 년 동안 저는 일곱 번이나 바티칸 문서 보관소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교황청에 청원했는데 매번 거절당했습니다."
"랭던 씨, 미안하지만 지금은 그런 민원을 제기할 시점이 아닌 듯 싶습니다."
"지금 당장 가봐야겠습니다. 사라진 네 명의 추기경 말입니다. 그분들이 어디서 살해당할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 P219

단서 역할을 했던 겁니다. 만약 일루미나티에 입회하고 싶은 사람이 맨 처음 성당에 가서 흙의 표식을 찾으면, 그걸 따라가서 공기를 찾고, 불을 찾고, 물을 찾고, 그러면 결국 계몽의 교회로 이어지게 되어있습니다.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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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위병은 생각했다. 카메라 위치가 이동된 것도 문제지만, 당장 훨씬 더 걱정스러운 문제가 있었다. 근위병은 없어진 카메라가 전송해 오는 영상을 바라보았다. 카메라는 정지된 물체 하나를 비추고 있었다. 현대적인 모습의 그 물체는 처음보는 장치였다. 그는 장치의 하단에 깜박이는 전자 디스플레이를 살펴보았다. - P78

"망막 인식 시스템이에요. 매우 안전한 보안책이죠. 저와 아버지, 단 두 개의 망막만 인식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 순간, 로버트 랭던은 공포스러운 사실을 깨달았다. 레오나르도 베트라의 모습이 소름 끼칠 정도로 선명하게 떠올랐다. 피범벅이 된 얼굴, 그를 바라보던 한 개의 눈알, 그리고 텅 빈 눈구멍. - P84

침대에서 일어나며, 암살자는 자신이 수행할 임무의 영광스러움을 한껏 음미했다. 아직도 야누스라는 남자와 그가 지휘하는 조직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놀랍게도 조직은 암살자를 택했다. 용케도 그가 가진 적의와 실력을 알아본 것이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 P87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비토리아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부터 설명해 보게. 아버지가 하던 실험에 대해서."
"종교의 힘을 빌려 과학의 궤도를 수정하는 것이 아버지의 평생 소원이셨어요. 과학과 종교가 완벽하게 양립할 수 있는 하나의 진실로 가는 방법일 뿐이라는걸 증명하고 싶어 하셨죠." - P89

빅토리아는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제 말의 요지는 아버지가 항상 빅뱅 과정에 하느님이 있다고 믿었다는 거예요. 지금 당장 과학으로 창조의 신성한 순간을 이해할 순 없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계셨어요." - P93

콜러의 얼굴이 굳어졌다.
"비토리아, 정말 저 안에 실제로 샘플이 들어 있다는 얘기는 아니겠지?"
"그렇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비토리아는 자랑스럽다는 듯 캔을 바라보았다.
"소장님께서는 지금 세계 최초의 반물질 샘플을 보고 계신 거예요." - P96

오래지 않아 비토리아는 밀려드는 공포와 함께 그 물체를 알아보았다. 쓰레기처럼 바닥에 버려진 채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는 그것은 바로 사람의 눈알이었다. 비토리아가 그 연갈색 눈동자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를 리 없었다.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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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 레오나르도 베트라는 살이 타는 냄새를 맡았다. 자신의 살이 타는 냄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그는 흐릿하게 보이는 검은 형체를 올려다보았다.
"원하는 게 뭐요!"
"라 키아베 (비밀번호)."
남자가 거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 P11

"여보세요?"
"로버트 랭던 씨와 통화하고 싶습니다."
남자 목소리였다.
랭던은 텅 빈 침대에 일어나 앉으며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제가 로버트 랭던입니다만…………"
랭던은 디지털 벽시계를 흘긋 쳐다보았다. 새벽 5시 18분이었다.
"지금 즉시 선생을 만나야겠소."
"누구십니까?"
"나는 막시밀리안 콜러라고 합니다. 이산 입자물리학자요."
"뭐라고요?"
랭던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혹시 저 말고 다른 랭던을 찾으시는 거 아닙니까?"
"하버드대 종교 도상학 교수 아닙니까? 기호학 관련 저서 세 권을 집필했……
"도대체 지금 몇 시인지 아십니까?"
"미안하게 됐습니다만, 선생이 꼭 봐줘야 할 게 있습니다. 전화로 얘기할 문제가 아니라서." - P14

그들의 악명이 널리 퍼지면서 점차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바로 ‘해새신(Hassassin)‘인데, 말 그대로 ‘해시시를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 후 해새신이라는 단어는 지구상 모든 언어에서 죽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 단어는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현대 영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살인의 수법이 진화해 왔듯이 단어 또한 변화했다.
이제 그 단어는 ‘어새신(Assassin, 암살자)‘이라고 발음되고 있는 것이다. - P27

"인터넷은 이 연구소에서 내부 컴퓨터 사이트를 연결하는 네트워크로 처음 개발되었습니다. 그 덕에 각기 다른 부서에 있는 과학자들이 매일같이 새로 얻은 지식을 서로 공유할 수 있었던 겁니다. 물론 세상 모든 사람이 인터넷은 미국에서 개발되었다고 잘못 알고 있지만." - P35

세 사람 중 뚱뚱한 여자 하나가 창문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바람이 사정없이 온몸을 때리는 와중에도 활짝 웃으며 랭던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랭던은 희미한 미소와 함께 같은 제스처로 답했다. 엄지손가락을 드는 동작이 고대에는 남성의 왕성한 생식력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쓰였다는 걸 알기나 할까 싶었다. - P37

"그렇습니다. 하지만 16세기에 이르러서는 로마의 한 단체가 교회에 맞서 싸웠죠.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뛰어난 지성을 갖춘 물리학자·수학·천문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비밀리에 회합을 갖고, 교회가 그릇된 가르침을 전파하는 것을 우려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위 ‘진실’이 무엇인가애 대해 교회가 독점적인 결정권을 행사하다 보니 이것이 전 세계적인 학문적 발전을 저해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이들은 세계 최초의 과학자 집단을 만들고 스스로를 ‘계몽된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 P46

"일루미나티의 생명력은 엄청났습니다. 로마에서 도망친 일루미나티 소속 과학자들은 유럽 대륙을 떠돌며 안전하게 조직을 재정비할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러다가 또다른 비밀 단체에 편입되었죠. 바이에른의 부유한 석공예 기술자들이 만든 단체, 바로 프리메이슨입니다." - P53

베트라의 얼굴은 온통 피범벅이되어 있었고, 다갈색 눈동자 하나만 랭던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한쪽 눈구멍은 찢겨져 있었고, 안구가 온데간데 없었다.
"눈알을 빼간 겁니까?"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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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영, 항산파 제자들을 구한 뒤에 나와 혼인합시다. 종신대사는 부모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느니, 중매인을 세워야 한다느니 하는 허울따위는 신경 쓸 필요 없소. 검을 버리고 무림에서 은퇴한 뒤 조용한곳에 보금자리를 만들어, 세상일에 관심을 끊고 아이만 낳으며 사는거요." - P185

‘임평지도 이곳에 있었구나. 임평지와 좌냉선은 둘 다 눈이 멀었으니 그동안 은밀한 곳에서 검술을 연마하며, 귀를 눈 삼아 바람 소리만 듣고도 무기를 판별하는 연습을 해왔을 거야. 이 컴컴한 곳에서는 내가 장님이고 저들은 도리어 정상인이나 마찬가지니 무슨 수로 임평지를 꺾는다?" - P226

맑은 파공성이 울려퍼지고, 영호충의 검은 좌냉선의 미간과 목, 가슴 세 곳을 찔렀다. 영호충은 훌쩍 뒤로 물러나 영영의 손을 꽉 잡았다. 좌냉선은 한참 동안 꼿꼿이 서 있다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들고 있던 검이 뒤집어지는 바람에 검끝이 아랫배를 파고들어 등 뒤로 비죽이 튀어나왔다. - P240

악불군도 정말 영영의 얼굴을 망가뜨릴 생각은 아니었다. 해약 제조법을 술술 불도록 위협할 생각이었는데 영호충이 제 눈을 찌르면이 최후의 협박도 물거품이 될 뿐이었다. 그는 황급히 왼팔을 내밀어 영호충의 오른손 손목을 움켜쥐었다.
"멈춰라!"
두 사람의 피부가 닿는 순간, 악불군은 몸에서 진기가 쑥쑥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고 새된 비명을 질렀다.
"이런...!" - P250

"의림 사매, 영호 사형은 괜찮아요."
의림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다행이에요!"
겨우 안심한 듯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는 자신이 찌른 사람을 알아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악 선생이군요! 내.… 내가 악 선생을…!"
"맞아요, 사부님의 복수를 한 것을 축하해요. 괜찮다면 그물을 열어 우리를 좀 풀어주겠어요?"
"아, 알았어요!" - P252

임아행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암, 상좌사의 말이 옳다. 영호 형제, 오늘부터 항산파는 해산하도록 해라. 문하의 여제자들 중 흑목애로 오겠다는 사람은 얼마든지 환영할 것이고, 원치 않는 사람은 항산에 남아 있어도 무방하다. 항산을 부교주인 네 친위병으로 남겨두어도 좋겠지, 하하하!" - P292

"첫째, 저는 항산파 전 장문인이신 정한 사태의 유명을 받들어 항산파 장문인이 되었습니다. 항산파의 문호를 빛낼 일은 하지 못할망정 항산파를 이끌고 일월신교에 들어가는 일은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훗날 구천에서 무슨 낮으로 정한 사태를 뵐 수 있겠습니까? 두 번째는 사사로운 일입니다. 부디 따님과 혼례를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 P295

오랜 세월 임아행을 따른 상문천은 그의 인품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일시적으로 의기를 이기지 못해 영호충과 더불어 술을 마셨지만, 그 일로 임아행의 미움을 살 것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 혼자만이었다면 그뿐이지만, 다른 사람들까지 휩쓸려 술을 마시는 바람에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자 노두자와 계무시 등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재빨리 좋은 말을 지어내 임아행의 체면을 세워준 것이었다. - P304

"풍 선배께서는 조양봉에서 영호 장문이 취해 쓰러질 뻔한 것을 보시고, 특별히 도곡육선을 시켜 내공 구결을 전하며 영호 장문에게 전수해달라 하셨소. 도곡육선의 이야기는 두서가 없었지만, 뜻밖에도 내공 구결은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더구려. 아마도 풍 선배께서 특별한 수법을 써서 그들이 구결을 완벽하게 외우게끔 훈련을 시키신 모양이오. 영호 장문께서 내실로 안내해준다면 빈승이 그 구결을 알려드리겠소." - P319

"충 오라버니, 아버지는・・・ 아버지는 돌아가셨어요."
"아니,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그날 화산 조양봉에서 당신이 떠나고 오래지 않아 아버지께서 갑작스레 선인장 아래로 굴러떨어지셨지요. 상숙부와 내가 달려가 부축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끊어지셨어요." - P358

영영은 면사를 걷지 않고서 섬섬옥수를 내밀어 퉁소를 받아 두어 번 불어보더니 영호충과 함께 합주를 시작했다.
두 사람이 연주하는 곡은 다름 아닌 <소오강호곡>이었다.
지난 3년 동안 영영의 가르침을 받으며 열심히 금을 익힌 덕에 이제는 영호충도 제법 운치 있게 이 곡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 앞에서 합주를 하는 동안, 영호충의 머릿속에는 지난날 형산성 밖 들판에서 형산파 유정풍과 일월신교 장로 고양이 이 곡을 합주하던 광경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 P364

영영은 대답 대신 생긋 웃었다.
"임평지를 매장 지하 감옥에 가둔 것은 정말 훌륭한 선택이었어요. 당신 소사매에게 평생 임평지를 돌보겠다고 약속했는데, 감옥에 있는 동안 먹여도 주고, 입혀도 주고, 아무도 해치지 못하게 보호해주니 그 약속을 지킨 셈이지요. 그래서 나도 당신 친구 한 사람을 찾아 특별한 방법으로 보호해주기로 했답니다." - P370

나의 설정에서 임아행과 동방불패, 악불군, 좌냉선은 무림 고수가 아니라 정치인이다. 임평지, 상문천, 방증 대사, 충허 도인, 정정 사태, 막대 선생, 여창해, 고봉 같은 사람들 역시 정치인이다. 이런 각양각색의 인물들은 어느 왕조에나 있었고, 다른 나라에도 있으리라 확신한다. 크고 작은 기업과 학교, 각종 단체 안에도 있을 것이다. - 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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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적은 곧 친구라 하지 않았소? 좌 장문께서는 악불군 손에 두 눈을 잃으셨고, 임 소협이 두 눈을 잃은 것도 따지고 보면 악불군 탓이오. 소협이 벽사검법을 익힌 것을 악불군이 안 이상, 세상 끝까지 달아나더라도 반드시 쫓아와 죽일 것이오. 이제 오악파의 장문인이 되어 하늘을 찌르는 권세를 얻었는데 소협 혼자서 무슨 힘으로 그에게 항거하겠소? 하물며… 하물며 악불군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 아침저녁으로 소협 곁에 딱 붙어 감시하는데, 소협에게 날개가 돋아난들 베갯머리에서 일어나는 암습을 막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오."
그때 악영산이 높이 외쳤다.
"둘째 사형, 사형이군요!" - P26

"아버지가 정말... 정말 당신을 죽이려 했다면 그 뒤에도.… 기회는 많았어요. 그런데 왜 가만히 놔두셨겠어요?"
임평지는 차갑게 대꾸했다.
"그 후로 나는 살얼음판을 걷듯 신중하게 움직여 그자에게 손쓸 기회를 주지 않았소. 모두 당신 덕분이지. 내가 종일 당신과 함께 있었으니 죽이고 싶어도 쉽지 않았을 거요." - P29

노덕낙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좌 장문은 바로 이 몸의 은사시오. 나는 그분의 셋째 제자요."
"이제 숭산파로사문을 바꾼 모양이구려."
"사문을 바꾼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숭산파 사람이었소. 단지 은사의 명으로 화산파 제자인 척했을 뿐이오. 은사께서는 악불군의 무공을 가능하고 화산파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나를 보내신 것이오." - P30

"이제 혼자가 되어… 세상에 의지할 곳도 없으니 모두 그를… 그를 괴롭힐 거예요 대사형..… 내가 죽으면 대사형이 그를… 그를 보살펴줘요. 남들에게 괴롭힘 당하지 않도록…."
영호충은 멈칫했다. 임평지의 검에 찔려 숨이 끊어져가는 순간까지도 그를 향한 정을 잊지 못하다니!
당장 임평지를 붙잡아 천 갈래 만 갈래 찢어 죽이고 싶을 만큼 이가 갈리는데, 목숨을 살려주는 것도 과분한 무정한 악당을 괴롭힘 당하지 않도록 돌봐달라니 될 법이나 한 소리인가? - P38

갈 장로가 기뻐하며 말했다.
"두 형제, 악씨 계집애를 붙잡았나? 큰 공을 세웠군!"
골짜기를 쩌렁쩌렁 울리는 우렁찬 목소리가 대답했다.
"악씨는 악씨인데 계집애가 아니라 부인이오"
"응?"
갈 장로는 어리둥절해하더니 놀란 소리로 외쳤다.
"설--- 설마 - 악불군의 마누라를 붙잡았나?"
영호충의 놀라움은 그보다 훨씬 컸다. - P51

영호충이 어렸을 때부터 키운 악불군이었으나 그 성품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했다. 비록 동귀어진 수법으로 반격을 했지만, 영호충은 정말로 사부의 배에 검을 찌를 만큼 배덕한 성격이 못 되었다. 필시 사부의 몸에 닿기 직전에 검을 멈췄을 것이다. - P67

영호충은 남편을 꺾고도 차마 찌르지 못해 물러났지만, 남편은 도리어 그가 방심한 틈을 타 독수를 썼다. 방문좌도들도 마다하는 비열한 행동을 당당한 오악파 장문인이 서슴없이 저지르는 것을 보자 너무도 수치스러워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굳세고 의지가 곧은 악부인이었지만 남편의 이런 모습을 보는 순간 기운이 쭉 빠지고 모든 희망이 달아나는 것 같았다. - P75

"충아, 앞으로 사람을 만날 때는 그저 좋게만 생각지는 말거라!"
"예!"
그렇게 대답한 영호충은 목 뒤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악 부인의 안색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사・・・ 사모님!"
놀란 그가 목청이 터질 듯이 악 부인을 부르며 부축해보니, 뜻밖에도 날카로운 비수가 가슴 한쪽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악 부인은 비수가 심장을 관통해 절명한 것이었다. 영호충은 넋이 나가 입을 떡 벌렸지만, 비명도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 P77

"좋아요, 오늘 한 번은 살려주겠어요. 포장로, 막 장로, 우리가 악불군을 붙잡았다가 풀어준 이야기를 강호에 널리 퍼뜨리시오. 그리고 악불군이 벽사검법을 익히기 위해 스스로 몸을 망가뜨려 남자도 여자도 아닌 괴물이 되었다는 사실도 천하영웅들에게 낱낱이 알리시오." - P81

"오냐, 이번만은 한발 양보할 테니 두 여자를 모두 맞아들이도록 해다. 태감이 되면 아무하고도 혼인할 수 없으니 화상이 되는 것이 낫겠지. 하지만 혼례를 올린 뒤에 내 귀여운 딸을 박대하면 절대 안 된다! 첫째 부인, 둘째 부인도 나누지 말고 평등하게 하되, 네 나이가 더 많으니 의림더러 언니라고 부르라고 하마."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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