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친구들." 백작이 말했다. "여러분은 당연히 오늘 일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나는 면담을 위해 크렘린으로 초대받았습니다. 거기서 턱수염을 멋지게 기른 현 정권의 당국자 몇 사람이 나는 귀족으로 태어난 죄로 여생을 한 장소에서 보내는 형을 받아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그곳은 바로………… 이 호텔입니다." - P33

자신의 상황이 다르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고 상상하는 것은 미쳐가는 확실한 길일 뿐이었다. - P38

나이 많은 그리스인은 문을 막 나가다가 우뚝 멈춰 섰다.
"각하… 개인적인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그리스인은 수줍어하는 모습으로 대공의 책상을 가리켰다.
"앞으로도 백작님의 시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백작은 고맙다는 뜻으로 빙긋 미소 지었다.
"이런 말을 하게 되어 유감입니다만, 콘스탄틴, 시를 쓰던 나의 시절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로스토프 백작님, 시인으로서 백작님의 시절이 지나갔다고 한다면 유감스러운 사람은 우리입니다." - P47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지배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편으로 백작은 평생을 연금 상태로 지내야 하는 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이 목표를 이루려면 어떻게 하는 게 가장 가능성이 높은지 궁리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 P52

그러나 백작에게는 복수의 기질이 없었다. 장대한 작품을 구상할 상상력도 없었다. 제국을 복원하겠다는 꿈을 꿀 정도의 공상적인 자아도 없는 게 확실했다. 그는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 P53

오랫동안 백작은 신사란 불신감을 가지고 거울을 보아야 한다고 믿어왔다. 거울은 자기 발견의 도구이기보다는 자기기만의 도구인 경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젊은 미인이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각도에 맞추려고 30도쯤 몸을 돌려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을 그는 얼마나 자주 보았던가? - P65

"아빠가 얘기하길, 공주는 패배자들이 군림하던 시대의 타락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래요."
백작은 깜짝 놀랐다.
"몇몇은 그랬을 수도 있겠지." 백작이 수긍했다. "그러나 다 그런건 아니야. 그건 확실히 말할 수 있어." - P73

"원칙적으로 말해서 새 세대는 이전 세대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어느 정도 고마움의 빚을 지고 있단다. 우리의 나이 많은 분들이 밭을 경작하고 전쟁에 나가 싸웠어. 그분들이 예술과 과학을 발전시키고, 일반적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희생한 거야. 그러한 노력을 해왔으니, 설령 그 노력이 변변찮다 할지라도, 그분들은 마땅히 우리의 감사와 존경을 받아야 하는 거란다." - P84

니나는 집게손가락을 세워 흔들면서 백작의 말을 잘랐다.
"아저씨는 방금 전에 실은 아주 젊다고 말했잖아요."
"그럼. 젊고말고."
"그렇다면 아저씨는 ‘이제까지 살아온 경험‘이라는 말을 하기엔 아직은 좀 이른 것 같아요."
잘났어, 정말. 백작은 생각했다. 이 차만큼이나 명징하고 야무지군. - P88

할 일은 너무 없고, 할 일 없이 때우기엔 시간이 너무너무 많아서 인간 감정의 공포스러운 수렁이라 할 수 있는 권태감이 계속해서 백작의 마음의 평화를 위협했다. - P90

메트로폴 호텔에서 4년을 살아온 백작은 자신을 이 호텔에 관해 꽤 많이 아는 전문가라고 생각했다. 직원들의 이름을 알고 이곳의 서비스를 직접 겪어서 알고 여러 스위트룸의 장식 스타일을 쉬이 머리에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니나에게서 교육을 받고 나니 자신이 얼마나 풋내기였는지 깨닫게 되었다. - P92

화려함은 끈질긴 힘이니까 말이다. 영악함도 끈질긴 힘이다.
황제가 계단 아래로 끌려 내려와 거리에 던져질 때 화려함은 얼마나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는가. 그러고 나서 화려함은 조용히 알맞은 때를 기다리며 새로 임명된 지도자의 복장에 관해 조언해준다. - P98

그의 마음속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커피 탁자 위, 접힌 신문 옆에 놓여 있던 스푼과 찻잔의 모습이었다.
그것들에게 죄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 작은 그림은, 그동안 백작의 영혼을 짓누른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주었다.
.
.
.
즉, 백작이 스위트룸 317호에서 본 것은 단순히 오후의 차 한 잔이 아니라 자유인인 한 신사의 일상생활의 한 단면이었던 것이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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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6월 21일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이 내무인민위원회 소속 긴급위원회에 출두함

주재: V. A. 이그나토프, M. S. 자콥스키, A. N. 코사레프
검사: A. Y. 비신스키 - P13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당신의 증언을 모두 고려해보면 우린 그 시 「그것은 지금 어디 있는가?」를 썼던 명민한 영혼이 자기 계급의 부패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굴복했으며, 지금은 한때 자신이 지지했던 바로 그 이상에 위협이 되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소. 이를 근거로 한다면 우리로서는 당신을 이 방에서 내보내 수감하는 게 온당할 것이오. 하지만 당의 고위직 중에는 혁명 이전 단계 영웅의 범주에 당신을 넣는 사람들이 있소. 그래서 위원회의 의견은, 당신은 당신이 그리도 좋아하는 그 호텔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오. 하지만 절대 착각하지 마시오. 만약 당신이 한 걸음이라도 메트로폴 호텔 바깥으로 나간다면 당신은 총살될 테니까. 다음 사건. - P17

1922년 6월 21일 오후 6시 30분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이 에스코트를 받으며 크렘린 궁전 문을 나와 ‘붉은광장‘에 들어섰을 때 날은 눈부시게 아름답고 시원했다. - P21

위층으로 올라가는 방식조차 결정하지 못하는 군인에게 어떻게 전쟁터에서 승리하기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백작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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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신은 보라색을 좋아하지 않았다. 병적으로 억눌린 듯한 색깔이 심장병 환자의 입술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온 세상을 채운 보라색에 포위되어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 남은 인생을 이 보라색 세계에서 살아야 했다.
헤일로호도 없고 윈톈밍의 우주선도 없고 인간의 그 어떤 흔적도 없었다. - P761

두렵지만, 할 수밖에 없는 한 가지 일이 두 사람에게 남았다. 현재 그곳의 연대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저속 환경에서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 있었다. 정상 광속의 세계에서는 방사성 붕괴가 발생하지 않는 원소들이 저속에서 각기 다른 속도로 붕괴되기 때문에 저속에서 지속되는 시간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 - P762

그녀 뒤에 1890만 년의 세월이 있었다. - P764

관이판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뭘 하죠?"
"다시 찾아보고 싶어요. 정말 작은 흔적조차 없을까요?"
"없어요. 1800만 년이 흘렀어요. 모든 게 사라졌어요."
"돌에 글씨를 새겨놓았을 거예요."
관이판이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청신을 보았다.
청신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AA는 돌에 글씨를 새겨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 P765

1시간 뒤 그들이 받은 이미지 위에 1890만 년 전 글씨가 나타났다.

우리는 행복하게 살았어요
당신들에게 작은 선물을
붕괴를 피해
새로운 - P766

그때 무언가가 그들을 상념에서 깨웠다. 희미하게 반짝이는 선으로 그린, 사람 키만한 직사각형이 은은한 빛을 내며 공중에 떠다니고 있었다. 현실의 화면에서 마우스 커서로 선택해 확대시킨 창같았다. - P768

"안 돼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청신이 관이판의 어깨를 붙잡고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우리 둘도 1800만년만큼 멀어지고 싶어요?"
관이판이 말없이 청신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뭘 가지고 들어갈 수 있을까요?"
10분 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문으로 들어갔다. - P770

관이판이 손을 휘둘러 주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그거예요! 당신에게 별을 선물했던 윈톈밍이 당신에게 또 우주를 선물했군요. 청신, 이건 우주예요. 비록 작지만 이건 하나의 우주예요."
.
.
.
"그는 가장 위대한 남자군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별과 우주를 선물할수 있다니, 난,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요."
청신이 옆에 앉아 그의 어깨에 기대며 웃었다.
"당신은 우주에 하나뿐인 남자니까 아무것도 줄 필요가 없어요." - P774

지자가 허리 숙여 인사했다.
"647호 우주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는 이 우주의 관리자입니다." - P775

청신은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를 기록하는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 회고록을 《시간 밖의 과거》라고 이름 붙였다. - P783

관이판이 말했다.
"시간이 2차원만 되어도, 그러니까 직선 형태가 아니라 평면 형태만 되어도 여러 개의 방향이 생기게 되죠. 그러면 동시에 여러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어요." - P784

회귀 운동 성명서: 우리 우주의 총 질량이 임계치 아래로 떨어졌다.
우주는 곧 개방된 뒤 영원히 팽창하며 죽어갈 것이고 모든 생명과 기억도 사라질 것이다. 당신들이 가져간 질량을 돌려주고 기억체만 새로운우주로 보낼 것을 촉구한다. - P790

소우주에는 메시지가 담긴 표류병 하나와 투명 공만 남았다. 표류병은어둠에 파묻히고 1 세제곱킬로미터의 작은 우주에서 투명 공 속 작은 태양만이 가물거리는 빛을 토해냈다. 이 작은 생명의 세계 속에서 물방울이 무중력 유영을 하고 있었다. 물방울에서 뛰쳐나온 작은 물고기가 다른 물방울로 뛰어 들어가 한들거리는 수초 사이를 유유히 헤엄쳐 다녔다. 작은 육지의 풀잎에서 굴러 떨어진 이슬 한 방울이 핑그르르 돌아 날아오르며 우주를 향해 한 가닥 투명한 햇빛을 반사했다. - P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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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가 하늘을 가리켰다.
"저건 해왕성, 저건 천…… 아니, 토성이에요!"
거대한 목성형 행성 2개가 이미 2차원으로 변해 있었다. 천왕성의 궤도가 토성보다 더 밖에 있지만 지금은 천왕성이 태양 너머 토성의 맞은편에 위치해 있어 토성이 먼저 2차원으로 변한 것이었다. - P672

2차원 바다 위에 외롭게 떠 있는 3차원 섬이 계속 가라앉으며 녹아내렸다. 유럽 6호 우주 도시가 완전히 2차원화되는 데 걸린 시간은 10분이 채 되지 않았다. - P678

하지만 추락 지역에서 도망치는 건 불가능했다. 조금 전 AI가 한 말은태양계의 3차원 공간이라는 거대한 카펫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2차원 심연을 향해 떠밀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도망치고 있는 우주선들은 카펫 위에서 느릿느릿 기어가는 벌레일 뿐이며, 그들은 별로 남지 않은 생존 시간조차 얼마 연장할 수 없을 것이다. - P686

"떠나라고요? 어디로요?"
"어디든. 은하계 어디든 갈 수 있어. 살아 있는 동안 안드로메다 은하도 직접 볼 수 있을 게다. 헤일로호는 광속 우주선이니까. 그 우주선에 세계에서 하나뿐인 공간곡률 추진 엔진이 탑재되어 있어."
경악에 가까운 전율이 청신과 AA의 말문을 막았다. - P696

청신이 AI에게 명령한 뒤 화면 속 뤄지를 향해 말했다.
"돌아가겠어요. 아직 시간이 있어요. 아직 천왕성도 다 추락하지 않았잖아요!"
그때 AI가 사무적인 말투로 대답했다.
"현재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최고 권한은 뤄지 박사님에게 있습니다. 헤일로호를 명왕성으로 되돌릴 수 있는 건 뤄지 박사님뿐입니다."
뤄지가 통로 앞에 선 채 웃으며 말했다.
"떠날 생각이었다면 아까 너희와 함께 떠났겠지. 난 장거리 항해를 하기엔 너무 늙었어. 내 걱정은 마라. 난 아무것도 놓치지 않았다고 말했잖아. 공간곡률 추진 엔진 시동 준비." - P699

청신은 이제야 알았다. 지구 문명이 살아남을 수 있는 세 가지 방법, 즉벙커, 블랙존, 광속 우주선 가운데 광속 우주선만이 진정한 생존 방법이라는 것을.
윈톈밍이 그 길을 알려주었지만 그녀가 그 길을 막아버리고 말았다. - P704

청신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와 AA가 지구 문명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두 사람이 될 것이다. 그녀가 죽는다는 건 지구 인류의 절반을 죽이는 것과 같았다. 살아남아야만 했다. 이것이 그녀의 잘못에 대한 응분의 벌이었다. - P706

헤일로호가 윈톈밍이 청신에게 선물한 별을 향해 광속으로 날아갔다. - P710

AA가 말했다.
"선생님 잘못으로 태양계가 멸망했다고 생각하세요? 그건 정말 우스운 착각이에요. 물구나무서기를 하면서 자기가 지구를 들어 올렸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한 거라고요. 설사 당시에 선생님이 웨이드를 저지하지 않았더라도 그 전쟁의 결과가 어땠을지는 아무도 몰라요. - P713

비행선 옆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흰색 재킷과 어두운 색 바지 차림이었으며 헤일로호가 착륙할 때 생긴 기류에 머리가 어지럽게 날렸다. AA가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그분이에요?"
청신이 고개를 저었다. 멀리서 얼핏 보았지만 윈텐밍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 P718

주위를 둘러보러 다니는 동안 AA는계속 관이판 곁을 맴돌며 관이판이 말할 때마다 미소 짓고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그녀는 지금껏 남자 앞에서 그런 적이 없었다.
.
.
.
그런데 지금 AA가 위협의 세기에서 온 이 우주학자를 사랑하게 된 것 같았다. 새로운 세계에 도착하면 AA가 행복한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에 청신은 속으로 흐뭇했다. - P727

청신 자신은 정신적으로 이미 죽은 상태였다. 그녀의 정신이 계속 살아있도록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윈톈밍이었지만 이제 그 희망도 물거품이 되었다. 286광년 밖에서 만나기로 한 4세기 전 약속은 이미 물거품이 되었다. 물론 육체적으로는 계속 살아가겠지만 그건 그저 책임감 때문이었다. 남아 있는 지구 문명의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것을 막아야했다. - P727

관이판은 헌터호를 타고 회색별로 가보기로했다. 청신이 함께 가겠다고 고집하자 처음에는 강하게 반대하던 관이판이 AA의 한마디에 동행하기로 결정했다.
AA가 말했다.
"같이 가게 해주세요. 윈톈밍과 관계된 일인지 알고 싶으실 거예요." - P728

"빛무덤이라고요?"
"광속 우주선의 항적이 만들어낸 저속 블랙홀이죠. 3호 세계는 블랙홀이에요. 어떤 사건으로 그 세계의 좌표가 노출되는 바람에 그곳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자기 세계를 블랙홀로 만들 수밖에 없었어요."
"우린 그걸 블랙존이라고 불러요." - P730

"암흑의 숲 상태가 우리에겐 생존의 전부이지만 우주 전체로 보면 아주 작은 일이에요. 우주는 거대한 전쟁터예요. 각 진지 사이에 있는 저격수들이 실수로 자기 위치를 노출한 적을 사살하죠. 통신병이라든가 취사병 같은 그게 바로 암흑의 숲 상태예요. 전쟁 전체로 보면 작은 일이라고요. 태양계 인류는 진정한 행성 간 전쟁을 보지 못했어요." - P732

진정한 행성 간 전쟁에서는 신에 버금가는 막강한 위력을 가진 문명들이 서슴없이 우주의 법칙을 전쟁 무기로 삼죠. 무기로 삼을 수 있는 규칙은 아주 많아요. 제일 흔하게 사용하는 게 공간적 차원과 광속이에요. 보통 차원을 낮추는 건 공격무기로 사용하고 광속을 낮추는 건 방어용으로 쓰죠. - P733

공격자가 먼저 자신을 바꾸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저차원 존재로 바꾸는 거죠. 4차원에서 3차원으로 바꿀 수도 있고 3차원에서 2차원으로 바꿀 수도 있어요. 전체 문명이 저차원으로 들어간 뒤에 적에게 차원 공격을 가해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가공할 규모의 광적인 공격을 개시하는 거예요. - P734

전쟁에서 저광속 블랙홀을 만들어 적을 그 안에 가둬버리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방어용 성벽이나 함정으로 더 많이 사용해요. 저광속 지대 중 면적이 넓은 건 성계 하나를 통째로 에워쌀 수 있을 만큼 길어요. 항성이 밀집해 있는 곳에서는 수많은 저광속 블랙홀이 하나로 합쳐져 수천만 광년에 걸쳐 이어져 있죠. 그게 행성간 만리장성이에요. 아무리 강력한 함대도 그 함정에 빠지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어요." - P736

"전원 시대가 지나고 전쟁 시대가 되면서 한차원, 한차원 거시에서 미시로 줄어들고, 광속도 계속 늦어진 거로군요………" - P738

"복원자?"
"리세터(Resetter)라고도 불러요.
.
.
복원자는 우주를 리셋해 전원 시대로 되돌리고 싶어 해요."
"어떻게요?"
"시곗바늘이 12시를 지나게 하는 거예요. 공간의 차원을 예로 들어볼게요. 이미 저차원으로 떨어진 우주를 다시 고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건 불가능해요.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서 우주를 차원으로 낮추고도 계속 차원을 낮추면 시계가 재설정되면서 우주의 거시 차원이 다시 10차원으로 복원된다는 논리예요."
"0차원이라고요? 공간이 차원으로 변하는 걸 봤어요?"
"아뇨, 2차원으로 떨어지는 것만 봤어요. 1차원화도 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어디선가 복원자가 그렇게 하고 있어요. 그들이 성공한 적이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광속을 0으로 낮추는 게 상대적으로 더 쉬우니까 그렇게 해서 무한한 광속으로 되돌아가려고 계속 시도하고 있는 거죠." - P742

"그렇진 않아요. 죽음의 선이 완전히 확산된 후에는 곡률 추진 항적처럼 그 내부의 광속은 0이 아니에요. 넓게 확산될수록 내부의 광속은 더 높죠. 하지만 그래도 초속 10여 킬로미터의 저광속이에요. 그러니까 죽음의 선이 확산되고 나면 이 성계가 저속 블랙홀로 변할 가능성이 커요. 박사님이 말한 블랙존이죠. 어서 가요." - P743

그때 AA가 그들을 호출했다.
관이판이 응답했다.
"여기는 헌터호. 무슨 일이에요?"
AA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수없이 불렀지만 AI가 받아서 두 분을 깨울 수 없다고 했어요!"
"위급 상황이 아니면 연락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무슨 일 있어요?"
"엄청난 소식이에요! 윈톈밍이 왔어요!" - P745

그때 갑자기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이 귓속으로 밀고 들어왔다. 예리한칼이 왕복선을 머리부터 꼬리까지 가르고 들어오는 것 같더니 뒤이어 격렬한 진동이 찾아왔다. 바로 다음 순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청신은 그것이 찰나의 시간이라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한없이 짧고 또 한없이 긴 시간이었다. 순간적으로 뭔가를 뛰어넘는 느낌이 들며 청신은 자신의 몸이 시간의 바깥으로 빠져나온 것 같았다. 잠시 후 관이판이 방금 그녀가 ‘시간의 진공‘을 경험한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 P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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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신과 AA는 헤일로호를 타고 목성 클러스터로 돌아가 아시아 1호 동면 센터에서 다시 동면에 들어갔다. 예정된 동면 기간은 200년이지만 계약에 한 가지 조항이 추가되었다.
동면 기간 내에 암흑의 숲 공격을 받게 된다면 언제든 소생시킨다. - P601

단독으로 발사된좌표는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언젠가는 결국 청소된다. 허위 좌표일 수도 있지만 1억만 개의 저엔트로피 세계에 그 수보다1만 배는 많은 청소부가 있으므로 그중 누군가는 그것이 진짜 좌표라고 판단할 것이다. 모든 저엔트로피체는 청소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 P609

내가 저엔트로피 세계를 볼 수 있다면, 그 세계도 언젠가는 나를 볼 수 있다. 조금 늦게 보느냐 일찍 보느냐의 차이일 뿐.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든 남이 청소할 때까지 기다리는건 위험하다. - P609

이건 이 백색의 구체와 우주 도시 결합체가 목성의 그림자속에 숨어 있는 것도 아니고 목성과 나란히 돌며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지금 그들은 목성의 위성이 되어 목성 주위를 돌고 있었다. - P617

청신이 물었다.
"공격 경보가 발령됐나요?"
차오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세기 전 경보가 잘못 발령된 적이 두 번 있었지. 그때 너희를 깨울뻔했어. 하지만 이번엔 진짜야. 얘들아, 나도 이제 120세가 됐으니 이렇게 불러도 되겠지? 얘들아, 암흑의 숲 공격이 개시됐단다." - P619

AA가 창밖으로 보이는 우주 도시 결합체를 가리켰다.
"왜 벙커로 피하지 않는 거죠?"
차오빈이 시선을 아래로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 벙커도 무용지물이니까."
청신이 물었다.
"지금 광립이 태양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어요?"
"광립은 없단다."
"그럼 뭘 발견한 거예요?"
차오빈이 처량하게 웃었다.
"종이쪽지." - P620

관측 데이터에서 외계 우주선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경보 시스템이 그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외계 우주선이 태양을 향해 광립 대신 다른 물체를 발사한 것이다 - P622

레벌레이션호에서 보낸 무인탐사정이 빠른 속도로 목표물에 다가갔다. 50킬로미터, 500미터……, 탐사정이 목표물과 5미터 거리에서 멈추었다. 탐사정에서 촬영한 고화질 홀로그램 화면이 두 우주선으로 전송되었다. 화면 속에 외우주에서 태양계로 발사된 물체가 떠 있었다. 작은 종이쪽지였다. - P628

사람들은 그 물체가 평범한 종이쪽지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마치 환영인 듯 현실 세계의 그 어떤 물체에도 아무런 작용을 미치지 않았고, 작은 우주의 기준면처럼 정확하게 원래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어떤 접촉으로도 위치나 운행 궤도를 바꿀 수 없었다. - P630

바실리가 우주복 장갑을 낀 손으로 종이쪽지를 만지자 손이 종이쪽지를 뚫고 지나갔다. 장갑 표면에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고 바실리도 그 어떤 영혼의 신호도 받지 못했다. 그가 다시 손을 뻗어 종이쪽지가 손바닥 가운데 왔을 때 손을 멈추었다. 작은 흰색 필름이 손바닥을 반으로 가르는 위치에 있었지만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종이쪽지가 손바닥과 맞닿은 부위에 손바닥 단면의 윤곽선이 나타났다. 종이쪽지가 잘리거나 찢어지지 않은 상태로 온전히 손바닥을 관통한 것이다. - P631

외마디 비명 후 레벌레이션호의 모니터에 두 탐사 대원 중 한 명이 탐사정에서 뛰쳐나오는 장면이 잡혔다. 우주복의 추진기를 작동시켜 탈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탐사정의 아랫부분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그곳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달궈진 유리 위에 놓인 아이스크림처럼 탐사정의 아랫부분이 녹아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 P640

"장군님은 저 물체가 아무것도 아니고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고하셨죠. 장군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에요. 안에 아무것도 없어요. 저건 그저 공간이에요. 우리 주위에 있는,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공간과 똑같아요. 유일한 차이점은 2차원이라는 거죠. 덩어리가 아니라 평면이예요. 두께가 없는 평면." - P643

"도망칠 수 있나?"
"지금 도망치는 건 폭포의 낭떠러지 끝에 매달린 배에서 노를 젓는 것과 같아요. 탈출속도를 넘어서지 못하는 한, 노를 열심히 저어도 폭포로 떨어지는 시간을 늦출 뿐이죠. 돌멩이를 아무리 높이 던져 올려도 결국에는 떨어지는 것과 같아요. 태양계 전체가 폭포로 떨어질 거예요. 탈출속도에 도달해야만 여기서 탈출할 수 있어요.",
"탈출속도가 얼마야?"
"네 번이나 계산했으니까 틀릴 가능성은 없어요."
"그래서 탈출속도가 얼마냐고!"
레벌레이션호와 알래스카호 승선원들이 숨죽이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전 인류를 대신해 종말의 판결을 듣고 있었다. Ice가 담담하게 판결을 내렸다.
"광속입니다." - P643

5시간 전 태양계 경보 시스템을 통해 우리 성계에 대한 암흑의 숲 공이
격이 개시되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번 공격은 차원 공격입니다. 태양계가 존재하는 공간의 차원을 3차원에서 2차원으로 떨어뜨리는 공격입니다. 태양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완전히 멸종될 것입니다. - P652

AA가 큰 소리로 외쳤다.
"뤄지 박사님이세요?"
"나 말고 또 누가 있겠어? 다리가 예전 같지 않아서 마중하러 올라갈수가 없군. 너희가 내려오려무나."
청신과 AA가 통로를 따라 뛰듯이 내려갔다. - P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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