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 기이한 것은, 그런 악령을 몰아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내 마음이 추억이라는 신선한 그릇에 든 저 여자의 형상을 좇았다는 점이다. 나는 내 눈에 보일 듯이 어른거리는 그 여자의 형상, 엄위하기가 기치를 드높인 군대 같은, 그 당당하던 여자의 모습에서 마음을 돌릴 수가 없었다. - P513

사부님 말씀에 따르면, 서책이라는 것은 서책 자체의 내용도 다루고 있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서책끼리 대화를 주고받는다는 것을 나는 사부님 말씀을 듣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었다. - P529

자연 현상에서 하나의 법칙을 이끌어 내자면 우선 설명되지 않는 현상에 주의하면서,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갖가지 일반적인 법칙을 서로 연계시켜 보아야 한다. - P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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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다. 나와 여자는 나란히 누워 있었다. 부드러운 손길로 내 몸을 쓰다듬는 여자의 손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내 가슴속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그러나 평화롭지는 못했다. - P464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죄악을 저지르기는 하였어도 내 청춘은 참 아름답고 선했었다는 느낌은 지워지지 않는다. 이제, 내 앞에 임박한 죽음에도 내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때가 되었다. 그러나 그 젊던 시절에 나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저지른 죄악을 심히 울었다. - P466

회한에 몸이 오그라들고 공포에 몸이 떨렸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고해 성사를 맡아 줄 것을 간청했다. 사부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낱낱이 고해했다. - P468

허나 하느님께서 창조하셨거니, 하느님께서 이 못난 것들을 그냥이야 창조하셨겠느냐? 무엇이든 쓸 만한 걸 좀 넣어 두지 않았겠느냐는 말이다. - P469

살바토레는, 사부님이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얼렁뚱땅 얼버무릴 계제도 아니고 임기응변으로 모면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살바토레는 듣기 민망한, 참으로 괴이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살바토레는 식료계 레미지오를 기쁘게 하기 위해 밤이면 마을에서 여자를 꾀어 자기만 아는 통로를 통해 수도원 경내로 들어온다고 고백했다. - P495

살바토레가 중언부언하자 사부님은 결정타를 날렸다. 그를 협박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언제 레미지오를 만났느냐? 돌치노와 함께 있을 때 만났느냐? 아니면 그 뒤에 만났느냐?」
살바토레는 <돌치노〉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단 심판관들로부터 목숨만은 구해 달라고 애원했다. 사부님은 진실만 이야기하면 이단 심판관들로부터 지켜 주고, 들은 이야기도 혼자만 알고 있겠노라고 약속했다. - P496

수도사님,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현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탐욕스러워지는 것입니까? 여기에 서 있는 저는 꿀돼지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단자를 화형대로 보내시는 수도사님, 꿀돼지도 화형대로 보내시겠습니까? - P506

「네,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방으로 들어간 저는, 바닥에 쓰러진 베난티오를 발견했습니다. 제가 볼 당시에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주방 바닥에?」
「그렇습니다. 설거지대 바로 옆이었습니다. 문서 사자실에서 내려온 것 같았습니다.」 - P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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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내일까지 우리가 두 수도사(어쩌면 셋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를 살해한 범인을 찾아내지 못하면, 나로서는 이 수도원에서 그런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이 미결인 채 남아 있다는 걸 숨기지 못할 것입니다. 상대가 베르나르 기 같은 실력자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 P398

「대체 나에게무엇을 베푸셨습니까? 장서관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까. 수도사들에게 질문을 마음대로 할 수가 있습니까? 나는 원장의지원을 도무지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이 사건과 장서관은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그럴까요? 아델모는 채식사, 베난티오는 번역사, 베렝가리오는 보조사서인데도 장서관과 관련이 없다고 하시겠습니까?」 - P399

「어르신, 이단이라고 하는 독초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당당하게 말했다. 따라서 다음 말을 잇느라고 망설일 수 없었다.
「저는 대중을 그릇되게 인도한 사악한 돌치노 수도사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 P415

돌치노는 일찍부터 영특한 데가 있어서 읽고 쓰는 것을 익혔으나, 장성하자 배운 값을 하느라고 저를 길러 준 사제의 집을 털어 가지고는 북쪽으로, 그러니까 트렌토로 도망쳤다. 바로 여기에서 돌치노는 게라르도 세가렐리의 설교를 듣고 나서 이단자의 피를 끓이고는, 자신은 하느님의 유일한 사도이며 모든 것은 사랑안에서 평등하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한다. - P422

나는 혼자서 장서관으로 올라가기로 결심했다. 무엇을 찾으려 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사부님 모르게, 미궁으로 들어가 방향을 헤아려 보자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P434

나는 성직자들인 심판관들과 속권인 형리들이, 청빈 속에서 살며 그리스도에게 세속적 재산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을 왜 그렇게 모질게 다루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죄를 주어 화형대에 매달아야 할 사람은 호의호식을 탐하고, 남의 재물을 탐하여 죄악과 성직 매매로교회를 더럽히는 자들이 아니겠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 P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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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그런 괴이한 사건이 수도원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 그리 놀랍지 않았다. 까닭인즉, 수도사들이라는 사람들은 바로 학문에 몸을 바친 사람들이고, 수도원 장서관이란 곧 천상의 예루살렘이자, <미지의 세계terra incognita〉와 하데스(冥府)의 변경에 가로놓인 지하 세계일 터이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모두 장서관에, 장서관의 규칙과 금기에 완전히 매료당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장서관과 더불어, 장서관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었다. - P347

만일에 수도원만이 소장하고 있는 새로운 학문이 수도원 밖에서 자유로이 나돈다면 신성한 수도원은 교구의 부속 학교나 도시의 대학과 다를 바가 없어지고 이로써 수도원의 신성은 허물어질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 P349

내가 살바토레를 관심 있게 보았던 것은, 그의 특이한 외모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주위에서 있었던 일이 당시 이탈리아를 술렁거리게 했던 수많은 사건과 운동의 빛나는 축도(縮圖)같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 P366

그래서 나는 지나가는 말로 살바토레에게 물어보았다.
‘혹 세상을 주유하시면서 돌치노 수도사를 만나신 적은 없습니까?’
그의 반응은 참으로 뜻밖이었다. 그는 두 눈을 화등잔같이 뜨고 거듭거듭 가슴에 성호를 긋고는 횡설수설, 나로서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떠들어 대었다. 요컨대 그는 내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했던 듯하다. 내 질문이 나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를 믿고 나에게 우정을 느끼는 것 같아 보이던 살바토레는 질문이 던져진 순간부터 나를 두려워하는 것같았다. 그는 우물쭈물 핑계를 대고는 자리를 떠버렸다. - P367

사부님께서는 우베르티노 어르신과 말씀 나누실 때에는, 성자든 이단자든 필경은 모두 똑같다고 주장하신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원장과 말씀 나누실 때 사부님께서는 이 이단과 저 이단, 그리고 이단과 정통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는 걸 설명하려고 애쓰시는 것 같았습니다. 바꾸어 말씀드리면 사부님께서는, 근본적으로 같은 것을 다른 것이라고 우기시는 우베르티노 어르신을 나무라시면서, 기본적으로 다른 것을 같다고 우기시는 원장님을 질책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 P370

「그걸 모르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입이 가벼웠던 게 불찰이었다. 사부님은 걸음을 멈추더니 험상궂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 보면서 대갈 일성 꾸짖었다.
「네 이놈! 네 앞에 있는 자가 누구더냐? 주님의 권능에 힘입어 학식과 기예를 고루 갖춘 내가 아니더냐? 저 혼자만 알겠다고 만들어 놓은 다른 사람의 암호를 그것도 단 몇 시간에 해독한 늙은 프란체스코 수도사에게, 너같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감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겠다고 재잘거릴 수 있다더냐!」
나는 황급히 사죄했다. 무의식중에 사부님의 빳빳한 자존심을 건드려 버린 것이었다. 나는 그분이 자기의 추리의 속도와 그 정확성을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 P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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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나는 하느님을 경외하되, 성물을 통한 외적인 모양새를 통해서도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통하여 구세주를 예배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옳고 적절하기 때문입니다. - P270

만일 이 두 범죄 사건의 범인이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사절단이 수도원에 도착하게 될 경우 수도원장은 자기네 수도원에, 교황측 사절단의 의견과 행동에 영향을 미칠 만한 자가 있음을 인정해야 하고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터였으니 수도원장으로서는 속이 타지 않을 수 없는노릇이었다. - P279

저간의 사건에 대한 실마리를 잡기 위해서라면 수도사들의 이단 이력(履歷)을 들추는 일도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할 거라는 말씀이겠군요? - P292

명심하여라. 끈기 있게 달라붙을 경우, 해독되지 않는 암호는 세상에 없는 법이다. - P315

이 미궁을 빠져 나가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처음 보는 문마다, 우리가 지난 곳마다 세 개의 기호로 나누어 표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 놓으면 한 번 지나간 곳은 쉬 알아볼 수있어서 두 번 다시는 실수하지 않을게다. - P335

우리는 들어간 길을 되짚어 근 반시간을 헤맸지만 여전히 우리의 위치를 파악하기는불가능했다. 어떤 점에서 사부님은 우리가 실패했다고 결론지었다. 사부님까지 실패를 스스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아침에 말라키아가 우리를 발견하기까지 거기에서 늘어지게 자고있는 수밖에 없었다. -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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